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51 10화) 네가 자꾸 신경 쓰여 “공주님,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실 수 있죠?”카시안은 벨로나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루에나에게 말했다. “… 응. 이만 내릴게.”그의 팔에 실린 힘이 풀리는 것을 느낀 루에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 이리와서 공주님을 모셔가.”카시안은 근처에 있던 병사에게 루에나를 맡기고 곧장 벨로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물에 들어서자마자 벨로나는 금세 후회했다.생각보다 계곡물은 차가웠고 바닥은 미끄러웠다.지금이라도 도움을 받아야 하나.슬쩍 뒤를 돌아본 벨로나는 자신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는 많은 눈들에 자존심이 상했다.흥.네깟 놈들 도움 따위 필요 없어. 처음에는 요령이 없어 몇 번이나 휘청였지만, 걷다 보니 조금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어느새 계곡 한가운데까지 도착한 벨로나는 은근한 자신감까지 .. 2026. 6. 29. 9화) 가까워지는 두 사람 짧은 휴식을 마무리하고, 공주들이 말을 바꿔 탄 뒤 반나절이 흘렀다.늦지 않게 야영을 하려면 노던 숲을 서둘러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울창하게 우거진 숲은 말을 몰기에 썩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여름 내 자란 나무들은 하늘을 가릴 만큼 높게 가지를 뻗고 있었고, 곳곳에 계곡과 바위가 길을 막고 있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나뭇가지까지 쉴 새 없이 얼굴을 스쳐, 칼리스는 달리는 와중에도 가지를 꺾어내야 했다. 칼리스는 아스티나를 힐끔 쳐다봤다. 혹시나 나뭇가지가 그녀의 여린 피부에 상처를 낼까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아스티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 보였다.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아스티나의 체취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며칠째 향유를 쓰지 못했을텐데, 아스티나는 달콤하고 그윽한 향기를 뿜었다. 그녀의 향.. 2026. 6. 29. 8화) 놓치지 마 콰아아앙-!!!여관 전체가 흔들릴 만큼 거대한 충격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아스티나가 잠에서 깼다. 쾅-!!!! 콰앙!!두번째 굉음. “공주!”“엇, 이게 무슨…”아스티나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들렸다. “위험하다! 빨리 나가야 해!”칼리스는 재빠르게 아스티나를 수건에 감싸 안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스티나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엉겁결에 칼리스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볼에 닿은 단단한 근육을 느낀 순간, 아스티나는 크게 당황했다. 칼리스가 상체를 드러내고 하반신은 수건만 두른 상태로 그녀를 안고 있었다. 문 밖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복도를 뒤덮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당황한 것도 잠시, 연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연.. 2026. 6. 29. 7화) 흔들리는 마음 짙은 어둠이 가라앉은 지하 감옥. 메레디아는 신경질적으로 손가락 끝을 움직였다.분명 느꼈다.잠깐이었지만, 멈춰 있던 심장이 따뜻하게 뛰는 것을.그런데 어느 순간 다시 사라졌다. 칼리스를 볼 수만 있다면 알 수 있을 텐데.심장이 왜 반응했는지.정말 반려를 찾은 건지.아니면 자신이 착각한 건지.하지만 황제는 그녀를 이 지하에 가둬 놓은 채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황제를 죽여 버릴까? 황제 따위, 눈 한 번 깜빡이면 죽일 수 있는데. 그 순간. 철그럭.황금 사슬이 살을 파고들었다. “으윽….”황제에 대한 불온한 생각만으로도 반응하는 저주 같은 구속구.메레디아는 비틀거리며 웃었다. 하이데벨 마법사들이 만들었다던가.하여튼 그 영감들은 쓸데없는 걸 잘도 만든단 말이지.목을 문지르던 메레디아는 천천.. 2026. 6. 29. 6화) 협상 덜컹거리는 짐마차에 탄 공주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공포스럽고 치욕스러웠던 지난 밤. 누구 하나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 일찍 칼리스의 종자가 새 옷을 가져다주었지만, 온몸 가득한 핏자국과 불편한 상황들에 몸이 무겁고 아팠다. “미친 놈들. 찢어 죽일 놈들.”벨로나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간신히 정신을 차린 디에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고, 루에나는 여전히 흐느낌을 멈추지 못했다. 