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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19화) 마침내 닿은 진심

by 매냐씨 2026. 6. 30.

 

카시안은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병사들과 함께 출발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제국으로 가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일 것이다.

공주님들의 상황이 썩 좋지는 않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누가 가서 공주님들 준비를 도와드려. 반 시진 뒤 출발이니 서둘러야 해.”

근처에 있던 칸델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카시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에게 무어라 나무랄 처지가 아님을 본인도 알고 있었다. 자신부터 공주와 거리를 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사라지는 칸델을 쳐다보던 카시안은 흘러나오는 쓴웃음을 거두고는 고개를 돌렸다.

 

 

**************************
칼리스는 아스티나에게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 태도가 다정해서 아스티나는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이 조용히 걷혀 갔다.

테오도르를 처음 발견했을 때, 반가움보다 그를 무조건 살려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왕자의 뒤에서 번뜩이던 붉은 눈동자가 얼마나 뜨거운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는지, 기억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아스티나의 얼굴을 보니, 그녀를 향해 품었던 수없이 많은 의문들이 무의미해지는 것만 같아 칼리스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뒤돌아선 칼리스는 한참 동안 말을 골랐다.

제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 것 같아 입을 열기가 조심스러웠다.

카시안이 했던 얘기도 마음을 어지럽혔다. 무엇 하나 정리되지 않은 마음속은 낯설 정도로 시끄러웠다.

 

“…상황은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

아스티나가 긴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냈다.

그렇군.”

칼리스는 말없이 포도주잔을 채웠다.

차가운 그의 뒷모습에 아스티나는 마음이 다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기꺼이 초대하던 태도에 마음을 놓았는데, 사실은 자신에게 화가 난 것 같아 애꿎은 치마 자락만 움켜 쥐었다.

 

아쉽겠지만, 녀석들은 패했어. 기대는 버리는 게 좋아.”

담담하게 가라앉은 그의 말에 아스티나는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자신은 아쉬워한 적도 궁금해한 적도 없는 사실을 왜 중요한 것처럼 말하는 걸까.

기대한 적 없어.”

아스티나는 서운함을 감추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칼리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 기대한 적 없다고?

그런데 그렇게 달려 나왔나? 내가 분명히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을텐데?”

그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나갔던 거야. 그런데 거기에 왕자님이…”

아스티나는 칼리스의 날카롭게 버려진 눈빛에 말을 잇지 못했다.

왕자를 애타게 부르던 아스티나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며 그를 괴롭혔다. 칼리스는 낮게 혀를 차며 눈썹을 찌푸렸다.

, 퍽이나 반가웠겠군.”

 

자신을 다그치는 칼리스의 태도에 아스티나도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일부러 상황을 만든 것도 아니고, 왕자에 대한 그리움보다 칼리스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인데 왜 자신을 몰아붙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칼리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반가웠어. 날 구해주러 여기까지 오다니! 여전히 내가 필요하다니 더없이 감격스럽더군.”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눈살이 구겨졌다.

어쩌지, 그는 이제 다시는 널 구하러 올 수 없을텐데.”

아스티나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선명하게 번졌다.

무슨 말이야? 왕자님은 살아서 탈출했다고 들었는데?”

칼리스의 눈빛이 거칠게 가라앉았다. 공주에게 불필요한 말을 옮긴 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리에 치명상을 입었지. 다리를 절단해야 할 수도 있어.”

왜 그렇게 잔인하게 말하는 거야?”

잔인?”

칼리스가 비릿한 헛웃음을 흘렸다.

"그 애송이가 내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어. 전쟁터에서 검을 든 대가를 알려주는 게 잔인한 일인가?"

칼리스는 아스티나의 두 팔을 꽉 쥐었다. 아스티나는 그의 터질듯한 분노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렇게 그를 살리고 싶었나? 전투 중이라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 줄 몰랐어?!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다가 칼이라도 맞았으면 어쩌려고 그랬지?!!”

켜켜이 쌓여 있던 감정들이 둑이 무너지듯 쏟아져 나와 칼리스는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그녀가 자신을 미워했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왕자의 곁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칼리스의 붉은 눈이 분노와 상처로 처연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그가 소중했나?”

 

아스티나는 칼리스가 내뱉는 말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막무가내로 몰아붙이고 있는 건 본인이면서 왜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거지?’

아스티나는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짜증과 억울함이 뒤섞여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끝내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이 컸지만, 그의 상처받은 눈빛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아스티나는 자신을 꽉 잡고 있는 칼리스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녀의 간절한 떨림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제야 칼리스는 아스티나를 제대로 바라봤다.

그대로 두면사람을 죽이게 되잖아…”

 

그녀의 말에 칼리스는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조용히 차올랐다.

그녀의 팔을 힘껏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게 중요했어?”

더 이상 네가 피에 젖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아스티나의 푸른 눈동자에서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살인을 서슴지 않는 괴물을 사랑해버린 자신이 한심했다.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정복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현실은 여전히 잔혹했다.

아스티나는 쓸쓸하고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

우리의 처음은 참혹했지만, 결말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스티나는 칼리스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분명하게 말했다.

지금 나에게 소중한 사람은너뿐이야.”

 

칼리스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아스티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정신없이 요동치는 탓에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스티나의 다정한 손길에 정신없이 딸려갈 뿐이었다.

칼리스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가 소중해?”

아스티나는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칼리스의 희미했던 붉은 눈동자에 다시 선명한 빛이 스며들었다.

칼리스의 입술이 달싹였다.

두려워 쉽게 꺼내지 못했던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날 사랑해?”

아스티나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그런 것 같아.”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듯 칼리스의 눈동자가 요란하게 반짝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아스티나의 두 볼이 붉어졌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아스티나는 부끄러움에 황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걸 본 칼리스가 그녀의 손을 얼른 붙잡고는 자신의 얼굴을 바짝 붙였다.

가까이 다가온 칼리스의 얼굴에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감추지 마. 네 마음을 전부 보고 싶어.”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의 전부를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널 사랑해, 아스티나.”

그의 나른한 속삭임에 아스티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콤한 전율이 차올랐다.

널 사랑해서못나게 굴었어. 미안해.”

칼리스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에 맺혀 있던 분노와 상처는 어느새 조용히 녹아내린 뒤였다.

 

미안해.”

나지막한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만큼 조심스러웠다.

칼리스는 아스티나의 볼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아스티나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그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칼리스가 천천히 입술을 떼고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아스티나는 떨리는 눈빛으로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칼리스는 그 미소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 생애 가장 큰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천천히.

하지만 망설임 없이.

아스티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두 사람은 서두르거나 욕심내지 않았다.

서로의 숨결을 천천히 나누며, 오래도록 마음을 확인하듯 입맞춤을 이어갔다.

 

입술이 떨어진 뒤에도 두 사람은 쉽게 멀어지지 못했다.

이마를 맞댄 채 흐트러진 숨을 천천히 고르며, 서로의 체온을 조용히 느꼈다.

그 어떤 말보다도,

서로의 입맞춤이 두 사람의 진심을 가장 선명하게 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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