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리스는 욕조에 누워 하루종일 심란했던 마음을 다스렸다.
자꾸만 흐트러지는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본 빛이 무엇인지도 알아내야 했다.
하이데벨에 전령을 보냈으니 곧 연락이 올 것이다.
그때, 막사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카시안이 옷을 가지고 들어온 것 같았다.
칼리스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병풍으로 갔다. 수건을 찾느라 주위를 둘러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서의 부재가 이럴 때 티가 난다.
하지만, 칼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바닥이 젖는 것은 싫지만, 가운을 얼른 입으면 될 일이다.
병풍을 걷던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노을빛을 머금고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수증기 너머로 아스티나가 보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이 굳어 버렸다.
"...!"
"...!!"
아스티나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물기를 머금은 채 젖은 검은 머리카락.
단단한 육체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들.
그리고 그 아래로 드러난 맨몸.
넓은 어깨와 곧게 뻗은 팔다리.
오랜 세월 검과 전장을 견뎌낸 육체는 조각가가 정성껏 빚어낸 대리석상 같았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칼리스 역시 붉은 눈동자를 빛낼 뿐 움직이지 못했다.
"…공주는!!! 노크할 줄도 모르나!!"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그였다.
칼리스는 재빨리 옆에 걸쳐 두었던 가운을 낚아채 몸에 두르고 뒤돌아섰다.
그제서야 아스티나도 당황스러움에 온 몸이 불타는 것만 같았다.
“무….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나… 난… 허락을 구하고 들어왔어.”
“못 들은 네가 잘못한 거 아냐?!”
아스티나는 정곡을 찔린 듯 허둥거렸다.
칼리스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급하게 포도주를 들이켰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씁쓸한 포도주의 기운이 온 몸에 퍼지자, 그제서야 칼리스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스티나를 흘깃 쳐다보니, 붉게 물든 얼굴로 잔뜩 긴장한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애써 가라앉혔던 심장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지?”
칼리스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그제야 아스티나는 품에 안고 있던 옷을 내밀었다.
"새 옷 가져왔어."
“왜 공주가 가져왔지?”
아스티나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시안이… 내가 할 일이라고 했어.”
칼리스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칼리스는 공주가 나가는 대로 카시안을 혼쭐내야 겠다고 다짐했다.
어떻게든 아스티나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대가든 뭐든 다 집어치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칼리스가 천천히 아스티나에게 다가왔다.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신의 두근거림이 들킬까 눈은 여전히 바닥을 향했다.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칼리스는 걸음을 잠시 주저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붉게 물들어가는 그녀의 목덜미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미세한 떨림도 고스란히 그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이대로 등을 돌려버리면 될 일인데.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딛었다. 심장이 다시 정신없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칼리스가 아스티나의 손에서 옷을 받아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살짝 스치자 아스티나는 아찔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고맙군.”
칼리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다정한 감사 인사에 아스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느리게 그녀를 훑었다.
그 시선에 닿는 순간 아스티나는 이유도 모른 채 숨을 삼켰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마음까지 들켜 버릴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한참을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 두 사람은 서로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칼리스의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코를 타고 붉은 입술에 머물렀다.
그는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붉게 물든 꽃송이 같은 작은 귀가 보였다.
칼리스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칼리스의 커다란 손 끝이 아스티나의 귀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그는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귀가 빨갛군."
아스티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스티나는 두 손으로 귀를 잡고는 다급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더…더워서 그런 거야!”
칼리스는 열기가 남은 손끝을 매만지다 천천히 거두었다.
“포도주라도 한 잔 줄까?”
아스티나는 더 이상 이 곳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주책없이 요란스러운 자신의 마음을 그가 알게될까 두려웠다.
“…아니, 할 일 끝났으니 난 이만 갈게.”
그녀는 미련없이 뒤돌았다.
그때였다.
꼬르르륵….
주책없이 배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아스티나는 너무 치욕스러워 도망가고 싶었다.
칼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으려 입을 틀어 막았다.
“나… 나 갈래!”
칼리스는 급하게 뛰쳐나가려는 공주를 불러 세웠다.
“탁자 위에 간식이 있어. 먹고 가.”
“싫어!!”
꼬르륵.
다시 울리는 소리에, 아스티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공주의 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데?”
“날 놀리는 거야?!!”
아스티나는 부끄러움에 괜히 그에게 화를 냈다.
“놀리는 거 아니야.”
칼리스는 눈을 활처럼 휘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또, 저 얼굴이다.
아스티나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볼 때마다, 순식간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럼, 내가 옷을 갈아입을 동안만 기다려.”
아스티나는 머뭇거리기만 할 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칼리스가 성큼 다가왔다.
“언제까지 서 있을거지?”
주저하는 그녀의 모습에 칼리스가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놀란 아스티나가 힘을 주어 빠져나가려 애썼다.
칼리스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명령이야.”
그의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부탁에 아스티나는 결국 힘을 풀었다.
그녀는 마지못하는 척 그를 따랐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스티나가 얌전히 의자에 앉자 칼리스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고 옷을 갈아입으러 병풍 뒤로 갔다.
빵을 한 입 베어 문 아스티나는 자꾸만 병풍으로 가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꾸 남자의 실루엣을 쫓는 시선을 멈추기 힘들었다.
왜 이렇게 옷을 느리게 입는 거야.
투덜거리면서도 아스티나는 빵을 천천히 씹었다.
입 안은 달콤했지만 정신은 하나도 달지 않았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건 칼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아스티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병풍 뒤로 은은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에 몸이 자꾸 달아올랐다.
옷을 갈아입는 것이 이렇게 긴장되는 일이었나?
자신이 사춘기 소년이 된 것만 같아 우스웠다.
황금빛 노을이 스며든 막사 안은, 두 사람의 혼란스러운 감정처럼 천천히 붉게 물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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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스 부대는 이른 아침부터 출발을 서둘렀다.
공주들도 아서가 준비해 온 마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칼리스는 아스티나가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에 올랐다.
어젯밤 제대로 잠들지 못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녀에게 끌리고 있다.
그녀에게서 도망치지 않는 한, 이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를 사랑하는 건가?
칼리스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여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것도,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것도 처음이다.
아직 이 마음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문득 용족에 대한 전설이 기억났다.
용족은 평생 단 한 명의 반려만 사랑한다는 전설.
그녀가 나의 반려인 걸까?
그럼 황제를 어떻게 해야하지?
이대로 제국으로 그녀를 데려가는 것이 맞나?
칼리스는 의문투성이인 생각들을 제대로 수습도 못한 채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아스티나는 마차의 커튼을 젖히고 앞서 달리는 칼리스를 몰래 흘깃거렸다.
어젯밤 그녀가 마주했던 남자의 모습이 도무지 잊히지 않아 잠을 설쳤다.
노을빛 속에 서 있던 검은 머리카락.
물기를 머금은 붉은 눈동자.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뜨거운 시선.
아스티나는 입 속이 마르는 것 같아 급하게 침을 삼켰다.
“콜록… 콜록!!”
그때, 디에나가 목이 터질 것 같이 기침을 했다. 공주들은 다급하게 언니를 살폈다.
“언니, 괜찮아?”
디에나의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언니, 정신차려!!”
“…나 …나 배가 너무 아파….”
디에나의 말에 놀란 공주들은 허둥지둥 했다. 그때, 벨로나가 다급하게 마차를 세웠다.
“마차를 세워. 빨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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