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스티나는 한동안 침상에 누운 남자를 말없이 바라봤다.
카시안이 떠난 뒤에도 칼리스는 몇 차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미간을 희미하게 찌푸리다가, 다시 힘겹게 잠에 빠져들기를 반복했다.
카시안은 이제 괜찮다고 했지만, 아스티나는 좀처럼 안심할 수 없었다.
불과 하루 만에 수척해진 얼굴.
창백하게 식은 입술.
식은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
그 흔적들은 그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견뎌냈는지 증명하고 있었다.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던 아스티나는 결국 의자를 가져와 침상 옆에 앉았다.
그가 눈을 떠야만, 이 불안한 마음도 가라앉을 것 같았다.
잠든 칼리스의 얼굴은 낯설었다.
언제나 사람들을 압도하던 정복자도, 피로 물든 전장을 누비던 괴물도 아니었다.
그저 지쳐 잠든 20대 후반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긴 속눈썹 아래로 드리운 옅은 그림자와 힘없이 늘어진 손끝을 바라보던 아스티나는 문득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만 해도 온몸이 떨릴 만큼 두려웠다.
그 붉은 눈은 악몽 같았고,
그의 손에 묻은 피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째서 지금은 이 남자가 안쓰럽게 느껴지는 걸까.
아스티나는 천천히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신께 기도했다.
부디.
이 남자가 무사히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칼리스는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혀에서 비릿함이 느껴졌다.
짙은 안개에 뒤덮여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황무지.
얼마나 달렸는지 발은 부르트고 갈라져 한 걸음 떼기도 힘겨웠다.
하지만, 그는 무조건 앞을 향해 달려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쿵-!
귀가 먹먹해질 만큼 큰 소리가 들리더니 천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 다시 쿵.
놀란 칼리스가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몸이 공중에 솟구쳐올랐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쥐고 좌우로 마구 흔들어 댔다.
칼리스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머리가 어지럽고 온 몸이 쑤셔왔다.
안간힘을 쓰고 빠져나가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 강한 악력이 그를 짓눌렀다.
콰득-!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장도 손상되었는지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칼리스는 견딜 수 없는 아픔에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는 밖으로 퍼지지 않았다.
거대한 그림자는 그런 칼리스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기괴하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칼리스는 거대한 그림자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고 느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던 얼굴.
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얼굴.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증오가 심장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그림자는 힘을 주어 칼리스의 사지를 찢기 시작했다.
칼리스는 욕지거리를 뱉으며 비명을 질러 댔지만, 그림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상이 뒤죽박죽 흔들리기 시작했다.
칼리스가 흘린 피로 땅이 흥건하게 젖어 강을 이루고,
그의 살점들로 산을 이루었지만 그림자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가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영원히 사냥할 생각인 것처럼.
칼리스의 사지는 갈기갈기 찢겨 흩어졌다.
이제 모두 끝인가?
공허한 붉은 눈동자가 검게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의식마저 가라앉으려던 순간.
희미한 빛 하나가 어둠 속에서 피어났다.
작고 연약한 빛.
그럼에도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칼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 빛을 눈으로 쫓았다.
빛은 서서히 주변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빛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손을 감싸듯 머물렀다.
따뜻했다. 너무 따뜻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금세 사라질 환영이라고 생각했지만 온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얼어붙은 심장 깊숙한 곳까지 천천히 스며들었다.
이질적인 온기에 칼리스는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거대한 그림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끝없는 절망과 공포가 이어지던 세상이 따뜻한 온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칼리스는 무의식적으로 그 온기를 붙잡았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놓칠 수 없었다.
오래 전부터 간절히 찾고 있었던 달콤한 안식 같았다.
칼리스는 힘겹게 눈을 떴다.
제대로 눈을 뜨기 어려워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점점 익숙해진 시야로 어두운 막사 천장이 보였다.
아, 지독한 꿈을 꿨구나.
바짝 마른 목구멍으로 간신히 침을 삼켰다.
물먹은 솜처럼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시야가 다시 흐려지는 것 같아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자신이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리스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불빛에 비친 머리카락이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물빛을 머금은 푸른 눈동자가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손을 꽉 쥐었다.
꿈속에서 자신을 붙잡아준 온기가 아직도 손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픈건지.
사랑하는 그녀 때문인지.
이제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칼리스는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아스티나.”
아스티나는 칼리스가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을 금방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악몽을 꾸는지 한동안 앓는 소리를 내며 힘들어 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손을 잡아 주었더니, 숨소리가 점점 안정되었다.
