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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10화) 네가 자꾸 신경 쓰여

by 매냐씨 2026. 6. 29.

 

공주님,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실 수 있죠?”

카시안은 벨로나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루에나에게 말했다.

“… . 이만 내릴게.”

그의 팔에 실린 힘이 풀리는 것을 느낀 루에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 이리와서 공주님을 모셔가.”

카시안은 근처에 있던 병사에게 루에나를 맡기고 곧장 벨로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물에 들어서자마자 벨로나는 금세 후회했다.

생각보다 계곡물은 차가웠고 바닥은 미끄러웠다.

지금이라도 도움을 받아야 하나.

슬쩍 뒤를 돌아본 벨로나는 자신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는 많은 눈들에 자존심이 상했다.

.

네깟 놈들 도움 따위 필요 없어.

 

처음에는 요령이 없어 몇 번이나 휘청였지만, 걷다 보니 조금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어느새 계곡 한가운데까지 도착한 벨로나는 은근한 자신감까지 붙었다. 조심해서 걷기만 하면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한쪽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놀란 벨로나는 중심을 잃고 크게 휘청였다.

 

!!”

몸이 물속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벨로나의 시야가 갑자기 높아졌다.

카시안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대로 안아 올린 것이다.

 

꺄악! 뭐 하는 거야!”

조용히 좀 하십시오!”

카시안이 험악한 얼굴로 벨로나를 노려봤다. 벨로나는 순간 기가 눌려 입을 다물었다.

죽고 싶어 환장하셨습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가 날카롭게 이어졌다.

어찌 그리 무모하십니까.”

카시안의 꾸중에 벨로나는 발끈했다.

! 아주 잔소리를 퍼부어라!”

잔소리가 아니라 직언입니다.”

카시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런 것도 구분하지 못하십니까?”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태도에 벨로나는 더욱 화가 났다.

그녀는 영특하고 영민한 공주라 칭송받으며 자랐다. 왕궁에서 감히 그녀를 깔보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 내릴래! 내려줘!”

벨로나가 버둥거리자 카시안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결국 그는 벨로나의 팔을 거칠게 끌어 자신의 목에 둘러 놓았다. 그리고 그녀를 받치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단단한 압박에 벨로나의 몸이 순간 굳었다.

 

이제 그만하시죠.”

회색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가 배어 있었다.

벨로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그를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는 것을.

늘 칼리스의 뒤에 가려져 있었을 뿐.

이 남자 역시 수많은 전장을 살아남은 제국의 괴물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낯선 긴장감이 흘렀다.

 

얌전해진 벨로나를 확인한 카시안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계곡물을 가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벨로나는 그의 품이 불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정감이 느껴졌다. 서로 모순된 감정이 뒤섞여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카시안이 벨로나를 조금 더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놀란 벨로나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뭐야!”

가만히 좀 계십시오.”

카시안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물살이 셉니다.”

그제야 벨로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바깥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민망해진 벨로나는 시선을 피했다.

 

다리에 닿는 차가운 물의 온도와는 달리 카시안의 품은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옷 위로 전해지는 단단한 근육.

넓은 어깨.

그리고 서늘하고 시원한 이 남자의 체취.

 

벨로나는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가만히 계십시오."

"?"

"무겁습니다."

카시안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벨로나는 민망함에 입술을 샐쭉거렸다.

"?!"

"농담입니다."

 

그러자 카시안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지금 비웃은 거야?”

안 웃었습니다.”

벨로나는 눈을 흘깃거리며 그를 쏘아봤다.

분명 웃었는데.”

착각하신 거겠죠.”

 

벨로나는 괜히 심술이 나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 때문인지 그의 회색 눈동자가 생각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였다.

늘 무표정하고 재미없는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반듯하고 정갈한 이목구비였다.

눈 밑의 십자 상처만 아니었다면, 어느 가문의 공자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카시안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깜짝 놀란 벨로나는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카시안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벨로나를 내려다봤다.

늘 눈을 치켜뜨고 달려들던 여자였다.

그런데 저런 표정도 짓는군.

이상하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카시안은 애써 입꼬리를 누른 채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

간신히 노던 숲을 통과한 제국군은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칼리스는 종자를 시켜 근처 마을에서 마차를 한 대 구해 오도록 했다.

며칠 동안 이어진 강행군에 공주들의 체력은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 디에나는 감기에 걸려 앓아누웠고, 다른 공주들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칼리스는 내일도 하루 종일 아스티나와 말을 함께 타고 이동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녀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리스는 막사로 향하던 중 카시안과 마주쳤다.

카시안은 아픈 공주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카시안, 새 옷을 챙겨 내 막사로 가져와.”

? 아서는요?”

마차를 구하러 마을로 보냈다.”

순간 칼리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말 대꾸 좀 그만하고 하라면 그냥 해!”

. .”

카시안은 칼리스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사라졌다.

 

귀염성 없는 녀석.

십여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사나운 들개 같았다. 입만 열면 독설을 쏟아냈고, 걸핏하면 검부터 뽑아 들었다.

이제는 사람 구실을 하게 된 셈인가?

물론 여전히 재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칼리스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투덜거리며 걷던 카시안은 공주들의 막사 밖에 홀로 서 있는 아스티나를 발견했다.

공주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 벨로나 언니가 감기 옮는다고 나가 있으래.”

카시안은 순간 미간을 움찔했다.

본인 몸도 성치 않은 주제에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는 벨로나나, 그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있는 아스티나나 이해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럼 잘됐군요.”

?”

이거나 주군 처소에 가져다 두십시오.”

카시안은 들고 있던 옷가지를 아스티나에게 내밀었다.

?”

아스티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공주님께서 주군의 시중을 들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스티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건 반칙 아닌가.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결국 옷을 홱 낚아챘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씩씩거리며 대답한 아스티나는 옷을 품에 안고 칼리스의 막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

..”

아스티나는 헛기침을 크게 여러 번 했지만, 막사 안은 고요했다.

옷을 가져왔어.”

한참 동안 그의 허락을 기다렸지만 응답은 없었다.

말을 돌보고 있나?

오히려 그와 마주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들어갈게.”

아스티나는 조심스럽게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오렌지빛 노을이 장막 사이로 길게 스며들어 막사 안을 물들이고 있었다.

넓지 않은 공간에는 침상과 탁자, 무기 몇 점만 놓여 있었지만 흐트러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살풍경할 만큼 정돈된 모습은 이곳의 주인이 얼마나 절제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찰랑….

적막을 깨고 물결이 부드럽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티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희미한 수증기와 따뜻한 열기가 공기 사이에 번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뜻한 물기 어린 공기가 피부를 스치자 아스티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찰랑….

다시 한번 물결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아스티나의 시선이 막사 안쪽으로 향했다.

 

촤악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와 함께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처벅…. 처벅….

누군가 물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비단 병풍 너머로 남자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비쳤다.

 

노을빛에 물든 그림자는 오래된 서사시 속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넓은 어깨와 곧게 뻗은 몸선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단단하게 다져진 육체를 따라 흘러내린 물방울은 노을빛을 머금고 부서지는 빛처럼 반짝였다.

 

따스한 주홍빛 노을과 희미한 수증기가 뒤섞인 탓일까.

현실이라기보다는 꿈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녀를 공포에 떨게 했던 붉은 눈의 괴물.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지독하게 아름답게만 보이는 걸까.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스티나는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일부러 훔쳐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을 엿본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순간,

검은 병풍이 천천히 옆으로 젖혀졌다.

그리고 물기를 머금은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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