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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1화) 약혼식

by 매냐씨 2026. 6. 29.

 

 

대륙 서쪽 끝에 자리한 작은 나라 에스카리엘은 오늘따라 유난히 분주했다.

오늘은 에스카리엘의 사랑스러운 막내 공주 아스티나의 약혼식이다.

이른 아침부터 왕국은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원 가득 피어난 수국이 초여름의 향기를 더하며 연회장을 화사하게 물들였지만, 미묘하게 흐르는 긴장감만은 감출 수 없었다.

 

결국 크로첸이 패하다니미친 제국놈들.”

그 크로첸까지 무너졌는데 우리 같은 소국이 버틸 수나 있겠습니까?”

그래도 다행입니다. 아스티나 공주님께서 카르테시온으로 시집가시면 당분간은 한숨 돌리지 않겠습니까?”

에잇! 벨로나 공주님의 혼담만 성사됐어도 루스베키아가 등을 돌리진 않았을 텐데…”

! 좋은 날에 그런 말은 삼갑시다.”

 

귀족들의 끊임없는 뒷말들에 진저리가 쳐진 둘째 공주 벨로나가 주변을 살피며 나지막이 말했다.

지긋지긋한 녀석들.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벨로나의 말에 놀란 첫째 공주 디에나가 얼른 등을 돌려 주위의 시선을 차단했다.

, 말을 가려서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들으면 어때. 어차피 저 녀석들의 관심사는 내가 아니라 아스티나 아니야?
우리 막내 공주님 덕분에 카르테시온이 우리 편이 됐잖아.”

 

군사력이 약한 에스카리엘의 무기는 아름다운 공주들이었다.

첫째 공주 디에나는 기사단장과 사랑에 빠졌고, 둘째 벨로나는 루스베키아 국왕과 혼담이 오갔지만 갑자기 복잡해진 국제 정세 때문에 무산되었다. 셋째 루에나도 있었지만, 카르테시온의 왕자가 원한 것은 막내 아스티나였다.

그래서 왕국의 모든 시선은 막내 공주 아스티나에게 쏠려 있었다.

 

벨로나혹시 혼담이 무산된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리니?”

디에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벨로나가 화들짝 놀랐다.

언니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오히려 좋았는 걸.”

"루스베키아 왕이 얼마나 냉정한 사람인 줄 알아? 게다가 내 나이에 남의 아이까지 키워야 하다니, 무산돼서 천만다행이지."

벨로나의 너스레에 디에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벨로나와 혼담이 오갔던 루스베키아 국왕은 오래전 아내와 사별했고 어린 아들도 있었다. 벨로나로서는 반가울 리 없는 혼담이었다.

걱정 마, 너도 곧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디에나의 따스한 눈빛에 벨로나도 미소로 답했다.

 

그때였다.

테오도르 카르테시온 왕자님과 아스티나 에스카리엘 공주님께서 드십니다.”

시종의 큰 소리에 맞춰 연회장 문이 열리며 아름다운 두 남녀가 천천히 홀 안으로 들어왔다. 샹들리에 아래로 금빛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빛났다. 두 사람은 마치 장인의 손끝에서 빚어진 도자기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어머, 너무 예쁘다! 내 말대로 흰색 드레스로 선택하길 잘했지?”

뒤에서 나타난 루에나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루에나! 어서 와. 몸은 좀 어때?”

루에나를 발견한 디에나가 반갑게 맞았다.

, 훨씬 좋아졌어. 미안해, 늦어서. 이런 날까지 아프다니…”

루에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자 벨로나가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소리야! 예쁜 공주님은 원래 늦는 거야.”

루에나가 겨우 미소를 보이자 세 사람은 다정하게 서로를 다독였다.

 

언니들과 달리 아스티나는 속이 조금씩 불편해졌다.

아침부터 단장하느라 기운이 빠져 있는데다 갑자기 쏟아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오늘의 약혼식은 두 젊은이의 결합이 아니라 두 왕국의 결합이었기 때문이다.

축하드립니다. 두 왕국의 앞날에 축복이 함께하길.”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밀려드는 귀족들의 인사에 아스티나는 흐트러지지 않으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통증을 참았다.
귀족들의 관심은 두 사람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금세 서로의 권력과 이해관계로 향했다.

 

아스티나는 제 곁에 서 있는 테오도르를 힐끗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금발에 맑은 에메랄드빛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과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
하지만 지나치게 다정하고 순한 그의 분위기는 이성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와 결혼하면 금발에 우리를 닮은 복숭아빛 아이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다 죽겠지...’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치자 아스티나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그는 위기에 처한 이 나라를 구해줄 구세주였다. 그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 만큼, 자신도 이 약혼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아스티나는 불현듯 약혼식이 결정되던 밤이 떠올랐다.

