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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21화) 불청객

by 매냐씨 2026. 7. 6.

 

제국군은 숲을 가로질러 빠르게 내달렸다.

울창한 나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거센 말발굽 소리만이 고요한 숲을 뒤흔들었다.

고삐를 쥔 카시안의 손에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제 품 안에 있는 벨로나의 존재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괜히 답답해진 카시안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이죠?”

계속 신경 쓰였는데.”

잠시 침묵하던 벨로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주군과 아스티나, 언제부터지? 알고 있었어?”

카시안은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설마 이런 질문이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슨 소리십니까? 제가 뭘 알고 있다고…”

시치미 떼지 마. 내가 눈치 챌 정도인데, 네가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지.”

난처함이 스친 카시안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벨로나는 카시안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못마땅한 숨소리를 짧게 흘렸다.

, 역시 그랬군. 아니길 바랬는데.”

 

벨로나가 노여움을 띤 눈빛으로 카시안을 째려봤다.

네 주군은 저 철부지 어린애를 갖고 놀 셈인가?”

벨로나의 말에 카시안은 화들짝 놀랐다. 당황한 카시안은 수습하려 정신없이 말을 이었다.

무슨 소리세요! 주군이 잔인하고 무섭긴 해도 누구보다 진심인 사람입니다.

아무 여자하고나 불장난할 헤픈 남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오랫동안 주군과 함께 했으니 그 점은 제가 증명하겠습니다.”

 

벨로나는 카시안의 변명에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웃기지 마. 진실한 척해도 남자는 다 똑같아. 저 순진하고 예쁜 애를 어떻게 잡아먹을지만 생각하겠지.”

카시안에게는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가 남녀 사이를 다 아는 듯 말하는 모습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공주에게 정혼자가 있었나?’

혼담이 오고 갔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공주가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웃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되지 않았다.

 

다 큰 성인인데, 그런 건 둘이서 알아서 하겠죠.”

이 바보야,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해! 아스티나는 이제 막 성년이 됐고 남자를 만나본 적도 없는 순진한 애라고! 네 주군이 온갖 사탕발림으로 꼬드기면 그냥 넘어 간단 말이야.”

카시안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벨로나의 모습이 신기했다. 방향은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그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만은 같았다.

 

주군은 진심입니다.”

카시안은 벨로나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어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제 평생 주군의 그런 느끼한 눈빛은 처음 봤어요.”

? 하하하.”

카시안의 실없는 농담에 벨로나가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카시안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공주님도 그런 나쁜 남자를 만나 보셨나 보죠?”

?”

벨로나의 초록빛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갔다. 누가 봐도 말을 만들어내는 얼굴이었다.

뭐 꼭 만나봐야 아나난 책을 아주 많이 읽어서 아는 것이 많아!”

벨로나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카시안은 그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었다.

어떤 것들은 경험해봐야 아는 것들도 있죠. 특히 남녀 사이는 책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벨로나는 순간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입가에는 미소를 띠었지만 초록빛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넌 연애 경험이 많나 보지?”

연애라…’

십여년 전 칼리스와 만난 후로, 이곳저곳을 떠돌며 다양한 여자들을 만났지만 깊은 관계를 맺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을 연애 경험이라 할 수 있을까.

 

미묘하게 굳은 그녀의 표정을 조심히 살피던 카시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없는데요, 연애해 본 적.”

벨로나의 입가에 잔물결처럼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본 카시안은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 해 본 적도 없으면서 잘난 척이야! 궁금하면 나한테 물어봐.”

하하하.”

카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밝은 미소에 벨로나는 가슴 한 켠이 간질이듯 따뜻해졌다.

 

 

지금 노닥거릴 여유가 있나보지?”

칼리스의 화를 억누른 묵직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칼리스는 노기를 띤 눈빛으로 카시안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카시안은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군, 오해십니다. 저흰 진지한 대화 중이었습니다.”

칼리스는 두 사람을 차례대로 훑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두 사람이 진지하게 할 대화가 뭐지?”

카시안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군과 아스티나 공주님에 대해서죠.”

 

할 말을 잊은 칼리스가 벨로나의 눈치를 살폈지만, 여전히 그가 두려운 벨로나는 눈도 맞추지 못했다.

칼리스는 낮게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만 공주도 마차로 갈아타도록 하지.”

칼리스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카시안은 어쩐지 서운한 마음에 말을 얹었다.

? 아직 공주님과 할 말이 남았습니다.”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카시안은 어쩔 수 없이 벨로나를 말에서 내렸다. 당황한 벨로나는 허둥지둥 인사를 하고 마차로 달려갔다.

 

사라지는 벨로나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칼리스가 카시안에게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안된다면, 네 녀석도 안 되는 거야.”

카시안의 입술 사이로 짜증 섞인 숨이 새어 나왔다.

뭘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흰 그런 사이가…”

눈깔이나 제대로 뜨고 말해.”

칼리스는 피식 웃더니 그대로 말을 몰아 앞장섰다. 짜증이 난 카시안은 말고삐를 거칠게 잡아당겨 뒤를 따랐다.

 

 

**************************

멈추어라!”

선두에 있던 병사가 손을 높이 들어 보이자, 칼리스가 크게 외쳤다.

멀리서 황제의 전령이 보였다.

칼리스는 불안함에 말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발레리온경, 오랜만입니다. 소식은 계속 들었는데 오는 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칼리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황제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남자, 시온이었다.

시온이 왔다는 건 중요하거나 은밀하거나 둘 중 하나다.

어쨌든 칼리스는 둘 다 반갑지 않았다.

 

어쩐 일이지? 안부인사만 나누자고 온 건 아닐 테고?”

시온은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눈웃음을 지었다.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는 놈이었다.

하하하. 급하신 건 여전하시군요. 폐하께서 공주님들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칼리스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선물?”

, 폐하께서 공주님들에 대한 기대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손수 고르신 귀한 것입니다.”

 

황제가 직접 골랐다는 얘기에 칼리스는 뒷맛이 찝찝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분명 기분 나쁜 장난질을 쳤을 것이다.

 

 

그나저나 공주님들은 어디 계시죠?”

시온은 뱀 같은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할 말 다했으면 저리 꺼져.”

시온은 칼리스의 날카로운 명령에도 아랑곳 않고 마차로 다가갔다. 마차 문을 열려는 시온의 목에 칼리스의 서늘한 칼날이 들어왔다.

 

지금 뭐하는 짓이지?”

시온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전 상관없는데, 제가 죽으면 경이 곤란하시겠죠?”

시온은 아무렇지 않게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그는 시간을 들여 찬찬히 공주들을 훑어봤다.

공주들은 놀란 마음보다, 그의 서늘하고 집요한 눈빛에 긴장이 앞섰다.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군요. 폐하께서 흥미를 가지실 만도 하네요.”

시온의 들뜬 목소리에 칼을 쥔 칼리스의 손이 분노로 떨렸다.

 

아까워서 어쩌나.”

시온은 슬며시 본심을 흘린 뒤 여러 개의 선물상자를 공주들에게 건넸다.

고귀하신 아르테리온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부디 선물과 함께 연회를 빛내 주십시오.”

시온은 정중하게 선물을 전달했지만, 공주들은 기쁘지 않았다.

곱게 포장된 상자가 오히려 소름 끼쳐 공주들 중 어느 누구도 차마 선물을 열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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