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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2화) 왕국의 멸망

by 매냐씨 2026. 6. 29.

 

아스티나는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연회의 잔향이 여전히 방 안의 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그녀는 무심코 손등을 매만지며 정원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아직 사랑이라 부르기엔 이르다.
하지만 다정한 사람이란 건 알 수 있었다. 몇 번 더 만나게 된다면, 정말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몽글거려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앙—!! 쿠쿵!

엄청난 굉음과 함께 왕궁 전체가 거센 파도에 휩쓸린 배처럼 크게 흔들렸다.
왕궁 곳곳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처절하게 울려 퍼졌고 창밖에는 붉은 화염이 용의 혀처럼 길게 치솟아 하늘을 핥고 있었다.

 

습격입니다! 지금 당장 대피하셔야 합니다!!”

“…!”

황급히 들어온 시녀의 외마디 비명에 아스티나는 아연해졌다.

 

습격이라니. 누가!!’

아스티나, 당장 이리로 와!!”

얼굴이 파랗게 질린 벨로나가 급히 가운만 걸친 채 아스티나를 데리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언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습격이라니?!!”

그 괴물이 쳐들어왔어! 빨리 도망쳐야 해.”

그 괴물이라니?!!”

황제의 사냥개가 우리를 죽이러 왔다고!!”

 

밤하늘을 뒤덮은 검은 연기와 붉은 화염을 보는 순간, 아스티나는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 아름답기만 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아스티나, 어서 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디에나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이끌었다. 네 자매는 서로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꽉 붙잡은 채 무너지는 회랑을 따라 정신없이 달렸다.

 

공주님, 이쪽입니다.”

기사단장인 에드윈과 정예병들이 회랑 입구에서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드윈, 아바마마는?”

디에나의 간절한 물음에 에드윈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공주들은 그의 표정만으로 왕국의 패배를 직감했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에드윈이 디에나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슬퍼할 틈이 없습니다. 어서 비밀 통로로 대피하셔야 합니다.”

그는 애써 슬픔을 삼키며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어 하신 것은 공주님들의 안전입니다.”

그의 말에 공주들은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병사들을 따라갔다.

 

사방에서는 비명과 폭음이 끊이지 않았고, 아름답던 왕궁은 화염에 잠식되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화염에 물든 복도를 달릴 때마다 익숙했던 왕궁의 모습이 낯설게 일그러져 아스티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였다.

무심코 창밖을 내려다본 아스티나는 순간 숨이 멎었다.

붉게 타오르는 화염 너머, 검은 갑옷을 입은 거대한 남자가 서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걸어 나온 악마처럼 그의 붉은 눈동자가 불길 사이로 번뜩였다.

 

아스티나는 이유도 모른 채 숨을 삼켰다.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심장을 움켜쥐었다.
본능이 먼저 알아차렸다. 저 남자가 에스카리엘을 멸망시킨 괴물이라는 것을.

저 붉은 눈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그녀 앞에 놓인 것은 죽음뿐일 것이다.

 

 

**************************

에스카리엘은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붉은 눈의 사내는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폐허가 된 왕궁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의 뒤로 십자 상처가 있는 남자가 다가왔다.

주군, 에스카리엘 국왕을 찾았습니다. 중앙에 있는 궁전 내 편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잠시 머뭇거리자 사내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이미 목숨을 끊은 상태입니다.”

 

남자의 말에 사내는 피식 웃었다.

카시안난 도무지 높으신 분들이 이해가 안 되. 왜 끝까지 저항하려 하지 않지? 자존심이 목숨보다 중요한가.”

사내의 말에 카시안도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양반들은 그런 족속들이니까요. 그나저나 너무 허무한걸요. 약소국이지만 그래도 왕궁인데 이렇게 방비가 허술하다니…”

 

그의 이름은 칼리스 다스 발레리온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황제의 사냥개라 불렀다. 압도적인 검술과 냉혹함 때문에 주변국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몸을 떨었다.

 

칼리스는 천천히 왕궁을 둘러보았다.

