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6화) 협상

by 매냐씨 2026. 6. 29.

 

덜컹거리는 짐마차에 탄 공주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공포스럽고 치욕스러웠던 지난 밤.

누구 하나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 일찍 칼리스의 종자가 새 옷을 가져다주었지만, 온몸 가득한 핏자국과 불편한 상황들에 몸이 무겁고 아팠다.

 

미친 놈들. 찢어 죽일 놈들.”

벨로나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디에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고, 루에나는 여전히 흐느낌을 멈추지 못했다. 언니들을 바라보던 아스티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대로는 안 돼.

다들 제국에 도착할 때까지 못 견딜 거야.

어떻게든 살아야 해.

 

황제는 그대들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으니

갑자기 어젯밤 칼리스의 말이 떠올랐다.

 

황제.

제국의 지배자.

그리고 그 칼리스조차 함부로 거스를 수 없는 존재.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자신들은 아직 죽을 운명은 아니다.

어젯밤 병사의 손목을 잘라 버린 것도, 새 옷을 준비하게 한 것도.

모두 같은 이유일 것이다.

칼리스는 자신들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황제의 물건을 지킨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스티나는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이용할 생각이었다. 다시는 지난 밤의 수모를 겪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결심한 얼굴로 장막을 걷었다.

이름이 뭐지?”

짐마차를 몰던 카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카시안입니다, 공주님.”

카시안, 지금 당장 네 주군께 나를 안내해라.”

?”

카시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포로가 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어린 공주가 당당하게 명령하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대는 내가 두 번 말해야 알아들을 정도로 멍청한가?”

카시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냥 죽여버릴까?

 

그러나 아스티나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젯밤 공포에 떨던 소녀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평생을 왕가의 핏줄로 살아온 당당하게 반짝이는 공주였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카시안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 주군이 이 맹랑한 아가씨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상상하니 묘하게 즐거워졌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그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

아스티나의 면담 요청에, 칼리스는 그녀를 데리고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숲가로 향했다.

마침 말들도 쉬어야 할 시간이었다. 말을 쓰다듬던 칼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죠.”

 

아스티나는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을 꼭 쥐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남자를 이용해야 했다.

마차를 구해줘.”

칼리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짐마차는 너무 불편해. 언니들도 상태가 좋지 않아. 제대로 쉴 수 있는 마차가 필요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을 쓰다듬던 칼리스는 조용히 그녀를 쳐다봤다. 햇빛을 받은 붉은 눈동자는 어젯밤보다 훨씬 선명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예상 외로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씻고 싶어.”

“......”

몸이 너무 불편해.”

칼리스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포로가 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공주가 마치 시종에게 심부름을 시키듯 요구하고 있었다.

 

오늘 밤은 근처 마을 여관에서 묵을 예정입니다.”

다행이군.”

아스티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으로는 수프를 준비해 줘. 아직 제대로 된 식사는 어려워….”

순간 칼리스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아스티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삼켰다. 칼리스는 살짝 미간을 좁힌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공주님은 원래 말을 짧게 하십니까?”

아스티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아스티나는 몸이 떨려 왔지만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는 짐짓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중요한가?”

칼리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중요할 수도 있지.”

 

난 에스카리엘의 공주야.”

아스티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포로가 되었다고 그 사실까지 바뀌는 건 아니잖아.”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럼 그대도 말을 놓는 걸 허락하지.”

아스티나는 칼리스의 눈치를 살피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칼리스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결국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뻔뻔한 공주의 태도에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호탕한 웃음에 긴장이 흐르던 공기가 순식간에 파편처럼 흩어졌다.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 남자구나.

무섭게만 보였던 남자의 다른 모습에 아스티나는 긴장이 풀렸다.

 

아서!”

, 주군!”

칼리스의 종자, 아서가 바람처럼 나타났다.

오늘 저녁은 여관에서 묵는다.”

.”

공주들이 탈 만한 마차도 준비해.”

알겠습니다.”

아서가 돌아서려 하자 칼리스가 다시 불렀다.

그리고.”

?”

칼리스의 시선이 아스티나를 스쳤다.

수프도 준비하라고 해.”

, 주군.”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흘렸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허리에 손을 올린 칼리스가 아스티나에게 몸을 기울였다.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제 만족하나?”

