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끼이이익.
벨로나의 외침에 마차가 급하게 세워졌다.
“무슨 일인가요?”
앞서 달리던 카시안이 말을 돌려 마차로 다가왔다.
“디에나 언니 상태가 좋지 않아. 부대 내에 의사는 없나?”
카시안을 발견한 벨로나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의사 출신의 의무병이 있습니다.”
“그럼 그를 빨리 불러줘.”
카시안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이미 일정이 많이 지체된 상태였다. 공주들만 아니었으면 삼일 이상은 단축되었을 일정이다. 카시안은 마차 안을 흘끗 살폈다. 디에나의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큰 문제없이 이동해 왔다.
“조금 더 달리면 평원이 나오니…”
그 순간,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무슨 일이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마차 안 공기가 단번에 얼어붙었다.
벨로나와 루에나는 순간 몸이 굳어 버렸다.
며칠 동안 함께 이동했지만, 칼리스를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에게 그는 여전히 나라를 멸망시킨 괴물이었다.
칼리스를 발견한 아스티나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디에나 언니가 식은 땀이 너무 많이 나. 의무병을 불러줄 수 있을까?”
칼리스는 가만히 디에나를 살폈다.
땀을 많이 흘리고 있긴 했지만, 행군을 멈출 정도인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의무병을 마차로 부르겠다.”
“저…. 죄송하지만, 잠깐 쉬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디에나는 아픔을 참으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칼리스는 고집을 피우는 디에나가 이해되지 않았다. 칼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낀 디에나는 아스티나의 옷깃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아스티나는 디에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칼리스, 그늘에서 잠깐 쉴 수 있을까?”
칼리스는 순간 기분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거절하기 어려워졌다.
“… 그럼 잠시 쉬었다 가겠다.”
“주군, 한시가 급합니다.”
칼리스는 카시안을 향해 손을 들었다.
또 시작이군.
카시안은 아스티나에게만 지나치게 관대해지는 주군이 못마땅했지만, 한 번 더 말대꾸를 했다간 큰 일을 당할 것 같아 얌전히 물러났다.
“네, 알겠습니다. 전군, 여기서 반 시각 휴식을 취하고 출발하겠다.”
칼리스는 디에나의 창백한 얼굴을 다시 한번 훑었다.
“아서, 공주들이 쉴 조용한 곳을 빨리 준비해라. …그리고 잠시 실례하지.”
칼리스가 마차 문을 열고 성큼 성큼 들어왔다.
그가 내뿜는 서늘한 중압감에 벨로나와 루에나는 긴장했다.
칼리스는 디에나를 안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고, 그 뒤를 아스티나가 뒤따랐다.
“언니들은 쉬고 있어요. 제가 디에나 언니를 간호할게요.”
아스티나는 언니들이 칼리스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 간호를 자처했다.
급하게 마련된 공터에 디에나를 눕힌 칼리스는 자리를 뜨려다 근처에 있기로 했다. 나무에 기대어 숨을 돌리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스티나를 눈으로 쫓았다.
어젯밤 사건 이후, 칼리스와 아스티나는 서로를 대하기가 조심스럽고 부끄러웠다.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힐 때면, 서로 피하기 바빴다. 특히, 아스티나가 자신을 일부러 피하고 있다는 것을 칼리스는 알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어쩐지 서운했다.
그래서일까.
칼리스는 마차에서 자신과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불러주었던 것도, 디에나 간호를 자처하며 따라나선 것도 모두 반갑고 다행스러웠다.
그때였다.
웩…웩…
디에나가 갑자기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언니, 괜찮아?”
“의무병을 불러오겠다.”
“발레리온경!!! 저는… 괜찮습니다.”
“언니, 지금 너무 안 좋아 보여. 칼리스, 빨리 의무병을…”
디에나는 다급히 일어서려던 아스티나의 손목을 힘주어 잡았다.
그녀의 눈이 매섭게 빛나 아스티나는 흠칫 놀랐다.
“제발... 제발, 아스티나. 그가 의무병을 부르지 못하게 해 줘. 제발.”
“언니…”
칼리스는 디에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단순히 아픈 사람의 반응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절박했다.
디에나는 칼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절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면 진실을 토해내야만 할 것 같았다.
"왜 치료를 거부하지?"
“아스티나, 제발….”
디에나는 간절하게 아스티나를 붙들었고, 아스티나는 안절부절했다.
칼리스의 저 눈빛을 안다.
그가 저렇게 매서운 눈빛을 띄면, 아무리 당돌한 자신이라도 한마디도 할 수 없다.
아스티나는 아무 힘이 없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언니가 그저 야속했다.
“말하지 않겠다면, 할 수 없지.”
차갑게 돌아서는 칼리스를 보고, 디에나는 비통한 울음을 흘리며 뛰쳐나와 떨리는 손으로 칼리스의 망토를 붙잡았다.
“…부디.”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칼리스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의 냉정한 태도에 디에나는 결국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임신한 상태예요.”
