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에는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이름이 존재했다.
아르세리온 황실. 그리고 그 황실의 검이라 불리는 발드라이크.
발드라이크는 태초부터 황실을 지켜온 늑대의 후예였다.
타고난 강인한 육체와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운 그들의 권위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전쟁은 언제나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승리는 항상 발드라이크의 것이었다.
태초에 맺은 맹약으로 발드라이크는 절대적인 무력을 얻는 대신, 황실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제국의 번영이 그들의 힘 위에 세워졌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파른 아론 산맥을 등진 청회색 거성은 마치 산맥의 일부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십 리 밖에서도 그 위용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거대했고, 햇빛을 머금은 성벽은 보는 각도마다 청회색과 은빛을 오가며 세월이 빚어낸 위엄을 드러냈다.
거대한 성문이 천천히 열리자 말발굽 소리가 성내에 울려 퍼졌다.
선두에 서 있던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말에서 내렸다. 그의 손끝에서는 아직 식지 않은 선홍빛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단단하고 두터운 목을 따라 선명하게 드러난 늑대 문신은 그가 발드라이크의 후계자임을 단번에 알아보게 했다. 라일은 날카로운 눈매를 번뜩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정문에서 마른 체형의 금발 여인이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이네트는 라일을 발견하고는 잔뜩 긴장한 채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며 말했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이네트의 눈길은 곧장 피가 흐르는 사내의 손끝에 머물렀다. 흠칫 긴장한 여인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사… 사냥이 재미없으셨나요?”
라일은 거침없이 피가 묻은 손으로 이네트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아악!”
“요즘 살 만해졌나 보지? 남편을 기다리게 하다니. 오랜만에 버릇을 들여야 하나?”
공포에 질린 이네트의 시선 너머로 고고한 자태의 공작부인이 보였다.
“라일, 그쯤 해두거라.”
공작부인의 검은 눈동자에는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이네트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고개를 떨구었다.
라일은 가벼운 인사로 공작부인을 맞았다. 공작부인은 이네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라일을 챙기며 말을 이었다.
“서둘러 수도로 가야겠다. 일주일 뒤에 대공 승작이 있을게다.”
공작부인의 말에 라일은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드디어 해내셨군요. 이제 발드라이크가 명실상부한 제국 최고가 되었습니다.”
알렌시아의 싸늘한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얼른 서둘러. 늦으면 승작 연회에 이안이 서 있게 될게다.”
공작부인의 입에서 ‘이안’의 이름이 불리자, 라일의 목에 핏줄이 곤두섰다.
“하, 그건 절대 안되죠. 내가 여기서 썩어가는 동안 그 자식이 공을 세우더니.
대공자 자리까지 넘보게 할 수는 없지요.”
라일의 눈동자가 적의로 번들거렸다. 이네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가 성을 비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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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밤을 샌 탓에 헤스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앞쪽 협곡의 다리가 무너졌습니다."
놀란 에르반이 창문 가까이 다가왔다.
"무너졌다고요?"
"예. 현재 원인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끊어놓은 것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리가 무너지다니… 이게 무슨 일인지…”
에르반이 낮게 중얼거렸다.
“크게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행원들 대부분이 저와 함께 오랫동안 합을 맞춘 자들입니다. 다만…”
이안은 헤스티아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밤 근처 럼벨 백작의 타운하우스에서 묵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헤스티아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 노숙해 본 적 있습니다.”
“그럴리 가요. 영애가 노숙할 일이…”
이안의 황당해하는 눈빛을 읽은 헤스티아가 수줍어하며 말했다.
“아, 확실히 이상해 보이겠네요. 전 다른 귀족 영애들과는 처지가 좀 달라서요. 영지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제가 나서야 했습니다. 잘 곳이 변변치 않아 들판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
이안은 잠시 말을 잃었다.
브렌하임의 사정을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영애가 직접 들판에서 밤을 지새웠다는 이야기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하하하, 영애는 참으로 재밌는 분이시군요.”
에르반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 헤스티아는 에르반의 진심을 구별하기 어려워 화제를 돌렸다.
“그럼 제가 불을 피울까요?”
그녀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행원이 여럿입니다. 영애께서 나서서 하실 일은 없습니다.”
그의 단호한 말에 헤스티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렇군요.”
그 표정을 보니 어쩐지 미안해진 이안은 얼른 자리를 떴다.
이안과 부하들은 서둘러 야영지를 탐색한 다음, 주위를 꼼꼼하게 살폈다.
“부대장님, 주변에 별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순찰을 나갔던 홀던과 라그리스가 이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끊어진 부분을 살펴보니 예사 솜씨가 아닙니다.”
홀던의 말에 이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감히 황제의 전령을 공격하려는 간 큰 자가 누구일까. 황권 경쟁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자신을 죽이려 호시탐탐 노리는 라일일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했다.
