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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15화) 폭풍 전야

by 매냐씨 2026. 6. 29.

 

한나절 내내 이어진 폭우에 결국 칼리스 부대는 발을 멈췄다. 루에나가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공주들의 처소에서 빗줄기를 바라보던 아스티나는 어딘가 달라진 부대의 분위기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병사들의 얼굴은 눈에 띄게 침울했고, 야영지 전체에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특히 오후부터는 칼리스의 처소 주변으로 병사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칼리스의 벗은 몸을 마주친 이후, 그와 제대로 얘기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늘은 하루 종일 보지도 못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아스티나는 불안한 마음에 손톱을 잘근 씹으며 칼리스의 처소만 바라봤다.

 

그때였다.

의무병 하나가 피로 젖은 옷가지를 안고 칼리스의 처소를 나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아스티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다급히 의무병을 붙잡은 아스티나가 물었다.

이 피는 뭐야? 누가 다친 거야?”

놀란 의무병이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자 아스티나는 그를 닥달했다.

누가 다친 건지 묻잖아!”

그게…”

의무병은 얼버무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칼리스가 다쳤나?”

의무병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 짧은 반응만으로도 아스티나는 알 수 있었다.

 

그때, 막이 걷히면서 카시안이 나왔다.

왜 이렇게 시끄럽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의무병을 쳐다보던 카시안은 비에 젖은 아스티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공주님께선 여기서 뭐하시는 거죠?”

칼리스가 다쳤나?”

카시안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아스티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왜 허겁지겁 빗 속을 달렸는지.

왜 그의 처소 앞에서 허둥거리고 있는 건지.

단지, 그녀의 머릿 속에는 온통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스티나가 아무 말없이 서 있기만 하자, 카시안은 막을 걷힌 손을 내리려고 했다.

그를 만나게 해줘!”

아스티나는 카시안의 팔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시안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아스티나의 푸른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주군이 관심을 두고 있는 여인이니 괜찮으려나.

한참을 고민하던 카시안이 천천히 말했다.

들어오세요, 공주님.”

카시안은 아스티나가 들어올 만큼 막을 걷으며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촛불이 일렁이는 막사 안은 그날과는 달리 정신이 없었다.

널부러진 옷가지와 쓰러져 있는 의자.

짙은 수면초의 냄새.

침대 주위에는 미처 닦아 내지 못한 핏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그 흔적들은 얼마 전까지 이곳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침상 위에 칼리스가 누워 있었다.

언제나 사람들을 압도하던 남자가 맞나 싶을 만큼 낯설고 고요한 모습이었다.

거칠게 몰아쉬던 숨은 겨우 잦아들었지만, 창백한 얼굴에는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술과 식은땀에 젖은 이마는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텨냈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가슴 한구석이 먹먹하게 조여 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스티나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지금은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카시안은 미간에 주름을 살짝 지었다.

"아주 가끔 있는 일인데, 심장의 고통으로 한참을 앓으십니다."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카시안이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 병에 걸리신 것은 아닙니다.”

 

곧이어 그는 분노로 눈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 전부 빌어먹을 황제 때문입니다."

카시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주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군요."

피를 토한 적은 처음이라 저희도 당황하긴 했지만지금은 괜찮아지셨습니다.

의무병 말이 한숨 주무시면 나을 거라고 하더군요.”

 

아스티나는 카시안을 향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칼리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고통을 견디느라 지친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그렇게 대단하던 남자가 지금은 한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카시안, 내가 그의 곁에 있을게.”

아스티나는 조심스럽게 카시안에게 말했다.

카시안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루에나를 수습한 뒤부터 한 번도 쉬질 못했더니 머리가 멍하고 손발이 떨려 왔다.

 

그래도 주군과 아스티나만 두고 가는 것이 맞을까?

주군이 정신을 차리면, 자신을 호되게 야단칠 것이다.

그래도.

자신이 주군이라면 눈을 떴을 때, 은애하는 이를 보고 싶을 것 같았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카시안은 대충 주변을 정리한 뒤 막사를 떠났다.

 

 

**************************

몇 날 며칠을 쉴 새 없이 달린 테오도르 일행은, 늦은 저녁 아스델 인근 숲에서 칼리스 부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테오도르 일행은 근처에 몰래 숨어 그들을 염탐했다.

평소의 칼리스 부대 답지 않게 부산스러워 엿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때마침 비까지 내려 주의를 분산시킨 탓도 컸다.

이전에 그들을 마주친 적 있는 로웬은 하늘이 준 기회인 것만 같았다.

 

정복자는 보이지 않고병사들이 어딘지 산만해 보이는데?”

테오도르가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로브 틈으로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전하, 그들은 수많은 전쟁으로 실전 경험을 쌓은 우수한 전사들입니다. 칼리스가 보이지 않는다고, 절대 우습게 봐선 안 됩니다.”

테오도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병사들을 배치하고 있던 로웬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로웬경, 배치는 끝난 것인가?”

로웬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직 배치를 완료하지 못했지만, 경험이 없는 테오도르가 경솔하게 움직일 것을 염려해 일부러 왕자를 감시하러 온 것이었다.

테오도르는 로웬의 심경을 눈치채고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자신을 여전히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로만 대하는 로웬이 답답하고 불편했다.

전 걱정마시고 하던 일에만 집중하세요.”

테오도르는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왕자의 차가운 태도에 머뭇거리던 로웬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왕자님, 절대 성급하게 나서서는 안 됩니다.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급습해야 승산이 있습니다.”

더 어두워질 때를 노려야 합니다. 기다리십시오.”

로웬은 한 마디씩 힘주어 말을 뱉었다.

알겠다, 경을 전적으로 따르겠다.”

테오도르는 화를 억누르며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로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이면 왕자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럼 왕자님께서는 여기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으십시오. 저는 배치를 마무리하고 오겠습니다.”

너는 여기서 왕자님을 지키거라.”

.”

로웬은 왕자에게 가벼운 목례를 했지만, 테오도르는 앞만 쳐다볼 뿐이었다.

 

로웬의 마음은 착잡했다.

자신이 이 철없는 왕자를 지킬 수 있을까?

왕자의 바램을 진정으로 이뤄줄 수 있을까?

과연 칼리스를 이길 수 있을까?

복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로웬은 비에 젖어 흔들리는 숲 속으로 사라졌다.

 

로웬이 사라지고 얼마 후, 테오도르는 커다란 막사 앞으로 달려가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금빛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가는 가녀린 뒷모습을 보고 테오도르는 단번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테오도르는 아스티나의 이름을 부르려다 급하게 입을 막았다. 혹시 병사에게 들켰을까 싶어 흘깃 쳐다보니 병사는 비에 젖은 로브를 정리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아스티나는 막사 앞에서 한 병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로브를 타고 내리는 빗줄기에 그녀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지 않아 급하게 빗방울을 털어냈다.

곧이어 막사의 장막이 걷히더니 한 사내가 나왔고 잠시 뒤 아스티나가 막사 안으로 사라졌다.

아스티나, 거기서 뭘 하는 거야?!

그 놈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테오도르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나쁜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스티나가 어떤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르는데,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때, 장막이 걷히면서 사내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럼 저 장막에는 아스티나 혼자 있는 건가?

테오도르는 갑자기 용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감시하는 병사만 따돌릴 수 있다면, 아스티나를 몰래 빼내오는 것쯤은 쉬워 보였다.

테오도르는 로브를 고쳐 쓰는 척하며, 병사를 주시했다.

그의 이성은 이미 빗물에 쓸려 내려가 버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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