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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5화) 서늘한 경고

by 매냐씨 2026. 6. 29.

 

유쾌하고 소란스러운 소음들이 모닥불 주위를 늦은 밤까지 맴돌았다.

승리를 자축하는 제국군들의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 사이사이로 공주들의 흐느낌이 유령의 속삭임처럼 처연하게 스며들었다. 승자들의 환희와 패자들의 절망이 같은 밤하늘 아래 뒤섞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전공을 자랑했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흐느꼈다.

 

언제까지 우는 거야? 세상 끝났어?”

하하하! 고귀하신 공주마마들 비위를 맞춰주려면 꽤나 힘들겠어.”

병사들은 짖궂은 농담을 던지면서도, 장막 사이로 보이는 공주들의 모습을 계속 힐끔거렸다.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네 명이나 있었다.

그것도 평생 전장을 떠돌던 병사들이 감히 가까이할 수도 없었던 아름답고 고귀한 여성들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시종과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던 존재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낡은 짐마차 안에 웅크린 채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구겨진 잠옷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그들이 겪은 공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병사들의 시선이 공주들에게 쏠렸다.

누군가는 술기운에 히죽거렸고, 누군가는 노골적인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왕녀들이 느끼는 수치심과 모멸감은 그들의 관심을 더욱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벨로나는 이를 악물었고, 아스티나는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그 순간만큼은 나라를 잃은 슬픔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빼앗기는 공포가 더 크게 느껴졌다.

 

미치겠네. 나는 살면서 저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봤어.”

나라가 망했으니 어차피 이제는 공주도 아니잖아!”

에잇, 죽더라도 한번 품어나 보고 죽을란다!”

어이! 그러다 큰일난다고!!!”

평소에도 호방한 기질이 있던 루드가 성큼 성큼 공주님들의 처소에 다가갔다.

 

술 냄새를 풍기며 덩치 큰 사내가 다가오자 공주들은 동시에 몸을 움찔했다.

욕망에 번들거리는 눈빛.

그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만나 온 어떤 시선과도 달랐다.

찬사도, 호의도, 관심도 아니었다.

마치 값을 매길 수 있는 물건을 살펴보는 듯한 시선.

그제야 아스티나는 자신이 얼마나 평온한 세상 속에서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술에 취해 잔뜩 열이 오른 거구의 사내는 아스티나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가 내뿜는 지독한 욕망의 냄새에 아스티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주군이 살펴보던 여자가 이 여자였지?”

그의 시선이 천천히 얼굴을 훑고 내려갔다.

아스티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아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그는 아스티나의 턱을 거칠게 붙잡아 눈을 맞추었다.

꺄앗!!!”

 

이 미친 놈이, 그 손 놓지 못해!!!”

벨로나가 달려들려 하자 다른 병사들이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 디에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웅크린 채 울고 있었고, 루에나는 정신을 잃은 채 깨어나지 못했다.

 

루드의 거친 손이 천천히 아스티나의 목덜미를 훑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끝이 피부에 닿는 순간,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헤헤, 살결이 장난 아닌데!”

소름이 돋은 아스티나가 몸을 떨며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남자의 우악스러운 힘에 당해낼 수 없었다.

마치 진흙 속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아무리 몸을 비틀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 절망하게 만들었다.

아스티나는 긴장감과 모멸감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서걱!

짧고 서늘한 소리와 함께 루드의 손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끄아아악!”

루드가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고, 공주들과 병사들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피가 사방으로 튀어 막사에 흩뿌려졌다.

 

아스티나는 얼굴에 튄 핏자국 사이로, 무심하게 칼을 털어내는 칼리스를 쳐다봤다.

섬뜩한 붉은 눈동자가 병사들을 천천히 훑었다.

 

공주들에게 털끝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낮고 차가운 목소리.

너희는 전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병사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 해졌다.

제국군이라면, 칼리스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이다.

주군의 명령에 진심이 아닌 것은 없다.

 

카시안, 앞으로 네가 공주들을 호위해라.”

? 제가요?”

칼리스의 명령에 카시안은 세상 귀찮은 얼굴을 했다.

부대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자.

무감각한 자이니, 공주들에게 함부로 음심을 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기사들이 필요해요! 이런 일이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벨로나가 떨리는 몸을 억누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카시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지금 그런 것을 요구할 상황입니까?”