웬일로 에스카리엘 국왕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었다. 그녀가 어떤 투정을 부려도 웃는 낯으로 대하던 아버지의 얼굴은 깊은 밤보다 어둡고 무거웠다.

한참을 말이 없던 국왕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질 무렵 그는 서서히 말을 꺼냈다.

아스티나카르테시온과 약혼이 결정되었다.”

아스티나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막 성년식을 지나 잔뜩 들떠 있었는데 갑자기 약혼이라니

원래는 루에나와의 혼담을 진행하려고 했었는데카르테시온 왕자가 네 초상화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하는구나. 그쪽에서는 원하는 것이 너뿐이라
일이 이렇게 되어서내가 할 말이 없다.”

아바마마,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국왕의 눈빛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아스티나, 미안하지만이번만큼은 네가 왕국을 도와주어야 한다.”

늘 제 투정을 웃으며 받아주던 아버지가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날 아스티나는 처음으로, 자신에게도 거절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는 정신없이 흘러갔다.  
정신없이 휩쓸리다 보니 어느새 약혼식에서 웃으며 서 있는 자신이 보였다. 다시 속이 쓰려와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공주님, 잠시 쉬시겠습니까?”

테오도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침 휴식이 필요했던 아스티나는 그의 호의가 반가웠다.

 

 

**************************

달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정원에는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낭만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때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밤바람에 짙은 꽃향기가 실려 아스티나의 긴장감이 서서히 풀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귀 기울이던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스티나의 콧노래를 잠시 듣고 있던 테오도르가 조용히 웃었다.

저도 좋아하는 곡입니다. 한결 편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아스티나는 깜짝 놀랐다. 계속 긴장하며 버텨 왔는데 마지막에 긴장을 풀어버린 자신이 바보 같았다.

저도 모르게 그만 속으로 한다는 것이 소리를 내었네요. 죄송합니다.”

아스티나가 다시 긴장하자 테오도르는 마음이 바빠졌다.

괜한 말을 꺼냈군요. 죄송합니다.
공주님께서 저를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방금은 조금 편해지신 줄 알고 그만제 마음만 앞섰네요.”

그럴 리가요. 계속 자상하게 대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테오도르는 예의를 갖춘 그녀의 태도에 내심 서운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졌던 수많은 초상화 중 실수로 섞여 들어온 아스티나의 초상화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다. 국왕과 대신들의 우려가 있었지만 그가 강력하게 이 약혼을 밀어붙였다.

공주님께서 많이 당황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스티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정원으로 돌렸다.

제 욕심에 공주님께서 여기까지 오신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아스티나는 그의 침울한 표정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절대 이 혼사가 어그러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는 남편감으로 훌륭한 상대다. 자신이 거부할 이유 따위는 전혀 없다고 되뇌고 또 되뇌였다.

아닙니다. 저도 원했던 바입니다.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나게 되어다행입니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을 확인한 테오도르는 기분이 좋아졌다.

 

테오도르는 한 걸음 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아스티나는 그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숨기며 용기를 내었다.

그렇다면제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도괜찮을까요, 공주님?”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스티나는 커다란 눈망울만 반짝거렸다. 테오도르는 그 순진한 모습마저 귀여워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마음은 입맞춤을 하고 싶었지만 공주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쉰 뒤 공주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앞으로 공주님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조금씩이라도 저를 알아가 주세요.”

예상치 못한 그의 손키스에 아스티나의 두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도르는 사랑스러운 약혼녀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짧은 밤이 이토록 아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

밤이 깊어지자 손님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왕궁을 환하게 밝히던 빛도 점점 사그라들었다.

오늘만큼은 밤새도록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경비병의 넋두리에 또 다른 경비병이 다독였다.

조금만 참아. 자정이 넘어 성문이 닫히면 쉰다고 누가 알겠나.”

자정까지 기다려야 하나? 좀 더 일찍 닫고 우리도 한잔하면 어때?”

두 경비병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씩 웃었다. 그들은 주위를 살피고는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을 닫으려는 찰나.

어둠 속에서 검은 장갑을 낀 손들이 동시에 뻗어 나왔다.

“…!”

경비병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목이 꺾였다.

 

휘이익!

밤하늘을 가르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무리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눈가에 십자 흉터가 난 사내가 손짓하자 그들은 재빠르게 왕궁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곳곳에 폭탄을 설치하고 마주치는 경비병들을 처리하는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사내는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뒤 뒤를 돌아봤다.
로브를 깊게 눌러쓴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뜩였다.

 

그가 신호를 보내자 여러 개의 붉은 신호탄이 밤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콰아아앙——!!

왕궁 곳곳에서 폭발이 연이어 터졌다.

그날 밤, 에스카리엘 왕국은 멸망의 길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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