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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14화) 다가오는 폭풍

by 매냐씨 2026. 6. 29.

 

아스델에 도착한 칼리스는, 하이데벨 마법사가 묵고 있는 여관부터 서둘러 향했다.

다행히 여관 주인은 그와 친분이 있던 자였다. 칼리스는 금화가 두둑히 든 주머니를 그에게 찔러주었다. 금화를 확인한 여관 주인은 세상에서 제일 인심 좋은 사람이 되었다.  

 

아스델에서 제일 유능한 의사가 누구지?”

제일이라면사거리에 있는 헨스입니다.”

입이 무거운 자인가?”

여관 주인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 자를 원하시면 3번 거리에 있는 그레고리의 진료소를 가보십시오. 그 자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칼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내가 돌아올 때까지 2층에 묵고 있는 안경 쓴 노인이 여관을 떠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나?”

여관 주인은 생글거리며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리가 원하시는 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그럼 부탁하지. 금방 다녀오겠다.”

 

칼리스는 여관 주인이 알려준 진료소로 곧장 향했다.

의사에게 디에나를 맡긴 그는 몇 마디를 덧붙여 상태를 세심히 살펴달라고 당부했다. 진료소를 나서기 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사람 하나를 남겨 두고는 서둘러 여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법사의 방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칼리스는 문을 두드렸다.

. .

방문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칼리스는 조급해졌다.

안에 있는 것을 안다. 들어가겠다.”

벌컥-!

작고 누추한 여관방 구석에 마법사가 탁자에 앉아 종이들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는 하던 일에 집중하느라 칼리스에게 관심이 없었다.

 

마법사를 확인한 칼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오랜만이군, 로드리스.”

칼리스는 마법사의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로드리스는 힐끗 그를 한번 쳐다볼 뿐 하던 일에 집중했다.

오랜 친구에게 안부인사라도 해주지?”

그제야 로드리스는 한숨을 쉬고는 칼리스를 쳐다봤다.

우리가 친구였나?”

칼리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어.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찾아왔다.”

 

로드리스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어서 물어보고 꺼져. 네 녀석이 나를 찾아왔다는 건 황제도 곧 알게 된다는 게 문제지.”

말을 하다 말고 로드리스는 갑자기 화가 나 보고 있던 종이들을 던져 버렸다.

제길, 할 일이 태산인데 네 녀석이 나타나서 엉망이 돼 버렸어.”

여전한 로드리스의 까칠함에 칼리스는 미소를 흘리다 이내 생각에 잠겼다.

궁금해 오던 것을 얼른 물어봐야 하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엉망인 말주변으로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상한 빛에 이끌려서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에 대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

칼리스가 간신히 고른 말에, 로드리스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 귀중한 시간에 연애 상담이나 하러 온 거냐?”

당황한 칼리스가 급히 말을 이었다.

그녀가 아무래도 내 반려인 것 같다.

그런데, 황제가 그녀를 원하고 있어. 아무래도 그녀가 신탁의 주인인 것 같다.”

로드리스는 그제야 진지하게 눈동자를 빛냈다.

무슨 신탁?”

에스카리엘의 귀한 여인이 영원한 삶을 약속하리라.”

그 신탁을 왜 황제가 신경 쓰는 거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던 로드리스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뭔가를 깨달은 듯 피식 웃었다.

 

메레디아! 그 마녀 짓이로군.

, 진작 죽였어야 했는데! 미친 것들끼리 웃기지도 않는군!”

로드리스는 살벌한 악담을 퍼붓다가 칼리스를 향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 신탁의 주인은 황제가 아니야.”

로드리스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조연에 불과하지.”

축하해, 칼리스. 드디어 네 반려를 찾았군. 그렇게 찾고 싶어 하던 행복을 손에 넣은 건가?"

 

칼리스는 로드리스에게서 위화감을 느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가?”

로드리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세상에 간단한 건 없지.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면, 용의 심장이 이미 작동을 시작했다는 뜻이야. 이제부터 잃어버린 심장이 올바른 곳으로 돌아가고자 할 거다.

붉게 물든 심장이 주인을 부르면 넌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해.”

 

칼리스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보이지 않는 올가미가 천천히 목을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어떤 선택을 요구하지?”

로드리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마법사일 뿐, 신이 아니야.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해.”

 

다만,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 ‘영생이라는 거대한 축복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내가 거부하면?”

네가 용족인 이상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야, 칼리스.”

로드리스는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마치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처럼.

"처음부터 네게 선택권 같은 건 없었지."

로드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다 끝내 입을 다물었다.

 

칼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혼란스러운 것들을 정리하고자 무리해서 로드리스를 찾았는데, 오히려 더 암흑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럼,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면?”

글쎄, 추천하고 싶은 선택지는 아닌데? 황제를 영원히 피해 다닐 수는 없을 거다.

그리고, 말했듯이 이미 심장은 반응하기 시작했어. 하루라도 빨리 심장을 찾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해.”

황제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이대로 제국으로 가는 것이 맞나?”

미간을 찌푸린 칼리스가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로드리스는 그런 칼리스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 , 그렇게 걱정된다면 네 피를 1온스 정도 먹여.”

네 피?”

그래, 용족의 피가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줄 거다.

물론 네 생명이 깎이는 일이지만, 곧 영생을 얻을텐데 그 정도쯤은 베풀 수 있잖아?”

