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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연재] 타오르는 달빛은 멈추지 않는다

8화) 브렌하임을 떠나며

by 매냐씨 2026. 8. 26.

헤스티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르반님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녀는 한 번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처음엔 찌릿한 통증이 있었지만, 이내 기분 좋은 기운이 퍼져 나갔습니다. 무엇보다 에르반님과의 마력 충돌로 몸을 휘감았던 냉기가 걷히고 온기가 스며들었습니다.”

 

에르반의 회색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였다.

그게 정말입니까? 어쩐지반응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습니다. 공자님께서도 같은 의견이십니까?”

이안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설명하기 힘든 죄책감에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의 손끝에는 아직도 공명의 여운이 희미하게 맴돌고 있었다.

좋은 기운.

헤스티아는 그렇게 표현했지만, 이안이 느낀 것은 단순히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부족했던 마지막 조각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어긋나 있던 몸과 마음이 하나둘 맞물리며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손끝에서 그 기운이 흩어질수록, 설명할 수 없는 아쉬움이 가슴 한편에 번져 갔다.

 

으흠좀 더 연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에 잠긴 에르반이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에르반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게 서둘러 출발해야겠어.’

이안은 어수선한 생각을 제대로 정리도 못한 채,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함께 온 일행들에게 짧게 명령을 내리고 헤스티아에게도 출발 준비를 서두르라 일렀다.

 

이안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에르반은 생각에 잠겼다.
군림하는 자의 품위와 여유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모습이었다. 제아무리 발드라이크의 핏줄이라지만, 한낱 서자에게서 저런 분위기가 풍길 수 있을까.

이안의 친모가 평민이 아니라 황족이라는 풍문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뤼네와의 공명도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크러서스와 정을 통했을 만한 황족이 떠오르지 않았다.

 

에르반은 이안을 찬찬히 살폈다.

성년식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기억을 억지로 지워 놓은 것처럼 생각하면 할수록 짙은 안개 속으로 숨어버렸다.

수도로 복귀하면 어떻게든 기억을 살려봐야겠어.’

에르반은 어쩐지 흐려진 기억이 뤼네 반응의 실마리가 될 것 같았다.

 

준비 상황을 마지막까지 확인한 이안은 가벼운 의복으로 환복하기 위해 하녀의 안내를 받아 빈방으로 이동했다. 그는 일부러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뤼네와 공명하던 때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기운을 다시 느껴볼 수 있을까…’

이안은 불현듯 든 생각에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공자님!”

그때, 계단을 내려오던 헤스티아와 마주쳐 이안은 괜히 민망해졌다. 헤스티아의 뒤로 하녀가 커다란 여행가방을 가지고 내려오고 있었다.

 

준비는 다 끝나셨습니까?”

방금 오라버니와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안은 그제서야 헤스티아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평생을 브렌하임에서 나고 자란 그녀에게 헤어질 시간을 넉넉히 줬어야 하나…’

이안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자 헤스티아는 얼른 분위기를 전환했다.

에르반님께서 주신 약이 효과가 대단하더군요. 최근에 오라버니께서 쉽게 잠들지 못하셨었는데 저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금세 잠드셨답니다.”

 

이안은 응접실에서의 일이 생각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까의 일은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에르반님께서 제멋대로 행동하긴 하시지만 이번만큼은 지나치셨습니다.”

잠시 멈칫하던 헤스티아가 두 볼을 붉히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도 사죄드리겠습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그만 공자님께 실수했습니다.”

 

이안은 제 품에 안겨 들어 체취를 들이마시던 헤스티아를 떠올렸다. 순식간에 목덜미가 붉어진 이안은 연신 헛기침을 했다.

흠흠, 괜찮습니다. 영애께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 공자님이 없으셨다면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공자님 덕분에 빨리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안의 어깨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그의 눈이 가늘게 휘어지더니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헤스티아는 그의 환한 얼굴을 어쩐지 제대로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는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어디를 급하게 가시던 길이셨나요?”

, 가벼운 옷으로 환복하고 출발하려 합니다. 도무지 이런 옷은 익숙하지 않아서…”

이안이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봐도 영락없는 귀공자의 모습인데, 정작 그런 차림을 불편해하는 것이 헤스티아는 신기했다. 두 사람은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멀어지는 이안의 뒷모습을 보며 헤스티아는 차가웠던 첫인상과는 달리 그가 따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환복을 마치고 옷 매무새를 만지던 이안은 소란스러운 기척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저택 앞에는 헤스티아와 집사 베른, 그리고 처음 보는 사내가 서 있었다. 40대 중후반의 건장한 사내는 뱀을 닮은 매서운 눈으로 헤스티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웬 소란입니까?”

이안이 다가오는 것을 본 헤스티아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사내는 이안을 아래위로 훑으며 거칠게 말했다.

상관없는 사람은 신경 끄시오.”

베른이 이안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콜커스 상단주인 아서 콜커스입니다.”

 

이안은 콜커스 상단과의 계약서를 떠올렸다.
교묘한 말장난과 세심하게 부풀린 숫자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하, 그 콜커스 상단주로군. 난 이안 발드라이크라고 하네.”

곧 대공으로 승작된다는 소문이 무성한 바로 그 발드라이크라는 사실에 아서는 몸을 갑자기 낮췄다.

