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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1화) 첫 만남

by 매냐씨 2026. 6. 29.

 

에스카리엘 왕궁의 아침은 오늘따라 유난히 분주했다.

 

새벽빛이 푸른 지붕을 물들이게 시작할 때부터, 시녀들과 하인들은 바쁘게 회랑을 오갔다. 정원사들은 밤새 맺힌 이슬을 털어내며 화원을 정성껏 손질했고, 요리사들은 만찬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새롭게 손질한 상아빛 분수대에서는 맑은 물줄기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정원 곳곳에 피어난 수국은 초여름의 색을 머금고 있었다. 왕궁 전체가 연회 준비로 들썩였다.

 

오늘은, 에스카리엘의 사랑스러운 막내 공주인 아스티나가 처음으로 자신의 약혼자를 만나는 날이다. 이제 막 성년이 지난 공주가 혼인을 서두르는 것은 이례적이지만, 군사력이 약한 에스카리엘의 평화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스티나는 아침부터 언니들 등살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왕국 최고의 재단사들이 만든 아름다운 드레스들을 입어보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몇 시간째 시달리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아스티나, 제발 좀 가만히 있어.”

벨로나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언니, 나 이제 너무 힘들어. 머리 장식만 벌써 열 번째 라고! 아직 구두도 못 골랐단 말이야.”

참다못한 아스티나는 결국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쏟아냈다.

 

아스티나, 오늘은 중요한 날 이잖아.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데 제대로 힘 줘야지!”

셋째 공주 루에나는 그런 아스티나는 아랑곳 않고 열심히 악세서리를 골랐다. 악세서리를 고르는 손 끝은 즐거움으로 들떠 있었다.

 

우리 사랑스러운 막내는 뭘 해도 예쁘지만, 오늘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예쁘게 만들어주고 싶어.”

치장을 돕던 첫째 공주 디에나가 지친 아스티나를 상냥하게 위로해주었다.

4년 전 황비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디에나는 장녀로서 황비의 빈자리를 잘 채워오고 있다. 두 달 뒤면 기사단장 에드윈과 결혼을 앞 둔 만큼, 왕궁을 떠나기 전 아스티나의 약혼은 그녀가 가장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이벤트였다.

 

아스티나는 거울 앞에 서서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원래라면 이런 날은 설레야 정상일 텐데 이상하게 마음이 뒤숭숭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테오도르 왕자는 상냥하고 올곧은 성품이라고 들었어. 아직 어리지만, 분명 좋은 남편이 될거야.”

디에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우아한 손길로 아스티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아스티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게 뭐야난 운명적인 사랑을 원했는데!!”

또 애처럼 구는 군. 우리가 사랑으로 남자를 만나니? 우린 한 나라의 공주란 말이야.

우리에게는 거스를 수 없는 정해진 삶이 있단다. 철없는 아기 공주님, 왕국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소서.”

벨로나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왕국의 미래를 위해, 루스베키아 국왕과 혼담이 오가는 벨로나의 입장에서는 사랑 타령을 하는 막내가 우스워 보였다. 몇 년 전에 아내를 사별한데다 어린 왕자도 있는 국왕과의 재혼 자리가 못마땅했지만,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벨로나의 가시 돋힌 말에, 왕국의 미래보다 사랑을 선택한 디에나는 무안해져 괜히 아스티나의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벨로나는 그런 디에나에게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언니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한 마디 하고 싶었던 벨로나였다.

 

아스티나는 위험한 냉미남을 좋아해! <북부대공은 밤잠이 없다>의 주인공인 루스티엔처럼!!”

루에나의 밝은 목소리에 냉랭하던 분위기는 일순간 모두의 웃음으로 뒤덮였다.

 

하하, 아스티나, 소설 속 북부대공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무서운 지 아니?”

한참을 웃던 벨로나가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냉미남은 소설에서나 멋있는 거야. 현실에서 만나면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칠 걸.”

 

, 그래도 섹시하고 멋있잖아.”

아스티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 절대. 네버! 루에나도 아스티나도 하이틴 로맨스 좀 그만 읽어. 황제의 미친 사냥개를 현실에서 만나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벨로나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미친 사냥개?”

아스티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칼리스 다스 발레리온..”

그 이름이 나오자 방 안의 분위기가 잠시 조용해졌다.

 

지난 달에 북쪽 크로첸 왕국을 멸망 시켰다던데…”

디에나가 몸서리치듯 중얼거렸다.

그 크로첸을?! 무기도 발달했고 군대도 막강하다고 들었는데…”

아스티나는 수업 시간에 들었던 크로첸 왕국을 떠올렸다.