언니들을 바라보던 아스티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대로는 안 돼. 다들 제국에 도착할 때까지 못 견딜 거야. 어떻게든 살아야 해. “황제는 그대들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으니”갑자기 어젯밤 칼리스의 말이 떠올랐다. 황제.제국의 지배자. 그리고 그 칼리스조차 함부로 거스를 수 없는 존.. 2026. 6. 29. 5화) 서늘한 경고 유쾌하고 소란스러운 소음들이 모닥불 주위를 늦은 밤까지 맴돌았다.승리를 자축하는 제국군들의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 사이사이로 공주들의 흐느낌이 유령의 속삭임처럼 처연하게 스며들었다. 승자들의 환희와 패자들의 절망이 같은 밤하늘 아래 뒤섞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전공을 자랑했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흐느꼈다. “언제까지 우는 거야? 세상 끝났어?”“하하하! 고귀하신 공주마마들 비위를 맞춰주려면 꽤나 힘들겠어.”병사들은 짖궂은 농담을 던지면서도, 장막 사이로 보이는 공주들의 모습을 계속 힐끔거렸다.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네 명이나 있었다.그것도 평생 전장을 떠돌던 병사들이 감히 가까이할 수도 없었던 아름답고 고귀한 여성들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시종과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 2026. 6. 29. 4화) 전리품 아스티나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왕궁은 더 이상 그녀가 알던 아름다운 궁전이 아니었다.곳곳이 무너져 내린 회랑에는 검게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었고, 붉은 피가 대리석 바닥 위를 길게 물들이고 있었다. 불길은 대부분 진압되었지만, 아직도 곳곳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공주들은 제국군들에게 둘러싸인 채 천천히 왕궁 밖으로 이동하고 있었다.루에나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흐느끼고 있었고, 벨로나는 이를 악문 채 눈물을 참아내고 있었다. 디에나는 텅 빈 눈으로 바닥만 바라봤다. 마치 영혼이 함께 무너져 내린 사람 같았다. 아스티나는 차마 주변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익숙했던 정원은 짓밟혀 있었고, 조금 전까지 웃음이 가득했던 궁전은 시체와 잿더미만 남은 폐허가 되어 있.. 2026. 6. 29. 3화) 붉은 눈의 괴물 에스카리엘은 이미 패배한 전쟁터와 다름없었다.불길은 왕궁을 삼키고 있었고, 살아남은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제국군을 막지 못했다. 화염은 아름답던 궁전을 집어삼키며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병사들의 검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그러나 그런 혼란 속에서도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만큼은 흔들림 없이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제국 정예 병사들은 칼리스를 따라 바삐 움직였다. 칼리스는 마치 방향을 제대로 아는 것처럼 비밀 통로를 단번에 찾아냈다. 역시 용족은 다른 건가.비범한 칼리스의 능력에 매번 감탄하는 카시안이지만, 왕가 비밀 통로를 찾아내는 능력에는 진심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칼리스는 희미한 빛을 쫓았다.그 빛은 보일 듯 말듯 해 그를 더 애 닳게 했다. 게다가 왕궁 입성 .. 2026. 6. 29. 2화) 달빛 아래의 첫 키스 화려한 샹들리에의 빛으로 반짝이는 연회장에는 아름다운 선율과 향기로운 꽃내음으로 가득했다. 밤의 궁전은 낯보다 훨씬 아름답고 화려했다. 에스카리엘의 모든 귀족들이, 에스카리엘과 카르테시온의 화합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 궁전은 그 어느때보다 활기로 가득했다. 귀족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어린 두 연인에게 쏠렸다. 찬란한 금발을 빛내는 두 사람은, 마치 장인의 정교한 손끝에서 탄생한 도자기 인형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앞으로 두 나라의 미래가 두 분의 미모만큼이나 밝아지겠군요.”비슷한 분위기의 덕담이 여러 차례 반복되자 아스티나는 억지 미소를 유지하느라 볼이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귀족들은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했지만, 정작 관심은 혼담보다 서로의 권력과.. 2026. 6. 29. 이전 1 2 3 4 5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