그래. 마음에 들어.”

 

칼리스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를 훑었다.

또다.

아스티나는 작게 숨을 삼켰다.

왜 자꾸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마치 자신을 조용히 해부하듯 살피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할 때면 어쩐지 불편했다.

벌거벗겨진 기분.

숨기고 싶은 생각까지 들켜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참 동안 그녀를 살피던 칼리스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공주는 욕심이 많군.”

황제가 우리를 원하고 있잖아.”

아스티나는 지지 않겠다는 듯 턱을 치켜 들었다.

이 정도 요구는 할 수 있지 않아?”

글쎄.”

칼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공주는 자신이 포로라는 사실을 잊은 모양인데.”

그의 붉은 눈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목숨만 붙어 있으면 돼. 이런 성가신 일들을 할 필요는 없지.”

 

순간 아스티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이 맞았다.

지금까지의 배려가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외면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칼리스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조금 전까지 기세 좋게 덤비더니 금세 풀이 죽은 얼굴이라니.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하는 게 있으면 대가를 지불해.”

대가?”

앞으로 내 시중을 들어.”

아스티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지난 밤 자신을 바라보던 욕망에 젖은 눈동자들을 떠올렸다. 순간 오한이 들어 몸을 떨었다.

“…. 너도 그 더러운 걸 원하는 거야?”

 

칼리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는 욕망도, 조롱도 없었다. 오히려 황당하다는 기색에 가까웠다.

상상력이 대단하군. 아니면 자신감이 지나친 건가?”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공주는 그 오만함을 고칠 필요가 있어. 내 시중을 들면서 본인의 처지를 곱씹어 보도록 해.”

싫어!”

아스티나가 즉시 쏘아붙였다.

어디 감히 네까짓 게......!”

순간 칼리스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아스티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의 너그럽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언니들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칼리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명하게 판단하리라 믿어, 공주.”

짧은 침묵.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아스티나였다.

 

칼리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말에게 다가간 그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시안.”

, 주군.”

공주님을 모셔다 드려라.”

. 공주님 이만 가시죠.”

 

카시안이 다가오자 아스티나는 마지막으로 칼리스의 등을 바라봤다.

냉정하고 오만한 남자.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밤은 조금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테오도르는 시종들의 말림에도 아랑곳 않고 회의실 문을 열었다.

회의장 내부에는 왕과 귀족들이 모여 에스카리엘 왕국 사태에 대해 열띤 토론이 한창이었다.

 

벌겋게 상기된 테오도르를 보고 왕은 분노했다.

테오!!! 이 무슨 버릇없는 짓이냐!”

폐하!!! 지금 머뭇거릴 때가 아닙니다. 당장 군사를 모아 공주를 구출해야 합니다. 이대로 에스카리엘이 멸망하길 보고만 있으실 겁니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테오도르의 흥분한 모습에 귀족들은 수군거렸고, 왕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어리석고 오만한 녀석.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당장 방으로 돌아가!”

폐하!!! 당장 군대를 보내 그들을 도우십시오!”

테오!!!!!”

 

왕은 거칠게 소리치며 테오도르의 멱살을 잡았다.

테오도르는 왕의 얼굴을 보자 의식이 단숨에 맑아졌다.

분노와 참담함에 어그러진 왕의 얼굴.

항상 자신에게 따뜻한 미소를 나누어 주던 왕의 얼굴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너의 무모함에 왕국의 운명을 걸지 마라! 한 여자의 남자이기 전에 한 나라의 왕자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돼!”

왕은 테오도르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여봐라!! 앞으로 한 달간 왕자를 근신형에 처한다. 당장 데려가!”

... 폐하!!!”

테오도르의 외침은 차가운 복도를 맴돌았고, 무겁게 닫히는 회의실 문 사이로 카르테시온 왕의 비장함이 새어 나왔다.

 

--

 

'Novel > [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8화) 놓치지 마  (0) 2026.06.29
7화) 흔들리는 마음  (0) 2026.06.29
5화) 서늘한 경고  (0) 2026.06.29
4화) 전리품  (0) 2026.06.29
3화) 붉은 눈의 괴물  (0) 2026.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