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짙은 어둠이 내린 막사 안.
아무 말없이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뒤로 촛불만 잔잔하게 흔들렸다. 장막 너머로 스며드는 밤바람이 희미하게 불꽃을 흔들 때마다 두 사람의 그림자도 함께 일렁였다.
아스티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붉어진 눈시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놀란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드레스를 찢어버리던 칼리스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언제나 냉정하던 남자가 그렇게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스티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웃지?”
적막을 깨고 칼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하, 미안. 아까 드레스를 찢던 모습이 생각나서.”
천이 뜻대로 찢어지지 않자 결국 칼까지 꺼내 들었던 남자였다. 그 진지한 표정으로 드레스를 난도질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아스티나는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하하.”
눈물이 날 정도로 웃는 아스티나를 바라보던 칼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아스티나의 가슴은 다시 한번 벅차올랐다. 이 남자의 작은 손짓만으로도 기분이 달라지는 자신이 신기했다.

“황제는 어떤 사람이야?”
아스티나가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던 칼리스가 눈을 활처럼 휘면서 말했다.
“그런 거지 같은 드레스를 보낼 정도로 미친 놈?”
“하하하. 그게 뭐야.”
아스티나의 맑고 청아한 웃음소리가 조용한 막사 안에 은은하게 번졌다. 부드럽게 녹아드는 공기에 칼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하지만 칼리스의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이 슬며시 피어올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스티나,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아스티나는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태도로 마주했다.
“널 사랑해. 이런 마음이 든 적은 처음이야.”
진심을 눌러 담은 그의 목소리에 아스티나는 온몸에 퍼지는 희열을 감추기 어려웠다. 어떻게 이 남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다지도 쥐고 흔들 수 있을까.
사랑 고백에 들뜬 아스티나와는 달리,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달뜬 감정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를 단단한 결심만이 채웠다.
칼리스는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행복한 시간을 조금만 더 붙잡고 싶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아스티나, 우린 제국으로 갈 거야. 아니, 가야만 해.”
아스티나는 큰 눈을 깜빡이며 남자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방금 내게 사랑을 고백하던 사람이 맞나?
“난 거기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정말 많이 고민했는데… 위험하지만 가기로 결심했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아스티나는 급격히 어두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불안을 눈치챈 칼리스는 허둥거렸다.
“아스티나, 걱정마. 내가 반드시 널 지켜줄게.”
아스티나는 여유가 사라진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어떻게? 뭘 할 수 있는데? 그 미친 황제에게서 어떻게 날 지켜줄 수 있는데?”
“그건…”
아스티나의 다그침에 칼리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고, 그 모습이 아스티나를 더욱 자극했다.
“황제의 사냥개로 불리던 네가 뭘 할 수 있어? 그냥 얌전히 날 데려다 주는 게 네 할 일이겠지.”
“아스티나!”
칼리스는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만큼은 상처를 감추지 못했다.
“주군, 카시안입니다.”
그때, 냉랭해진 막사의 공기를 뚫고 카시안의 음성이 들렸다.
“들어와.”
칼리스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카시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미세한 긴장이 어린 카시안의 표정에 두 사람도 덩달아 긴장했다.
“무슨 일이지?”
칼리스의 말에 카시안은 아스티나를 흘깃 쳐다보고는 말을 하기 주저했다. 그 모습에 칼리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고하는 것을 허락했다. 잠시 주저하던 카시안은 결국 입을 열었다.
“메레디아가 루에나 공주님의 몸을 빌어 나타나 경고했습니다. 세눈박이 까마귀도 열마리가 넘습니다.”
“쯧.”
짧게 혀를 찬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게 무슨 의미지?”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던 아스티나가 질문했다.
방금 전 그녀에게 불안함을 안겼던 칼리스로서는 현재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메레디아는 황제의 마녀야. 세눈박이 까마귀는 그녀의 눈이고. 이제부터는 우리의 모든 것을 황제가 알게 된다는 얘기지.”
아스티나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잊었던 잔혹한 현실을 맞닥뜨린 것 같았다.
“넌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은밀히 전달해. 다들 몸가짐에 유의하라고 전하고.”
“제가 봤을 땐, 주군만 조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카시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입닥쳐.”
칼리스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더 이상 참견하지 마."
아스티나는 말없이 칼리스를 바라봤다. 방금 전 다툼이 무색할 만큼,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피로가 짙게 어려 있었다.