아스티나는 칼리스가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할 때야 정신을 차렸다.
반가움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잘잤어?”
“응, 덕분에.”
“내가 한 건 없어. 난 그냥 앉아 있었는 걸.”
“옆에 있어 줬잖아. 그리고, 이렇게 손도 잡아 주고.”
칼리스는 맞잡은 손을 들어 보였다.
아스티나는 그제서야 그와 한참 동안 손을 잡고 있었음을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얼른 손을 빼내려 하자, 칼리스가 더 힘껏 손을 잡았다.
아스티나는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칼리스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띈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애정 어린 눈빛과 미소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 의무병을 부를까? 아니면 카시안?”
“아니, 아무도 부르지 말고, 아무데도 가지 마.”
칼리스는 아스티나의 손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아스티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끝내 저항하지 못했다.
그의 손을 뿌리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칼리스의 시선이 집요할 만큼 아스티나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장미 덩굴처럼 뻗어와 자신을 휘감는 것만 같아, 아스티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칼리스는 아스티나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걱정했나?”
“…응. 많이.”
칼리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아스티나는 그의 뜨거운 시선에 녹아내릴 것 같았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쓰다듬던 칼리스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여 아스티나의 동그란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미끄러지듯 그녀의 작은 코를 간지럽혔다.
아스티나는 간지러워 살짝 몸을 움츠렸다.
칼리스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아스티나는 마음이 간질거려 손을 꼼지락거렸다.
칼리스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아스티나의 붉은 입술을 매만졌다.
그의 손끝이 스칠 때마다 열기가 번져 아스티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
긴장한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얕은 숨을 흘렸다.
칼리스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다.
아스티나는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온 칼리스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스티나.”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다정했다.
아스티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칼리스는 아스티나의 모든 행동과 모습이 사랑스러워 참기 힘들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꺼풀과 볼에 키스했다.
그리고 입술을 살짝 떼어 눈을 맞추었다.
열망이 가득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의 뜨거운 숨결이 뒤섞였다.
그 순간.
칼리스가 아스티나의 장미 꽃잎 같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짧고 가벼운 입맞춤.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칼리스는 그녀의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붉게 물든 얼굴을 눈에 새기듯 천천히 바라봤다.
한동안 그가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아스티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가득 담겨 빛나고 있었다.
가슴이 아플 만큼 시리고 충만해지는 눈빛이었다.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살며시 움켜쥐어 끌어당겼다.
그리고, 고운 입술을 포개어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놀란 칼리스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그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아스티나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헤집고는, 강렬한 욕망 속으로 그녀를 밀어붙였다.
이번에는 아스티나 역시 피하지 않았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서툴지만 조심스럽게 그의 마음에 응했다.
서로의 숨결이 얽히고, 입술이 몇 번이고 맞닿았다 떨어졌다.
“살짝 벌려봐.”
칼리스의 달콤한 주문에 아스티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살짝 벌렸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뜨거운 혀를 밀어 넣어 그녀의 부드러운 점막을 헤집었다.
칼리스는 자신의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거침없이 그녀의 타액을 빨아들였다.
아스티나는 처음 느껴보는 생소하고 원초적인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끈적한 소리가 더해져 막사 내부에 외설적인 열기로 가득했다.
칼리스는 뜨거운 키스를 퍼부으며 아스티나를 침대에 밀어붙였다.
숨이 막힐 만큼 뜨거운 감각에 아스티나는 그저 그에게 휩쓸릴 뿐이었다.
자신의 아래에서 흐트러져 있는 그녀를 보니, 칼리스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욕망 속에 그녀를 서서히 침몰시켰다.
멈춰야 한다는 건 알았다.
그런데 멈출 수 없었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간절히 원하고, 그녀도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안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는 것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칼리스는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아스티나는 위험할 만큼 나른한 그 미소에 숨이 막혔다.
“아스티나. 나의 아스티나.”
칼리스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안달이 난 아스티나는 그에게 더욱 매달렸다.
칼리스는 천천히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그녀의 채취를 빨아들였다.
달콤하고 나른한 향기에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쏟아졌다.
그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얼굴부터 목을 지나 가슴에 머물렀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드레스의 가슴 끈을 천천히 풀었다.
아스티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음은 달아나고 싶은데 몸이 자꾸만 그에게 밀착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스르륵.
장막 틈 사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처절하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의 분노가 장막을 휘감을 정도였지만, 사랑에 들뜬 칼리스와 아스티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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