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스티나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왕궁은 더 이상 그녀가 알던 아름다운 궁전이 아니었다.
곳곳이 무너져 내린 회랑에는 검게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었고, 붉은 피가 대리석 바닥 위를 길게 물들이고 있었다. 불길은 대부분 진압되었지만, 아직도 곳곳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공주들은 제국군들에게 둘러싸인 채 천천히 왕궁 밖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루에나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흐느끼고 있었고, 벨로나는 이를 악문 채 눈물을 참아내고 있었다. 디에나는 텅 빈 눈으로 바닥만 바라봤다. 마치 영혼이 함께 무너져 내린 사람 같았다.
아스티나는 차마 주변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익숙했던 정원은 짓밟혀 있었고, 조금 전까지 웃음이 가득했던 궁전은 시체와 잿더미만 남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억누르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에스카리엘은 끝났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도, 이제는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제국군들은 공주들을 짐마차에 던져 넣다시피 했다.
그 바람에 루에나는 바닥에 부딪히며 쓰러졌고, 아스티나는 잠옷이 찢어져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아스티나는 끔찍한 모멸감에 죽어 버리고 싶었다.
제국군들은 그런 공주들을 보며 비웃으며 조롱하기 바빴다.
"크흐흐. 고귀하신 공주님들께서 짐마차는 처음 타 보시겠군."
"공주는 무슨. 이제는 황제 폐하의 전리품이지."
"조심해라. 상품에 흠집 나면 골치 아파진다."
공주들의 나라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병사들의 웃음 소리에 묻혀갔다.
병사들이 공주들을 짐마차에 밀어 넣고 있을 때였다.
칼리스의 시야 끝에 또 다시 희미한 빛이 스쳤다. 빛은 아스티나 주변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칼리스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또 저 빛인가?
칼리스는 짧게 미간을 구겼다.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이 스쳤지만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공주들을 제국으로 데려가는 것.
그 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 칼리스는 서둘러 철수 명령을 내리고 말에 올라탔다.
불타는 망국을 뒤로한 채, 제국군은 승전의 깃발 아래 길을 재촉했다.
**************************
태풍을 만난 파도와 같은 거친 흔들림에 테오도르는 간신히 눈을 떴다.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습격 소식을 듣고 공주님을 살피러 방을 나서던 중이었는데.
순간, 깨질 듯이 아파오는 두통에 테오도르는 머리를 움켜 쥐었다.
“으윽!”
“전하, 깨셨습니까?”
카르테시온 대사와 기사단장 로웬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테오도르를 붙잡았다.
“로웬경, 여기가 어디지? 난 분명 에스카리엘에 있었는데…”
“곧 레바니엘 숲으로 들어갈 예정이니 단단히 붙잡으십시오.”
“레바니엘? 벌써 국경 근처까지 왔다는 말이냐!! 공주님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전하, 냉정 해지셔야 합니다. 전하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로웬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테오도르는 머리 끝까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비겁하고 한심하다.
사랑하는 여자가 위험에 처했는데 저 혼자 살자고 도망치다니.
테오도르는 부끄럽고 비참한 기분에 짓눌려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달리는 마차의 문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로웬이 다급하게 왕자를 마차 끝으로 밀어붙였다.
“놔라! 이거 놔!! 난 가야 해! 가야만 한다고!”
로웬과 대사는 테오도르를 강하게 저지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어떻게든 저 문을 열고 공주에게 가야만 했다. 오직 그 생각만이 그를 지배했다.
순진하고 상냥하기만 했던 왕자의 불같이 완강한 태도에 로웬은 입술을 깨물었다.
짝—!
마차 안이 조용해졌다.
테오도르도 대사도 놀란 눈으로 로웬을 쳐다봤다.
감히 누가 테오도르에게 손지검을 할까? 평생 사랑만 받고 자란 어린 왕자는 충격에 얼어 버렸다.
떨리는 손을 거둔 로웬경은 테오도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불경한 짓을 저지른 저를 당장 죽이셔도 좋습니다. 제발…. 제발…. 카르테시온을 생각하십시오. 전하는 카르테시온의 미래입니다. 우리는…. 칼리스 부대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자신보다 한참 나이 든 사내의 애원하는 모습에, 테오도르는 끓어오르는 분노가 순식간에 식는 것을 느꼈다.
긴장이 풀린 테오도르는 마차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어 버렸다.
