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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20화) 한 걸음 더

by 매냐씨 2026. 7. 1.

 

바쁘게 서두른 탓에 제국군은 약속한 반 시진보다 일찍 출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해, 전투의 흔적이 남은 이 곳을 빠르게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여전히 칼리스는 아스티나와 함께 막사에 머물러 있었다.

곁눈질로 주군의 막사를 살피던 카시안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불안감까지 겹치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분명히 자신의 충언에 고개를 끄덕였던 주군이, 마음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모습이 못 마땅했다.

칼리스를 부르려던 카시안은 짧게 혀를 찬 뒤 말을 돌렸다.

지금 주군을 불렀다가는 눈치 없다고 타박이나 받을 것이다. 카시안은 주변을 한 번 더 확인하기로 했다.

 

 

공주들의 막사까지 온 카시안은 눈앞의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섰다.

칸델과 벨로나가 나란히 말에 타고 있었다.

고삐를 꽉 말아 쥔 카시안의 곁으로 빌헬름이 웃으며 다가왔다.

칸델 녀석, 결국 공주님께 다가갔군요.”

카시안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무슨 말이지?”

모르셨습니까? 칸델이 저 공주님한테 관심있는 거?”

황제의 것에 손대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카시안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였다.

빌헬름은 그의 살기에 등줄기가 쭈뼛 솟아 다급하게 손사레를 쳤다.

오해십니다! 뭘 어찌해 볼 생각이 있겠습니까? 칸델 성격을 아시면서, 그저 관심이 있으니 호의를 베푸는 정도겠죠.”

 

그게 문제라고!’

카시안도 칸델이 저급한 욕구로 움직이는 멍청한 자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그의 강직한 성품이 문제였다. 그는 한번 마음을 품으면 끝까지 책임지려 드는 남자였다.

 

 

벨로나를 향해 붉어지는 칸델의 얼굴도, 아무렇지 않게 그의 곁에 있는 그녀의 모습도 눈에 거슬렸다.

'성가시게.'

짧게 혀를 찬 카시안의 회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카시안의 눈치만 살피던 빌헬름이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부관님, 제가 괜한 얘기를 꺼냈습니다. 방금 얘기는 잊어 주십시오. 칸델은 제가 나중에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

 

카시안이 서늘한 눈빛으로 빌헬름을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헛소리지? 칸델이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상관없다. 녀석이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겠지.”

그렇죠, 맞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허둥대는 빌헬름을 보며, 카시안의 입가에 짓궂고도 위험한 미소가 어렸다.

그렇다고 저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지.’

카시안은 말을 몰아 두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오는 카시안을 발견한 벨로나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그 모습에 카시안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어서와, 카시안. 지금 출발하나?”

이제 곧입니다. 주군이 나오는 대로 출발할 겁니다.”

카시안은 두 사람을 번갈아 훑어보며 말했다.

공주님께서는 마차를 안 타십니까?”

아직 루에나 상태가 좋지 않아. 아무래도 마차를 넓게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난 따로 가기로 했어.”

또 자기만 손해 보려 드는군.’

마침 칸델경이 호의를 베풀어서 말을 타고 가려고. 마차는 답답해서 그런지 난 이 편이 나은 것 같아.”

 

카시안의 눈썹이 희미하게 구겨졌다.

, 공주님은 이상하시군요. 저는 이름을 부르시면서 칸델은 경이라니.

직급으로 따지자면, 제가 부관이라 그보다 훨씬 높습니다만.”

당황한 칸델이 상황을 수습하려 애썼다.

당연합니다!! 카시안님이 저보다 훨씬 상관이십니다. 공주님, 저에게 말씀을 낮추세요.”

, 그래? 그럼 앞으로 카시안경이라고 불러야 하나?”

카시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카시안은 친근하게 들리는데, ‘카시안경은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이었다.

그에게도 공평하게 하대를 하시죠. 처음부터 존대는 주군께만 하셨으면서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카시안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벨로나는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존대를 하든 하대를 하든 내 마음인데, 네가 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두 사람 사이에서 민망해진 칸델이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하, 제가 잘못했네요. 처음부터 하대하라 말씀드릴 것을.”

