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을 가릴 만큼 거대한 고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블랙바인 숲은 아침에도 그늘이 져 어두웠다. 게다가 전 날 내린 비로 땅이 질척거려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버거웠다.
암울한 숲만큼이나 카르테시온 잔병들의 분위기도 어두웠다. 병사들의 얼굴에는 땀과 함께 짙은 패배감이 어려 있었다.
테오도르는 비참함과 아픔이 동시에 밀려들어 며칠째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게다가 불편한 다리 때문에 로스터의 부축을 받으며 이동하는 것이 여간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로스터 부단장은 로웬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부대의 대패로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마저 짐을 더한 것이 신경 쓰였다.
말 수가 적은 로스터가 드러내 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테오도르는 알 수 있었다.
로스터도 병사들도 자신에게 불만이 많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침묵이 오히려 더 무겁게 다가왔다.
자신의 무책임함과 어리석음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이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왕자의 자격이 있는 자인가…’
테오도르는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자괴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끓어오르는 후회와 자책을 억누르려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냐!”
갑작스러운 로스터의 일갈에 테오도르와 병사들은 바짝 긴장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시야에서 어둠이 서서히 걷혀가자 세련된 차림의 귀공자들이 말을 타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고상하고 세련된 자태에 병사들의 경계심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선두에 서 있던 말끔하고 단정한 인상의 귀공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흑발을 단정히 넘긴 그는 학자 같은 차분함과 귀족다운 품위를 동시에 풍기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 아래의 온화한 눈빛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기서 뵙는군요, 테오도르 전하.”
그는 얼굴만큼이나 단아하고 지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는 숲에 내려앉은 긴장감을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 크로첸 왕국의 넷째 아들인 반 크로첸이라고 합니다.”
테오도르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왠지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힘들고 지쳐 있던 데다 거친 군인들과 며칠을 함께하며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반의 존재는 청량하고 산뜻하게 다가왔다.
선뜻 인사를 건네려 앞으로 나서는 테오도르를 로스터가 막아섰다.
로스터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잇따른 사건을 겪으며 그는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로스터는 눈을 부릅뜬 채 반에게 다가가 거친 말투로 말했다.
“당신이 진짜 크로첸 왕국 사람인지 어떻게 증명하지?”
반은 로스터의 말에 슬며시 미소 짓더니 자신의 주위에 있던 귀공자들을 향해 무언의 승낙을 구했다. 그들의 승낙이 떨어지자 반은 품 안에서 은으로 된 명패를 꺼내 로스터에게 들이밀었다.
은빛 명패에는 크로첸 가문의 문장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오랜 세월 사용한 흔적은 있었지만, 흠집 하나 없이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병사들조차 그 명패가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것이 단번에 무엇인지 깨달았다.
크로첸 왕가의 신분패.
그 명패는 오직 왕가의 혈통만이 받을 수 있는 증표였다.
테오도르가 로스터를 저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무례했음을 사과드립니다.
보시다시피 저희 형편이 좋지 않아 예민하게 대응했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로스터도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이해합니다. 저희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으니까요.”
싱긋 웃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잠시 짙은 그늘이 스쳤다.
그제야 테오도르는 얼마 전 제국에 패망한 크로첸의 운명을 떠올렸다. 테오도르는 처음 만난 반에게 어렴풋이 동질감을 느꼈다.
“카르테시온으로 가는 길이신가요?”
“네…”
“마침 잘 되었습니다. 저희도 카르테시온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동행해도 될까요?”
테오도르는 반가움에 눈을 반짝거렸다.
처음으로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잔뜩 주눅든 테오도르는 기쁨을 감추고 힐끗 로스터를 쳐다보며 허락을 구했다. 로스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반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로스터의 허락을 받은 테오도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좋습니다. 함께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없는 영광입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반은 테오도르 가까이로 말을 몰아 다가왔다. 반과 테오도르가 나란히 말을 몰게 되자 로스터는 하는 수 없이 뒤로 밀려 났다.
반과 함께 온 귀공자들도 병사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섞였다. 멀리서 보면 마치 귀공자들을 호위하는 병사들처럼 보였다.
어느새 대열의 중심은 반과 귀공자들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도 병사들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직 로스터만이, 어느새 대열의 중심을 차지한 반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카르테시온에는 어쩐 일로?”
테오도르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반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저희는 루스베키아 국왕 폐하께서 보내신 사자들입니다. 자세한 것은 카르테시온 국왕 폐하를 만나 말씀드려야겠지만…
왕자님께서 먼저 아시는 것도 좋겠지요. 카르테시온의 미래이시니.”
반은 테오도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나지막이 말했다.
“루스베키아를 중심으로 반제국 연합군을 구성 중입니다.
하이데벨 연맹과 저희 크로첸도 참여합니다. 카르테시온 국왕 폐하의 의사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반은 다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오만한 제국의 행태를 이대로 두는 것은 성군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의 단정한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게다가 도무지 성미에 맞지가 않아서 말이죠.”