로드리스는 피식 웃었다.

"절대 많이 먹이지 마. 용의 피는 약이면서 독이니까."

칼리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용건 끝났으면 꺼져. 나도 빨리 여길 떠야겠어.”

로드리스가 귀찮다는 듯이 칼리스를 문 쪽으로 밀었다.

 

못 이기는 척 밀려가던 칼리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걸음을 멈췄다. 칼리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뱉었다.

“…네가 모르는 것들을 혹시 하이데벨의 대마법사는 알고 있나?”

로드리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말간 얼굴로 고대의 마법들을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던 녀석.

스무살 앳된 청년의 얼굴로 이백년이나 살아온 징그러운 녀석.

다들 그를 추앙하고 고결하다 노래하지만, 로드리스는 어쩐지 그가 섬뜩해 멀리해 왔다.

 

나라면 절대 그를 찾지 않을 거다.”

로드리스는 진지한 얼굴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잠시 망설이던 로드리스는 칼리스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더니 그를 문 밖으로 밀어 버렸다.

친구,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잘가!”

-!!

억지로 문 밖으로 밀려 난 칼리스는 한 동안 멍하니 굳게 닫힌 문을 보고 서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온 것인데, 풀리지 않는 더 많은 수수께끼들만 잔뜩 안은 것 같았다.

깊은 한숨을 내쉰 칼리스는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

마을에서 복귀한 칼리스는 어수선한 부대 상황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얼른 말에서 내린 칼리스가 디에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디에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럽게 말에서 내렸다. 칼리스가 여전히 두려웠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가벼운 감사의 인사를 나누던 그때. 물에 젖은 카시안이 급하게 달려왔다.

 

주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지?”

카시안이 디에나의 눈치를 살피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 루에나 공주님께서 자살 시도를 하셨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카시안의 젖은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물방울은 공허한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인식조차 못하는 듯했다.

대체 언제부터 임무보다 다른 것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인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칼리스는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하필 자리를 비웠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디에나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카시안을 붙잡았다.

루에나가!!! 지금 상태는?!! 상태는 어떻죠?”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으십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디에나는 다급히 인사를 하고 공주들의 막사로 달려갔다.

 

디에나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카시안은 칼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미간을 찌푸린 칼리스는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카시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황제가 알고 있나?”

카시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워낙 긴급한 상황이라 조용히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칼리스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칼리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간자가 움직였겠군."

 

칼리스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카시안을 쏘아봤다.

카시안은 맡은 임무를 실패할 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칼리스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된 거지?”

카시안은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는 잘못을 인정했다.

변명은 없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칼리스는 카시안의 어깨를 힘껏 쥐고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처분은 고민해 보겠다. 아마도 곧 황제가 움직이겠지. 지금은 그때를 대비해야 해.”

, 주군.”

 

칼리스는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자 검은 구름이 하늘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치 숨이 막혔다.

폭풍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이미 시작된 것만 같았다.

 

 

**************************

-! -! -!

계단을 급하게 내려오는 빠른 걸음에 지하감옥 전체가 사납게 공명했다.

메레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황제가 화가 단단히 났구나.

 

!”

메레디아 앞에 선 황제는 거칠게 사슬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메레디아는 사슬에 쓸려 피를 흘렸다.

“…누가 내 것에 상처를 냈지?”

“…고귀하신 황제 폐하의 것을 어느 누가….”

메레디아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 황제를 달래 주었다.

 

황제는 더욱 거칠게 사슬을 잡아당겼다.

으으윽….”

네 년은 눈이 가려지면 세상 제일 바보가 되는구나.

누구겠어? 네가 그토록 아끼는 내 개가 한 짓이지.”

, 멍청하긴. 공주 하나 간수를 못해서 상처를 내?”

황제는 사슬을 던져 버리고는 무심하게 손을 털었다.

 

“…. 폐하, 노여워 마소서. 약간의 흠은 폐하의 염원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는 피투성이가 된 메레디아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메레디아는 칼리스에게 향했던 그의 분노가 자신에게 쏟아져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그런 메레디아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번뜩이는 그의 푸른 시선을 느끼고 메레디아는 오한이 들었다.

아니지, 아니지. 우리 마녀님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잘못을 한 내 개에게 벌을 줘야지.”

황제가 용의 심장 가까이에 다가갔다.

메레디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까지의 고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안돼!!! 멈추세요, 폐하!!!”

황제는 사슬을 손에 단단히 감아 쥐었다.

철그럭.

다이아몬드 심장을 옭아맨 금빛 사슬이 조여 들며 심장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부서지진 않는 군.”

사슬을 쥔 손에 힘을 잔뜩 준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죽을 만큼 아프겠지.”

황제는 너무 즐거워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아아악! 안돼!!!”

메레디아는 사슬을 끊어버릴 것처럼 발버둥치며 황제를 막으려 했다.

그럴수록 사슬은 그녀를 더욱 조여, 피가 멈추지 않았다.

하하하, 너무 아쉬워. 칼리스가 내 눈 앞에서 뒹구는 걸 보고 싶었는데!”

황제는 그녀의 비명에 아랑곳 않고 심장의 사슬을 계속 잡아당겼다.

메레디아의 절규와 황제의 웃음소리가 지하감옥 안을 뒤엉켜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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