서른 명 남짓한 자신의 부대에 처참히 휩쓸린 왕궁의 모습이 우스웠다. 불에 탄 연회의 흔적들을 쳐다보며 그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저 돈으로 군대나 키울 것이지…”

 

그때, 멀리서 빌헬름이 오는 것이 보였다. 잔뜩 겁에 질린 귀족 한 명이 그의 손에 끌려오고 있었다.

주군, 이 자가 에스카리엘 재상이라고 합니다. 도망치려던 것을 잡았습니다.”

빌헬름이 재상을 칼리스 앞에 던지듯이 밀치는 바람에, 재상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는 두려움보다 치욕이 앞서 얼굴이 붉어졌다.

 

공주들은 어디에 있지?”

칼리스의 낮은 목소리에 재상은 그제야 자신이 누구 앞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남자, 황제의 사냥개가 눈앞에 있었다. 그의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재상은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나는 모르오…”

 

칼리스가 허리를 숙여 재상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가 재상의 어깨를 움켜쥐는 순간 둔탁한 소리가 났다. 재상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으악!”

재상은 극심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에 카시안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이분이 엄살이 심하시네. 아픈 척하셔도 곱게 보내 드리긴 힘듭니다.”

 

칼리스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이며 어깨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공주들은 어디에 있지?”

으윽아마도 비밀 통로로 탈탈출하셨을 것이오.”

비밀 통로가 어딘데?”

어깨의 통증을 견딜 수 없었던 재상은 흐느끼며 말했다.

흐흐흑…. 그건 진짜 모르오!! 왕족만 아는 통로라
제발 살려주시오. 내가 대신 보물 창고가 어딘지 말해주겠소! 거기엔 에스카리엘에 대대로 내려오는 진귀한 보물들과!!”

칼리스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이 새끼는 알아서 처리해.”

미간을 찌푸린 칼리스에게 카시안이 다가왔다.

정말 모르는 것 같은데요. 이제 비밀 통로를 어떻게 찾아내죠?”

잠시 생각에 잠긴 칼리스가 카시안에게 말했다.

우선 공주들의 방으로 가자. 거기서 실마리를 찾아야겠다.”

두 사람은 병사들을 이끌고 공주들의 방이 있는 서쪽 궁전으로 향했다.

 

 

**************************

공주들의 방에는 다급히 떠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칼리스는 첫째 디에나의 방부터 차례대로 꼼꼼히 살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마음이 조금씩 다급해졌다.

주군, 이곳에는 비밀 통로라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슬슬 수색이 귀찮아진 카시안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황제는 왜 이렇게 거추장스럽게 일을 시킨답니까. 그냥 공주 한 명 보내라고 하면 어련히 알아서 보냈을 텐데.”

카시안의 말에 칼리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에스카리엘의 귀한 여인이 영생을 가져다준다는 신탁을 받았는데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지. 그래서 나를 부려먹는 것이 아니냐.”

주군! 제발 심장 좀 다시 찾아오십시오. 언제까지 황제 뒤치다꺼리나 해야 합니까?
걸핏하면 심장 가지고 협박이나 하고…”

카시안의 투정에 칼리스가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카시안이 눈을 흘겼지만 칼리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네가 답답할까 내가 답답할까? 짜증 나는 소리 그만하고 계속 찾아봐!”

카시안은 입을 삐죽거리며 방을 나갔다.

 

칼리스는 마지막으로 아스티나의 방에 들어갔다.

그는 아스티나의 방 가득 퍼져 있는 희미한 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빛을 바라볼수록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칼리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주군,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지요.”

카시안이 그를 불렀지만 칼리스는 반응이 없었다.

주군?”

 

…”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칼리스가 카시안을 쳐다봤다.

카시안, 뭔가 보이나?”

카시안이 아스티나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뭔가 보여야 합니까? 그냥 공주님 방 아닌가요.”

카시안의 말에 칼리스가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카시안의 의아해하는 시선을 뒤로 하고 칼리스는 복도로 희미하게 이어지는 빛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는 말없이 그 흔적을 따라 방을 나섰다.

빛은 이어질 듯 말 듯하며 희미하게 그에게 손짓했다. 그것은 마치 그에게 목적지를 알려주는 이정표 같았다.

주군! 왜 그러십니까?”

 

따라와.”

칼리스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혹시나 빛을 놓칠까 그의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바라던 것이 그곳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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