북쪽에 위치한 얼음과 눈의 나라, 크로첸 왕국.

많은 광물 자원과 뛰어난 군사력으로 제국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배웠었다.

 

맞아. 이번 전투로 크로첸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어. 사냥개가 지나간 자리엔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들었어…”

루에나가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작게 말했다.

 

그 남자는 용족이라 인간의 힘을 넘어선다고 들었어. 게다가 제국에는 대마녀도 있어서 어느 왕국이 제국에 대항할 수 있을까? 이 이상 그들이 힘을 뻗치지 못하기만을 바랄 뿐이야.”

벨로나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스티나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칼리스 다스 발레리온.

그녀에게 그 이름은 그저 먼 나라 이야기 속 괴물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 됐고.”

디에나가 손뼉을 가볍게 쳤다.

오늘의 주인공은 우리 막내잖니. 다들 지쳤는데 이제 마무리 좀 해볼까?”

 

그 말에 아스티나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언니들의 말대로였다.

오늘은 무서운 이야기보다 설레는 이야기가 더 어울리는 날이었다.

 

똑똑똑. 벌컥.

미처 허락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이 황급히 열리며 시녀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허락도 없이 들어와 죄송합니다, 공주님들.

아스티나 공주님, 카르테시온의 왕자님께서 도착하셨어요! 빨리 귀빈실로 오시라는 폐하의 명입니다!”

 

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술렁였다.

 

벌써?”

,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없어도 가셔야 합니다!”

결국 아스티나는 시녀와 언니들에게 떠밀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속으로 작게 심호흡을 했다.

 

 

**************************

귀빈실의 높은 아치형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새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부드럽게 번져 내렸다. 은은한 꽃향기가 방 안을 감싸고, 중앙에 놓인 수정 샹들리에는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에스카리엘 국왕과 카르테시온 대사는 정겹게 담소를 나누었지만, 마주 앉은 아스티나와 테오도르는 긴장감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슬며시 고개를 든 아스티나는 테오도르 왕자를 찬찬히 살펴봤다. 초상화는 미리 봤지만, 아스티나가 내심 기대했던 남성적인 매력은 거의 없었다.

 

부드러운 금발에 맑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 생김새와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환한 미소는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마른 몸도, 아직 자라고 있는 키도, 소년 같은 분위기도무엇 하나 아스티나를 두근거리게 만들지 못했다.

 

'그와 결혼하면, 금발에 우리를 닮은 복숭아빛 아이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다 죽겠지...'

아스티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반면, 테오도르는 지금 숨 쉬는 법조차 잊은 것 같았다.

이런 자리는 그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아 왕국을 떠나면서부터 긴장한 상태였지만, 아스티나를 실물로 만난 순간 모든 것이 까맣게 되어 버렸다. 이미 아스티나의 초상화를 수십 번도 넘게 본 상태였지만, 초상화는 그녀의 실물을 백 분의 일도 담아내지 못했다.

 

햇살을 머금은 듯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
하늘처럼 밝은 푸른색 눈동자.
맑고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복숭아 빛 뺨.
누구라도 매료될 것 같은 사랑스러운 미소까지.

 

순간 테오도르와 아스티나는 눈이 마주쳤고, 그는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 두근거림이 긴장 때문인지, 아름다운 그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머지않아 모든 남자의 마음을 빼앗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저희를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하하하, 당연한 것을요. 공주의 약혼이 아니어도 카르테시온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에스카리엘 국왕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마음 한 편이 불편했다.

그는 사랑스러운 막내 공주를 서둘러 약혼시키는 것을 처음에는 주저했었다.
하지만, 불안한 국제 정세 속에서 강한 군사력을 가진 카르테시온이 혼담을 원한다는 것은 왕국에 있어서 호재임은 분명했다.

 

전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주님께서는 곧 카르테시온의 왕세자비가 되실 분입니다.
에스카리엘의 평화 또한 결코 남의 일로 여기지 않겠습니다.”

국왕의 불안을 눈치 챈 카르테시온 대사는 정중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전하, 공주님께서 제 곁에 계시는 한, 에스카리엘은 제게 소중한 나라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겠습니다."

테오도르 역시 힘을 주어 거들었다.

그제야 국왕은 안도의 눈빛을 띄었다.

공주를 생각하는 다정한 마음들에 안심이 되는군요.”

 

테오도르는 아스티나를 향해 햇살같이 따스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에 아스티나는 긴장감이 사르르 녹았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마치 이 나라에 불행 따위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아스티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투정을 부렸던 자신을 속으로 나무랐다.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오늘이 에스카리엘의 마지막 아침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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