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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연재] 타오르는 달빛은 멈추지 않는다

6화) 새로운 인연

by 매냐씨 2026. 8. 12.

헤스티아는 일주일 만에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아직도 숨을 깊게 들이쉬면 가슴이 저렸지만 통증은 확연히 잦아들었다.

가슴에서 빛을 발하는 뤼네 문양을 볼 때마다 헤스티아는 후회했다.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절대로 양피지를 펼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어떤 것도 궁금해하거나 함부로 만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헤스티아는 분주한 바깥 소음에 창가로 다가갔다.
헤일로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정문 앞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멀리서 황가의 깃발을 단 마차와 사람들이 보였다.며칠 전부터 사용인들이 분주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헤스티아는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못한 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선두에 서 있던 흑갈색 머리의 남자가 천천히 말에서 내려 헤일로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은발의 중년 남자 역시 헤일로와 인사를 나누었다. 마도회의 망토를 입은 것을 보니 마법사인 것 같았다. 수행원만 해도 수십 명이었다. 황실이 자신을 본격적으로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 .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 일어났어. 들어와.”

문이 열리자 세숫물을 든 시녀 밀라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얼마나 바빴는지 그녀의 두 볼 가득한 주근깨가 벌겋게 달아 있었다.

아하, 정말로 다행입니다. 손님들이 예상보다 일찍 도착하셨는데 아가씨께서 여전히 낮잠 중이시면 어쩌나 걱정했답니다.”

밀라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세숫물을 챙긴 뒤, 옷장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아이참, 이럴 줄 알았어요. 괜찮은 드레스가 한 벌도 없네요. 어쩜 좋죠?”

세수를 마친 헤스티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실이 원하는 것은 결국 이 문양이다. 그렇다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귀한 손님들이시니, 어머니의 군청색 드레스를 입도록 할게.”

유행은 조금 지났지만, 가진 것 중 가장 품위 있는 드레스였다. 가슴선도 적당히 드러나 뤼네 문양을 드러낼 수 있었다.

 

제가 다 속상하네요. 우리 아가씨의 미모를 제대로 살려줄 만한 드레스가 한 벌도 없다니…”

적당히 예의를 차릴 만한 옷이면 돼. 내가 그들에게 잘 보일 일이 뭐가 있지?”

한창 꾸미기 바쁜 여느 영애들처럼 자랐다면 우리 아가씨의 인생도 달랐겠지.’

속상한 마음에 밀라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혹시 일행으로 오신 소공자님 보셨나요? 얼마나 잘생긴 분인지 보시면 아가씨가 이렇게 무관심하지는…”

밀라.”

헤스티아가 눈꼬리를 살짝 치켜세운 채 초록빛 눈동자를 흘겼다.

그분들은 나를 황궁까지 데려가기 위해 왔을 뿐이야.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입을 함부로 놀리다간 크게 혼날 줄 알아.”

“…, 아가씨.”

밀라는 어린 아가씨의 눈치만 살피며 조심스럽게 단장을 시작했다.

 

**************************

응접실 문을 열고 헤스티아가 들어서자, 조용한 담소가 끊기고 일순간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헤스티아는 밀려드는 긴장감에 손에 땀이 차올랐지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헤일로의 곁에 앉았다.

어서와라, 헤스티아.
이분은 이안 발드라이크 소공자이시고, 이분은 제국 마도회의 대마법사 에르반님이시다.”

헤일로의 소개에 맞춰 두 사람은 정중한 눈인사를 건넸다. 신문에서나 보던 제국 유명인사인 둘을 한 번에 만났다는 사실에 헤스티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헤스티아 브렌하임입니다. 두 분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모노클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에르반이 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지금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분은 누가 뭐래도 헤스티아 영애시죠.”

에르반의 시선이 뤼네 문양에 머물렀다.

뤼네 발현에 의문을 품는 자들이 있었는데이건 뭐 보탤 말이 없을 정도로군요. 축하드립니다, 영애.”

헤스티아는 경계심을 감추지 못한 채 짧게 답했다.
“…
감사합니다, 에르반님.”