“주군, 이젠 정말 조심하셔야…”
칼리스의 서늘한 눈빛에 카시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황제의 선물은 전부 수거해서 태워버려.”
“주군!”
칼리스의 황당한 명령에 카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선물을 태운 걸 알면 황제가 이번에는 주군의 심장을 쥐어 틀어 부서 버릴지도 모른다.
“그 짜증나는 천조각이 내 눈에 띄면 너희부터 태워버릴 거다.”
섬뜩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카시안은 주군이 진심으로 화가 났음을 직감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인 그는 말없이 막사를 떠났다.
굳은 표정의 칼리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포도주잔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뭘 할 수 있냐고 물었지?”
아스티나는 그가 뿜어내는 짓눌리는 압박감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칼리스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빙그르르 돌리며 말을 이었다.
“하… 도착 직전에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 칼리스는 잠시 손안의 단도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그었다.
붉은 피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제야 아스티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흘러내리는 피를 포도주잔에 받아냈다. 조금이라도 더 담으려는 듯 손바닥에 힘을 주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아스티나는 아연질색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다급히 그를 말렸다.
“칼리스, 지금 뭐하는 거야! 갑자기 왜!”
칼리스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널 지켜주는 일.”
칼리스는 피가 든 잔을 아스티나에게 내밀었다.
붉은 피가 찰랑이는 잔 너머로, 그의 붉은 눈동자가 뜨겁고도 서늘한 빛을 머금은 채 아스티나를 깊이 응시했다. 그 눈빛 앞에서 그녀는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아스티나의 입가에 칼리스가 천천히 잔을 기울였고, 피가 서서히 그녀의 입술을 적시며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뜨겁고 비릿한 감각에 아스티나는 점점 아찔해져 갔지만, 그의 단호한 손길은 조금의 거부도 허락하지 않았다.
피가 몸속 깊이 스며들자 뜨거운 열기가 온몸으로 번졌다. 곧이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아스티나는 점점 심해지는 통증에 결국 잔에서 입을 뗐다.
“하아… 칼리스, 너무 아파… 더 이상은 못 먹겠어.”
칼리스는 고통을 호소하는 아스티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남은 포도주잔을 확인한 칼리스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와 나즈막하게 말했다.
“1온스는 먹여야 한다고 했어.”
그는 거침없이 포도주잔을 입에 털어 넣더니, 아스티나의 고개를 젖혀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끈적한 피가 미끈한 혀를 따라 끊임없이 흘러 들어갔다. 칼리스는 피를 제대로 전달할 요량인지 제 욕심을 채울 요량인지, 혀끝으로 그녀의 입안을 더듬으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삼키게 했다.
목을 따라 흘러내리는 통증과 열기, 그리고 그의 거침없는 키스에 아스티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약효가 퍼지듯 온몸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아스티나에게는 열망보다 통증이 먼저였다.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칼리스는 더욱 단단히 그녀를 옭아맸다.
아스티나는 견딜 수 없는 아픔에 온몸을 떨며 눈물을 쏟아냈다. 피를 모두 넘기고 나서야 입술을 뗀 칼리스가 아스티나를 꼭 껴안았다.
“하아… 너무 아파…”
칼리스는 자신의 품안에서 울먹이며 떨고 있는 가녀린 여인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아스티나, 조금만 참아. 내 피가 널 지켜줄 거야.”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는 연인의 모습에 칼리스는 가슴이 미어질 듯한 아픔을 느꼈다.
“널 아프게 해서 미안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 알았다면, 피를 먹이지 않았을 텐데.
칼리스는 로드리스에게 좀 더 자세히 묻지 않은 자신을 다그쳤다. 왜 그가 용의 피가 약이면서 독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참을 거칠게 숨을 쉬던 아스티나의 호흡이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칼리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정리해주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속눈썹이 몇 번 떨리더니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본 칼리스는 조심스럽게 안아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칼리스는 잠든 아스티나를 꼭 껴안았다.
피를 먹였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더 이상 세눈박이 까마귀도 황제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칼리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아스티나의 금빛 머리카락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할 만큼 선명하게 빛났다.
그 모습은 마치 위험으로부터 제 것을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맹수 그 자체였다. 어느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보았다면 섣불리 다가서기 힘들 정도의 위압감과 적개심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날 밤, 칼리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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