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63

4화) 백 년 만의 기적 황금빛 장식이 눈부시게 빛나는 황제의 전용 응접실. 카스테로 황제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찻잎을 곱게 갈아 천천히 차를 우려 냈다. 다관에서 피어오른 은은한 풀향이 응접실을 가득 채우자 긴장으로 굳어 있던 크러서스의 어깨도 조금씩 풀어졌다. 제국의 정점에 선 황제가 직접 차를 우리는 모습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수십 년을 곁에서 지켜본 크러서스는 알고 있었다. 카스테로는 황제가 되기에는 너무 심성이 순한 사람이었다.크러서스는 자신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흘렸다. “공작 왜 웃지?”“아 죄송합니다, 폐하. 오랜만에 다기를 다루는 모습을 보니 옛 생각이 나서 그만…” 카스테로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렇지, 공작은 오랜만이겠군. 몇 년을 전장만 돌았으니.” 푸른 눈동자에 옅은 그리움이 번진 카스테로는 벽에.. 2026. 7. 29.
25화) 반 크로첸 하늘을 가릴 만큼 거대한 고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블랙바인 숲은 아침에도 그늘이 져 어두웠다. 게다가 전 날 내린 비로 땅이 질척거려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버거웠다. 암울한 숲만큼이나 카르테시온 잔병들의 분위기도 어두웠다. 병사들의 얼굴에는 땀과 함께 짙은 패배감이 어려 있었다. 테오도르는 비참함과 아픔이 동시에 밀려들어 며칠째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게다가 불편한 다리 때문에 로스터의 부축을 받으며 이동하는 것이 여간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로스터 부단장은 로웬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부대의 대패로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마저 짐을 더한 것이 신경 쓰였다. 말 수가 적은 로스터가 드러내 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테오도르는 알 수 있었다. 로스터도 병사들도 자신에게 불.. 2026. 7. 27.
3화) 아름답고 매혹적인 쌍둥이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눈부신 미소를 띈 노아르와 이벨린이 나란히 이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라그리스와 홀던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아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안은 얕게 한숨을 내쉰 뒤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제국의 빛나는 두 분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군요, 발드라이크 소공자.”노아르는 활처럼 휘어진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 하나에 주변의 공기마저 밝아진 듯,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머물렀다. “뤼투아 전투에서의 활약상이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동년배라고 알고 있는데, 소공자께는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과찬이십니다.”노아르의 웃음기 어린 눈이 이안을 찬찬히 훑었다. 이안은 속을 궤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 2026. 7. 22.
24화) 감시자 나뭇잎 사이로 잔잔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따라 야영지에는 새벽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모닥불은 잿빛 불씨만 희미하게 남긴 채 꺼져가고, 교대를 선 병사들은 말없이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고요한 풍경 사이로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보초를 선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멋스럽게 가지를 뻗은 전나무를 흘깃거렸다. 굵은 가지 위에 십여 마리의 세눈박이 까마귀들이 앉아 야영지를 빈틈없이 훑고 있었다. 각자 다른 방향을 응시하며 탐색하는 보라빛 눈동자들에 병사들은 소름이 돋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전장을 떠돌던 그들이지만, 언제 봐도 기분 나쁜 건 한결 같았다. 칼리스의 막사를 멀리서 조용히 응시하던 까마귀가 갑자기 날개를 퍼덕이더니 그의 막사와 가까운 나무로 날아갔다. 가지에 앉으려던.. 2026. 7. 20.
2화) 깨어난 뤼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헤일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헤스티아, 날 부축해 다오.” 헤스티아는 헤일로에게 가운을 건넨 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그의 팔을 어깨에 둘렀다. 성인 남자를 홀로 부축하기엔 버거웠지만, 몇 달 사이 야윈 헤일로의 몸은 놀랄 만큼 가벼웠다. 두 사람은 선대 가주들의 초상화가 늘어선 긴 회랑을 천천히 걸었다. 붉은 융단 위로 두 사람의 발소리만 낮게 울렸다. 회랑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흑철문이 나타났다. 가주 외에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금역.흑철문 한가운데에는 브렌하임의 상징인 피닉스가 새겨져 있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깃털 하나하나에서는 당장이라도 타오를 듯한 화염의 기세마저 느껴졌다. 문 앞에 선 헤일로는 잠시 숨을 고른 뒤 헤스티아를 향해 미소 지었다. 헤스티아는 .. 2026. 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