아스티나도 칼리스도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칼리스는 불현듯 황제의 광기 어린 눈빛이 떠올라 한기가 들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무거운 공기가 디에나의 침통한 울음으로 침몰되고 있었다.
황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칼리스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비밀은 누군가를 반드시 죽게 만들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자가 또 있나?”
침묵을 깨고 칼리스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디에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디에나는 죽어가던 에드윈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칼리스는 아무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임신.
그 단어가 머릿속을 무겁게 울렸다.
황제가 공주들을 어떻게 이용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임신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디에나는 떨리는 손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핏기 없는 얼굴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잠시 침묵하던 칼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없는 거다.”
디에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공주는 장거리 이동으로 인한 탈진 상태다.”
“앞으로 조심해.”
칼리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두 번은 없을 테니까.”
디에나는 결국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 합니다….”
아스티나는 놀란 얼굴로 칼리스를 바라봤다.
칼리스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도 모르는 일이다. 이해했나?”
짧고 단호한 목소리.
아스티나는 천천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검은 망토가 바람에 무겁게 흔들렸다.
사람을 죽이는 데 익숙한 남자.
그런 그가 지금,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문득 떠올랐다.
차갑고 서늘한 말투와 달리,
잠깐 흔들렸던 그의 붉은 눈동자가.
*************************
고요한 달빛이 비치는 카르테시온 궁전.
시종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있는 테오도르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히 테이블에 간식을 올려 둔 시종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왕자님."
대답은 없었다.
"...에스카리엘의 잔당들이 전멸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이불이 거칠게 걷혔다.
"뭐라고?"
창백한 얼굴이 달빛에 드러났다.
"공주님은?"
시종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
"왕자님, 이제 잊으셔야 합니다."
시종은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린 왕자가 측은했다.
“왕자님부터 살고 보셔야죠. 계속 끼니도 거르셔서 폐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테오도르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간신히 삼키며 고개를 떨구었다.
차오르는 좌절감에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테오도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끝이 떨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이 울어버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포기하지 못해서일까?
"나는..."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
"내가 이렇게 무력한 사람인 줄 몰랐다."
시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하다니."
테오도르는 씁쓸하게 웃었다.
“왕자님, 그런 생각 마십시오. 제국이 너무 강한 것입니다. 지금은 황제의 욕심이 카르테시온에 미치지 않기를 바라셔야 합니다.”
시종은 테오도르를 달래주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시종이 떠난 뒤.
테오도르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초상화 하나를 꺼냈다.
혼담이 오갈 때 건네받은 초상화였다.
그 동안 수십번도 더 본 것이 오늘따라 유달리 애틋했다.
말갛게 미소 짓고 있는 아름다운 아스티나의 모습.
실물이 훨씬 예쁜데.
그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꿈만 같던 그 밤의 향기.
자신의 옷깃을 당기던 그녀의 수줍은 손짓.
열기에 젖어 있던 푸른 눈동자.
그리고 녹아버릴 것 같던 그 입술.
테오도르는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사할까?
아니면.
탐욕스러운 황제가 그녀를 망쳐버릴 것 같아 몸서리가 쳐졌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숨이 막혔다.
테오도르의 초록색 눈이 어둠에서 빛났다.
그는 초상화를 가슴에 품고 서둘러 짐을 챙겨 창문으로 나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황태자궁이 꽤 높은 위치라 위험해 보였지만, 나무를 옮겨 타면 가능할 것도 같다.
“큭….”
창문을 넘어 나무를 타고 내려오던 테오도르는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다. 다리를 긁혀 쓰라렸지만, 소리를 냈다가는 들킬 것 같아 꾹 참았다.
“왕자님.”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로웬이었다.
"로웬 경."
테오도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절 막으러 오셨습니까?"
로웬은 한동안 침묵했다.
"왕자님, 정말 가실 생각이십니까?"
"네."
테오도르는 망설이지 않았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테오도르는 거칠게 입술을 깨물었다.
"후회하는 건."
테오도르가 낮게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입니다."
로웬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결연하게 빛을 내는 녹색 눈동자를 보니 로웬은 만감이 교차했다.
그 수줍던 어린 왕자가 이만큼 자랐다니.
왕자가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지켜본 그에게, 지금 왕자의 모습은 생소하면서도 어쩐지 대견했다.
그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그가 무릎을 꿇었다.
"제가 왕자님을 모시겠습니다."
“로웬!”
“왕자님만 보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로웬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성문 밖에 이 상황을 지지하는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왕자님을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자신을 지지하는 기사단장의 따스한 눈빛에 가슴이 뭉클해진 테오도르는 가슴 속 초상화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끝-
'Novel > [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4화) 다가오는 폭풍 (0) | 2026.06.29 |
|---|---|
| 13화) 잠시 찾아온 평온 (0) | 2026.06.29 |
| 11화) 붉게 물든 두 사람 (0) | 2026.06.29 |
| 10화) 네가 자꾸 신경 쓰여 (0) | 2026.06.29 |
| 9화) 가까워지는 두 사람 (0) | 2026.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