 

이안 역시 뤼네 문양에 시선을 뺏겨 할 말을 잃었다.
실제로 마주한 뤼네 문양은 상상 이상으로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황금빛 문양은 햇살을 받을 때마다 살아 숨 쉬는 듯 은은하게 반짝였다.

 

 

헤스티아를 바라보던 이안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초록빛 눈동자의 영애는 신비로운 뤼네 문양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과는 어울리지 않게, 유행이 한참 지난 드레스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얼마 전 황실 연회에서 화려한 차림의 영애들을 잔뜩 보고 와서인지, 그 이질감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헤스티아는 그다지 옷차림을 개의치 않는 듯했다. 반듯한 자세를 유지한 채 눈동자를 선명하게 빛내는 모습에는 조금의 위축도 없었다. 영애가 보통이 아님은 분명해 보였다. 그 여우 같은 노아르가 적잖이 애를 먹겠다는 생각에,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헤일로님. 전투에서 입으셨던 부상이 최근 심해지신 건가요?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걸음걸이도 불편해 보이고 많이 수척해지셨습니다.”

에르반은 대화의 주제를 헤일로에게 돌렸다.
헤일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아직 사람을 대하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 최근 통증이 좀 심해졌습니다.”

에르반은 헤일로에게서 나는 옅은 백연초 냄새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백연초는 잘 쓰면 약이지만, 장기적으로 사용하기에 좋은 선택지는 아닙니다.”

 

헤일로는 주술사를 부른 것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에르반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슴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병 속에는 빛나는 금빛 가루가 투명한 액체 속에 담겨 있었다.

이것이 당장의 통증도 줄여주고 장기적으로는 굳은 다리를 풀어줄 것입니다.
다리가 완쾌된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서너 달 뒤에는 무리 없이 걸으실 수 있을 겁니다.”

 

헤일로의 두 눈이 반짝였다.
무리해서 참전했던 5년 전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뒤, 그의 삶은 끝없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결국 불구 판정을 받았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그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헤일로는 새삼 대마법사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지금 가지고 온 것이 이것뿐이라 먼저 복용하십시오. 수도로 복귀하는 대로 넉넉하게 준비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헤일로는 마음이 벅차올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에르반은 형식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말을 이었다.

영애께서 뤼네인데 무엇을 이루지 못할까요? 수도로 돌아가기 전까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주저 말고 말씀하십시오.”

에르반의 시선이 헤스티아에게 자연스럽게 머물렀다.

"또 필요한 것이 있나요?"

그때, 헤스티아의 두 눈이 반짝였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던 헤스티아는 헤일로를 힐끗 바라봤다. 오빠 앞에서 꺼내기에는 다소 민망한 부탁이었다.

 

에르반은 헤스티아의 머뭇거림을 눈치챈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헤일로님, 지금 복용하시면 약효를 가장 빨리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곧 졸음이 밀려올 테니 침실에서 쉬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헤일로가 응접실을 나서자 에르반은 천천히 헤스티아를 바라봤다.

이제 말씀해 보시죠, 영애.”

 

잠시 말을 고르던 헤스티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정 문제를해결해주실 수 있나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헤스티아는 콜커스 상단주와 맺은 계약서를 비롯해 그 동안 갚지 못한 밀린 대금용지들을 꺼내 보였다.

브렌하임은 전쟁 배상금 때문에 몇 년 동안 재정 상황이 안 좋았어요.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해결 가능할까요?”

 

말없이 계약서와 대금용지들을 받아든 이안은 천천히 훑어보았다.
발드라이크에서 한 번 원정을 나갈 때 쓰는 비용보다도 적었다. 게다가 계약 내용도 엉망이었다.
예상보다 문제가 많은 브렌하임의 상태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망설임 없이 가슴에서 수표책을 꺼낸 이안은 금액을 넉넉히 기입해 헤스티아에게 건넸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해결될 듯싶습니다. 문제가 있는 부분들은 천천히 해결하시죠.”

수표책을 받아 든 헤스티아는 그제서야 나이에 맞는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소공자님.”

 

헤스티아 영애, 앞으로 어떤 걱정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에르반은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영애는 곧 황자비가 되실 겁니다. 브렌하임에는 다시 광명이 깃들 것입니다.”

모노클 너머로 회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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