나도 알고 있다고… 그 무서운 미친 개에게 상대가 안된다는 걸…
분노와 좌절감에 침몰된 테오도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고 또 흐느꼈다.
흔들리는 마차를 따라 그의 마음도 대책없이 흔들렸다.
**************************
밤의 숲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제국 병사들은 승리를 자축하며 술잔을 부딪쳤다. 웃음소리와 떠들썩한 농담이 끊이지 않았고, 전리품을 얻은 사냥꾼들처럼 모두 들뜬 표정이었다.
급하게 일을 진행하느라 몇 일밤을 에스카리엘로 내달린 그들을 생각하면, 칼리스는 오늘 하루쯤은 그들의 일탈을 눈감아 주기로 했다.
흥분과 열기로 가득한 소음을 뒤로 하고, 어두운 막사에 홀로 앉은 칼리스는 황제에게 보낼 메모를 작성했다.
공주들은 안전하게 확보했습니다.
일정에 차질이 없다면 5일 뒤 도착합니다.
그리고…. 빛 이야기는 어떻게 하지?
칼리스는 한참 고민에 빠졌다. 빛을 본 것은 자신뿐이고, 빛이 이끌어 준 공주는 아스티나 뿐이다.
그럼 그녀가 신탁의 주인공인가?
“에스카리엘의 귀한 여인이 영원한 삶을 약속하리라.”
칼리스는 일렁거리는 촛불 너머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 미친 황제가 정말 영생하게 된다면…
칼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영생.
그 단어만 떠올려도 숨이 막혔다.
황제의 개로 사는 것을 즐긴 적은 없다. 살인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의 목줄을 쥐고 흔들기에 따를 뿐. 언제부턴가 깊이 생각하는 법을 멈춘 것 같다.
그런데 황제가 영생한다면. 자신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까?
바보같이 용의 심장을 뺏겼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과연 내가 돌아간다고 제대로 지킬 수 있을까?
용의 심장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아니, 애초에 난 어디서 태어난 거지?
칼리스는 황제에게 목숨을 저당 잡혔던 이전 기억이 없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모른다. 가끔 꿈 속에서 이전 기억들과 마주할 때가 있지만, 갈기 갈기 파편된 꿈들은 그에게 제대로 된 기억을 선물하지 못했다.
단지, 대마녀 메데이아와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이고, 용의 심장이 자신의 진짜 심장이라는 사실. 그것만이 그가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이었다.
하이데벨의 잊혀진 마법사인, 로드리스라면 진실을 알지 않을까?
황제가 쫓고 있는데, 그를 만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라면 많은 의문을 풀어줄 것이다.
그는 칼리스가 아는 마법사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칼리스는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이게 다 그 망할 놈의 빛 때문이다.
아련한 그 빛.
그는 살아오면서 오늘 처음으로 그것을 보았다. 보일 듯 말 듯한 그 빛은 분명 아스티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왕궁 안에서도. 비밀 통로에서도.
그리고 짐마차에 실려 갈 때도.
그 빛은 계속해서 그의 시야를 스쳤다.
마치 무언가를 알려 주려는 것처럼.
칼리스는 무심코 미간을 좁혔다.
설마 신탁의 주인을 가리키는 건가?
문득 아스티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파랗게 질린 하얀 얼굴.
공포에 잠긴 푸른 눈동자.
눈가에 자리한 작은 점.
그리고 제 손에 붙잡혀 떨던 가녀린 몸.
그 순간 칼리스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이상했다. 왜 하필 그 여자만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까?
여자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여자들 얼굴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여자만은 이상하게 자꾸 기억에 맴돌았다.
피에 젖은 손끝에 닿았던 부드러운 피부.
겁에 질려 떨던 숨결.
하얗게 드러난 목선과 가느다란 팔다리.
순간 묵직한 열기가 아랫배를 스쳤다.
자신의 뜻밖의 반응에 놀란 칼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 미쳤군. 고작 어린 여자 하나 때문에.
그는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신탁의 주인인지 아닌지 아직 확실히 모른다. 괜한 생각이다.
헛 웃음을 짓던 칼리스는 아직 확실치 않은 것은 적지 않기로 했다.
서둘러 메모를 밀봉한 칼리스는 카시안을 불렀다.
“카시안, 황제에게 보내.”
“네, 주군.”
메모를 건네던 칼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푸른 눈동자가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공주들은 지금 뭘 하고 있지?”
칼리스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어둠 속 공주들의 막사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빛을 쫓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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