무슨!! 우리는 한 나라의 공주들이고, 황제에게 안안전하게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아닌가요?”

. 망국의 공주는 더 이상 공주라고 할 수 없죠. 노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미친!!!”

벨로나의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랐다. 카시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무심히 말했다.

우린 살려서만 데려가면 됩니다.”

그 말에 벨로나가 이를 갈았다.

저 미친 놈의 눈알을 기필코 파버리겠어!

 

공주를 자극하는 카시안의 태도에 칼리스는 한 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시오, 공주. 카시안은 최고의 실력자이고, 그를 꺾을 사람은 나뿐이니 안심 하시오.”

칼리스의 시선은 떨고 있는 아스티나에게 자연스럽게 쏠렸다.

아스티나는 그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공포스러운 붉은 눈이 다시금 자신을 낱낱이 파헤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두려워 마시오.

그대들을 안전하게 제국으로 데려 가겠다고 약속하겠소. .

황제는 그대들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으니.”

칼리스는 정중하지만 건조한 말투로 말하며, 자신도 모르게 꼼꼼하게 아스티나를 살폈다.

 

얇은 잠옷 차림이 불빛에 비쳐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관능적으로 보였다.

녀석들이 미칠 만하군.

아서!”

, 주군.”

칼리스의 어린 종자가 재빠르게 나왔다.

 

날이 밝는 대로 근처 마을로 가서 공주님들이 갈아입을 만한 것으로 몇 벌 구해와.”

, 주군.”

명령을 받고 물러나려는 종자를 칼리스는 다시 불러 세웠다.

“…아서!”

?”

최대한 얌전해 보이는 것으로 준비해.”

, 주군.”

 

자신이 왜 아스티나의 몸가짐을 신경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모습을 계속 보고 싶지 않았다.

눈에 거슬려서 일뿐.

단지, 그 뿐이었다.

 

 

**************************

황금으로 장식된 대리석 계단 위를 황제가 천천히 내려갔다. 기분이 좋은지 그의 콧노래는 어둡고 음침한 지하 깊숙한 곳까지 길게 이어졌다.

 

차가운 돌벽과 철창만 늘어선 감옥은 적막했다.

수감자는 단 한 명뿐.

황가의 사슬에 묶인 대마녀 메레디아.

 

황제는 익숙한 걸음으로 그녀의 감방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 앞에 전시된 용의 심장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새하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거대한 심장.

수십 겹의 황금 사슬에 묶여 있었지만, 그 안에서는 여전히 희미한 빛이 맥박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용의 계곡에서 저것을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황제는 천천히 심장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그만한 가치는 있었지.”

그의 눈동자가 광기 어린 기쁨으로 번뜩였다.

 

황제는 일부러 용의 심장을 메레디아의 앞에 전시해 두었다.

말 안 듣는 마녀를 길들이기에 이보다 좋은 목줄은 없으니까.

가끔 심장을 움켜쥘 때마다 메레디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지는 모습은 꽤나 볼 만했다.

참 우스운 일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위대하다 말한다.

하지만 황제가 살아오며 본 사랑은 언제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목숨도.

신념도.

자존심도.

사랑 앞에서는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메레디아도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강한 대마녀조차 사랑 하나 때문에 무릎을 꿇었으니.

 

황제는 황금 사슬에 묶인 심장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사랑에 눈먼 자들은 다루기 쉽다.

쥐고 흔들 약점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감옥 앞에 선 황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시 내 개는 일을 잘해.”

사슬이 바닥을 끌었다.

황제의 발치 아래에는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창백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황금빛 저주의 사슬에 묶여 있었다.

 

황제가 사슬을 끌어당기자 메레디아의 몸이 고통에 떨렸다.

그렇지 않나, 메레디아.”

“…….”

이제 소원이 이루어질 때가 가까워지고 있으니. 슬슬 준비를 해 두어라.”

“…, 폐하.”

황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메레디아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용의 심장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십 년째 딱딱하게 굳어 있던 심장에서 따스함이라니.

칼리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아 전전긍긍하던 메레디아는, 미처 백색의 심장의 아랫 부분이 희미하게 살짝 물든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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