밤이 깊어졌지만, 숲속에는 정막만이 감돌았다.
이안은 모닥불 근처에 거대한 백곰털을 곱게 다듬은 모피를 깔았다. 낮에 어색하게 미소 짓던 헤스티아가 생각나 잠자리에 더욱 신경을 썼다. 모피는 혹시나 해서 챙겨온 것인데 이럴 때 도움이 되다니 다행이었다.
“와!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개를 돌리니 헤스티아가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발드라이크에는 이렇게 큰 백곰이 있나 봅니다.”
“아, 이건 발드라이크의 것이 아니라 2년 전 간둘라 설산에서 벌였던 전투 중에 잡은 것입니다. 모질이 훌륭한 녀석으로 두 마리를 사냥해, 하나는 황실에 진상했고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안의 손길이 닿는 대로 윤기가 반짝거렸다. 헤스티아는 처음 보는 귀중품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밤이슬도 차고 바닥도 불편할 테니 영애가 여기서 주무십시오.”
귀한 것을 들판에 깔아둔 것도 모자라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얘기에 헤스티아는 어쩐지 죄송스러웠다.
“아, 이렇게 귀한 것을 어떻게 제가… 소공자님이나 에르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이 맞을 듯싶습니다.”
이안은 헤스티아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의 진지하고 또렷한 눈빛에 헤스티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닙니다, 영애. 앞으로는 귀한 것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황궁은 상상하시는 이상으로 치열한 곳입니다. 절대 자신을 낮추지 마십시오. 아무도 영애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헤스티아는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이안은 의도치 않게 헤스티아의 기를 여러 번 죽인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쓰였다.
“뭐, 영애를 지켜보니 순순히 당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헤스티아는 이안의 농담에 기운을 차렸는지 다시 눈을 반짝였다.
“그런가요? 소공자께서 보시기에 잘 적응할 것 같습니까?”
“네, 뭐. 예법만 제대로 익히신다면 기가 눌리거나 하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예법이요? …그것도 문제네요.”
헤스티아의 어깨가 다시 축 처졌다. 어린 나이에 가주 노릇을 떠맡느라 제대로 예절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거라면 자신 있었지만, 황궁에서도 그게 통할 리는 없었다.
“모두들 영애에게 황가의 예법을 요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뤼네 발현자라는 사실이 중요하니까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게요.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래도 무시당하고 싶지는 않네요.”
헤스티아는 아쉬운 눈빛을 띄며 이안을 쳐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공자님을 제 스승으로 모셔야겠습니다! 황궁 도착 전까지 저를 제국 최고의 영애로 만들어 주세요.”
이안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헤스티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 스승님!”
헤스티아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자, 이안은 순간 숨을 멈췄다.
은은한 꽃내음이 밀어 닥치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저기 영애,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던 헤스티아가 문득 코끝을 스치는 익숙한 향기에 멈칫했다. 이안에게서 그날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었던 향기가 느껴졌다.
“이 쌉싸름한 박하향은 무엇인가요? 수도에서 유행하는 향수인가요?”
이안은 자신의 소매 주위에 코를 가져다 대고는 냄새를 맡았다. 조금 전에 홀던과 연초를 피웠던 것이 생각났다.
“아, 제가 피우는 연초 향인 것 같습니다.”
헤스티아가 다시 한번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폐부가 시원하고 상쾌해졌다.
“연초 향은 매캐하고 역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공자님의 것은 아주 향이 좋습니다.”
이안은 품 안에서 고급 케이스를 열어 보였다. 케이스 안에는 연초 여러 개가 꽂혀 있었다.
“제가 직접 만들어서 피는 것입니다. 생각이 많을 때나 머리가 아플 때 곧잘 피긴 하는데… 냄새가 좋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헤스티아는 연초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양새가 그와 닮아 있었다. 연초에서 은은하게 향기가 피어나 헤스티아는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았다.
“이런 향수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눈으로 좇았다.
밤바람에 흐트러진 헤스티아의 머리카락이 그의 손등을 살며시 간지럽혔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향했다. 모닥불에 비친 그녀의 옆얼굴이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헤스티아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눈가에 짙은 그늘을 드리워 아련하게 보였다. 매혹적인 눈매를 따라 이안의 시선도 움직였다. 이윽고 속눈썹이 천천히 들리자 밝은 초록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불빛을 머금은 서로의 눈동자에 붙들린 듯, 두 사람은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뜨겁고 간질거렸지만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그때였다.
이안은 날카로운 살기를 등 뒤에서 느꼈다.
슈웅-!
“숙이십시오!”
이안은 헤스티아를 끌어안듯 몸을 숙였다. 간발의 차로 날아오던 화살이 그의 머리카락 끝을 스치며 뒤편 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기습이다! 모두 위치로!!”
이안의 날카로운 외침과 동시에 하늘에서 수십 개의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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