아니, 네 잘못이 아니야. 카시안이 괜히 심통 부리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

 

!”

벨로나의 태도에, 카시안은 짜증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젠장.'

미간을 찌푸린 카시안은 말을 돌리려 고삐를 고쳐 잡았다.
그런데 자꾸만 눈길이 고삐를 나란히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

카시안은 짧게 혀를 차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공주님,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모실게요.”

카시안은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벨로나에게 손을 뻗었다.

벨로나는 턱을 살짝 들어 카시안을 찬찬히 살폈다.

카시안은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지는 것 같았다. 속마음이 들킨 것만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싫어, 귀찮아.”

벨로나는 무심하게 얼굴을 돌렸다.

카시안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민망함과 서운함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카시안의 기분을 살피던 칸델은 벨로나를 달랬다.

공주님, 저보다는 카시안님이 훨씬 말을 잘 모십니다. 자리를 옮기시죠.”

칸델의 말에 벨로나는 곁눈질로 카시안을 쳐다봤다.

표정을 제대로 감추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금세 괜히 너무 몰아붙였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카시안, 준비가 끝났나?”

칼리스가 아스티나를 앞에 태운 채 카시안에게 다가왔다.

칼리스는 더 이상 숨길 생각도 없는지, 아스티나가 그의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있던 카시안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좀처럼 억누를 수 없었다.

주군! 저 좀 보시죠!”

시끄러워.”

칼리스는 카시안의 반응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주먹을 움켜쥔 카시안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주군!”

알았어, 알았다고!”

카시안의 분노 어린 목소리에 칼리스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아스티나, 잠시만 기다려줘.”

칼리스는 아스티나를 조심스럽게 내려주고는 카시안의 뒤를 따랐다.

 

 

부대와 떨어진 곳에서 카시안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예 대놓고 자랑질이십니까? 제 말에 분명 수긍하지 않으셨어요?”

시끄러워. 나도 알고 있어.”

거짓말 마십시오. 도대체 뭘 알고 계십니까? 여자에 빠져서는 천하 제일 바보가 되셨습니다.”

칼리스의 무책임한 태도에 카시안은 화가 치밀어 올라 막말을 퍼부었다.

칼리스는 말없이 카시안을 노려봤다.

공주님과 도망이라도 치시게요? 간자는 어떻게 하실 거죠? 얼마 못 가 붙잡히실 겁니다.”

칼리스의 눈빛이 조용하게 빛났다.

도망은 안 가. 아니 못 가. 심장을 가지고 와야 해.”

그럼 더더욱 조심하셔야죠. 황제에게 공주님을 자랑할 셈입니까?
그 미친 놈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어떻게 이렇게 막무가내이십니까?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휘몰아치는 카시안의 잔소리에 칼리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만해, 알아들었으니까.”

칼리스는 피식 웃었다.

저 잔소리가 걱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주의하지.”

주군의 미안한 기색에 카시안의 날카롭게 벼려졌던 감정도 서서히 누그러졌다.

진짜 주군 때문에 제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습니다.”

미안하군. 하지만 걱정마. 내가 나중에 용의 심장을 되찾으면 너에게 좀 나눠주지.”

, 제발 그래주십시오. 아주 비싸게 팔아버릴테니까.”

칼리스와 카시안은 서로를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대로 돌아갔다.

 

칼리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스티나를 공주들이 타는 마차로 직접 안내했다.

방금 전 카시안에게 들은 잔소리가 떠오른 탓인지, 이번에는 그녀를 자신의 말에 태우지 않았다.
그의 손 끝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주군의 결심에 만족한 카시안이 말을 돌리자, 벨로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전 상황이 떠오른 카시안은 빈정이 상해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때, 떠나려던 카시안의 바짓자락을 벨로나가 황급히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카시안은 흠칫 몸을 굳혔다.

공주님, 위험하게 지금 뭐하십니까!”

날 태워 줘. 묻고 싶은 게 있어.”

벨로나의 눈동자에는 감추지 못한 궁금증이 가득 어려 있었다.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한 카시안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제 앞에 태웠다.

하지만 좀처럼 그녀를 의식하는 마음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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