아니, 이런 귀하신 분이 여기까지! 제가 다른 날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실수했습니다.”

헤스티아는 거침없이 굴던 사내가 이안의 신분을 알아보자마자 바짝 엎드린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방문한 건가? 밀린 대금은 정산했을 텐데.”

이안이 헤스티아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 미수금은 모두 정산받았습니다.
그런데저희 쪽 손해도 만만치 않아서 배상금을 추가로 지불해 주셔야…”

그 얘기는 그만 하시죠! 배상금은 처음 들어보는 것입니다. 잠자코 있다 왜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는 겁니까?”

낮게 울리는 헤스티아의 음성에는 짙은 분노가 깔려 있었다.

아직 영애가 업무에 서툴러서 모르시나 본데, 계약서 하단에 이렇게 명백히…”

 

이안은 아서의 말을 채 듣지 않고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계약서를 끝까지 읽은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서를 바라봤다. 아서는 그의 서늘한 시선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거지 같은 것을 계약서라고 내미는 것인가?
1
1항과 3 5항이 명백히 서로 반대되고, 이 이자 비율도 전혀 맞지 않다니.
이러고도 상단주라고 말할 수 있나?”

이안의 당당한 기운에 눌린 아서가 말을 더듬었다.

어허... 그럴리가…”

내가 지금 거짓을 말한다면 발드라이크로 정식 항의를 보내도 좋다. 다만 나를 속이려 한거라면…”

이안이 아서 가까이 다가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야.”

 

아서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 꺼져.”

이안이 아서를 거칠게 밀어냈다.

 

그 순간,
아서의 품에서 돌돌 말린 고급 양피지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안의 시선이 양피지에 멈췄다. 일개 상단주가 지니기엔 고급품이라 얼핏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이건 뭐지?”

주저 없이 양피지를 펼쳐 본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 가지가지 하는군.”

양피지는 아서 콜커스가 헤스티아에게 보내는 청혼서였다.

이안의 갈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우드득.

그는 그대로 아서의 팔을 꺾어 부러뜨렸다.

으아악!”

아서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안은 가슴에서 수표책을 꺼내 대충 휘갈겨 쓴 뒤 아서에게 던졌다.

이 정도면 치료비도 네 녀석이 원하는 배상금도 충분할 것이다.”

반박하려던 아서는 이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말을 끝내 삼켜야 했다.

 

헤스티아 영애는 황자비가 되실 귀한 분이시다.

한 번만 더 눈에 띈다면... 네 목숨은 물론, 콜커스라는 이름도 제국에서 사라질 것이다.”

아서는 입술을 깨문 채 수표를 들고 서둘러 사라졌다.

이안은 뒤늦게 자신이 다소 거칠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르반에게 쏠렸던 분노가 채 가라앉지 않은 탓이었다. 그는 슬쩍 헤스티아의 눈치를 살폈다.

 

하하하.”

헤스티아는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이안은 어안이 벙벙하여 그녀를 쳐다봤다.

, 속 시원해. 영지를 떠나기 전에 한 방 먹여주고 싶었는데.”

헤스티아는 순간 자신이 속마음을 여실히 뱉었다는 사실에 놀라 얼른 입을 막았다.
이안의 눈치를 살피며 헤스티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너무 예의 없이 말했지요?”

이안은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괜찮습니다, 영애. 이해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헤스티아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황궁에서는 조심하겠습니다.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흠 잡힐 수는 없으니…”

 

제가 다소 거칠게 대응한 것 같아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이안의 말에 헤스티아의 눈동자가 밝은 초록빛으로 일렁거렸다.

소공자님, 방금 정말 대단하셨던 것 아시나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위엄이 넘쳤습니다. 제가 사내였다면 분명 소공자님이 이끄는 부대에 입대했을 겁니다.”

이안은 그녀의 거침없는 감상에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선망하는 그녀의 눈빛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안의 웃음에 헤스티아는 볼을 살짝 부풀렸다.

, 방금도 귀족 영애답지 못했죠? 큰일이네요. 평소엔 나름 잘하는데…“

아무래도 소공자님께서 편하게 대해주셔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풀리나 봅니다.”

 

이안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고는 말했다.

제가 편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부족한 부분은 황궁으로 가는 동안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제가 스승님으로 모시겠습니다.”

?”

엉뚱한 헤스티아의 말에 이안은 눈을 깜빡였다.

스승님, 앞으로 가르침을 주세요.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헤스티아의 눈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이안은 결국 참았던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즐겁습니까?”

에르반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다가왔다.

아직도 그를 향한 불만이 가시지 않은 이안이 싸늘한 눈빛으로 에르반을 바라봤다.

에르반님, 준비가 끝났으면 출발하시죠.”

 

에르반과 헤스티아가 마차에 오르자, 이안은 말에 올라 선두에 섰다.

출발에 앞서 헤스티아는 사용인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베른에게 헤일로의 안위를 신신당부했다.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지는 브렌하임 저택을 바라보며 헤스티아는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슬픔을 삼켰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불안과 걱정에 며칠째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낯선 황궁에서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그곳에서 어떤 삶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풍경을 하나라도 더 눈에 담으려는 듯, 헤스티아는 끝내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평생을 살아온 브렌하임이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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