반은 테오도르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왕자님께서도 느끼시지 않습니까? 이 답답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테오도르는 반을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위축되어 있었다.
“...저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제국은 너무 강합니다.
황제의 사냥개를 만나신 적 있습니까? 그의 마녀는요?”
테오도르는 칼리스의 붉은 눈을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바람에 잠깐 잊고 있었던 다리의 통증이 다시 느껴져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모르십니다. 그 자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자인지…”
급격하게 표정이 어두워진 테오도르를 바라보며 반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부분은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이미 움직이고 있으니 좋은 소식이 곧 들려올 겁니다.
그리고, 마녀는… 하이데벨 대마법사가 우리 편이니 그쪽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이데벨 대마법사’라는 말에 테오도르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어떻게 그 대단한 자를 영입한 것일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판이 움직이고 있었다.
꺼져 가던 마음속에서 아주 작은 희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루스베키아 국왕이신 레오드 전하를 만나 보신다면…”
“왕자님이 가지고 계신 온갖 두려움과 의문을 씻을 수 있으실 겁니다.
저는 이미 나라를 잃은 자입니다. 그런 제게 꿈과 희망을 선물해 주신 분입니다.
아주 영민하고 대담한 분이시니 왕자님께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레오드 전하”
테오도르는 입 속에서 그 이름을 몇 번 굴려 보았다.
왕실 무도회에서 몇 번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눈빛이 날카롭고 기백이 남달랐던 사내였다.
젊은 나이답지 않게 군주의 위엄이 느껴져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테오도르는 그에 대해 찬사하는 말도 들었지만, 시기하고 음해하는 말도 들었다.
테오도르는 섯불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지만, 연합군을 결성하고 반 같은 인재를 곁에 둔 그가 진심 부러웠다.
“꼭 그 분을 뵙고 싶습니다. 반님께서 이토록 칭찬을 하시니.”
“왕자님, 말씀을 낮추십시오.
제가 크로첸의 아들이긴 하나 저는 일개 서자일 뿐입니다. 왕자님께서 존대할 만한 인물은 더 이상 크로첸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워낙 자유분방하셨던 것을 왕자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반이 농담처럼 웃어 넘겼지만 그 눈빛에는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테오도르도 알고 있었다.
크로첸에서 공식적으로 왕자라 불리는 이는 왕비 소생인 그레고리뿐이었다.
사생활이 문란하기로 소문난 크로첸 국왕은 무려 열 두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대부분이 후궁 소생이거나 출신이 불분명했다.
그래도 왕가의 신분패를 받을 정도면 왕의 신임을 받은 자식일 것이다.
테오도르는 문득 건너 들었던 크로첸의 능력있는 보좌관 얘기를 떠올렸다.
왕가 출신으로 영특하고 셈이 빠른 자라고 들었었다.
테오도르의 생각을 눈치 챈 반이 먼저 선수를 쳤다.
“크로첸에서 왕족을 보좌하는 일을 맡았었습니다.
운영과 왕자들의 교육을 맡았었으니, 테오도르 왕자님께 여러모로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편안하게 대해주십시오.”
테오도르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자가 바로, 반 같이 풍부한 경험과 탁월한 능력이 있는 자였다.
테오도르는 뒤를 힐끗 돌아본 뒤 반에게 말했다.
“그럼 앞으로 반이라고 부르겠네. 같이 따라온 귀공자들은 누구인가?”
“아, 푸른 계열의 옷을 입은 자들은 저와 친밀하게 지냈던 크로첸 왕가에서 일하던 자들입니다. 출신이 분명하고 믿을 수 있는 자들이죠.
특히 중앙의 앳된 남자는 크로첸의 8번째 아들인 루니엘입니다. 어미가 루스베키아 왕족 출신이라 친하게 지내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리고 붉은 계열의 옷을 입은 자들은 루스베키아 왕가에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저들 역시 왕자님께 도움이 될 자들이니 친하게 지내십시오.
단, 그들을 통한 정보들은 모두 루스베키아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만 명심하십시오.”
곱게 날이 선 반의 눈빛에 테오도르는 그의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믿어야 할 자와 경계해야 할 자.
반이 알려준 관계들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반은 테오도르를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왕자님께서 저를 신뢰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왕자님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마음껏 부리시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 제가 온 것이니까요.”
반은 슬며시 테오도르의 아픈 다리를 쳐다봤다.
“우선 그 엉성하게 처치된 상처부터 제대로 치료하는 것이 어떨까요?
출발하며 대마법사께 받은 연고가 있습니다. 그것이 왕자님의 고통을 덜어드릴 것입니다.”
테오도르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척척 해결해주는 반을 어쩐지 믿고 싶어졌다.
반은 어리숙하고 상냥한 왕자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가 오랫동안 가르쳐왔던 크로첸 왕가의 아들들보다 테오도르는 자상하고 예의 발랐다. 반은 무의식중에 테오도르를 평가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기대만큼 성장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이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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