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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27화) 환영의 숲 Ⅰ

by 매냐씨 2026. 8. 11.

 

숲 속을 한참 내달리던 공주들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숲 속은 지나치게 고요하고 불길했다.

무서워진 루에나가 아스티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스티나는 파리해진 루에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언니들이 서둘러 마차를 탈출하는 바람에 덩달아 따라오긴 했지만, 아스티나의 발걸음은 자꾸 무거워졌다.

언니, 이게 맞을까? 돌아가서 보호를 받는 편이 낫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아스티나가 벨로나에게 물었다.

 

나도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너도 느꼈잖아. 그 녀석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했어! 그곳에 있다가는 살해당했을 거야.”

“…그들은 분명히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목걸이를 차고 있었어. 황제가 우리를 죽이려는 걸까?”

벨로나와 아스티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디에나가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우리가 아니라나를 죽이려고 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당황해하는 벨로나의 물음에 디에나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게 가까이 다가왔던 자가 귀에 속삭였어. 죽어라 망가진 자, 라고…”

 

아스티나는 순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황제가 어떻게 안거지?”

“…나도 모르겠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야…”

 

상황을 알리 없는 벨로나가 두 사람을 추궁했다.

둘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언니가 왜 망가진 자라는설마?”

벨로나가 놀란 눈으로 디에나를 쳐다봤다. 디에나는 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무언의 응답을 했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디에나와 벨로나가 잔뜩 긴장한 채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은편 숲 속으로 고정되었다.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안색에서 서서히 핏기가 사라졌다.

 

그게 언니 사실은…”

아스티나가 마지못해 입을 열자 벨로나는 아스티나를 향해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듯 눈짓했다. 아스티나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벨로나의 뜬금없는 행동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벨로나가 천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아스티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놓친 것이 있나 싶어 눈에 힘을 주어 쳐다봤지만 고요한 숲일 뿐이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벨로나를 쳐다보니 언니들의 얼굴은 공포로 새하얗게 굳어 있었다.

 

-! 슈웅-!!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이 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안개 속에서 황제의 친위대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꺄앗! 도망가!”

놀란 벨로나와 디에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언니! 뭐하는 거야!! 어디 가는 거야!”

아스티나가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벨로나와 디에나는 숲 속으로 정신없이 내달렸다.

언니! 돌아와!!”

아스티나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 듯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해 보였다.

 

아스티나와 루에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순식간에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오한이 등골을 훑자 아스티나는 몸을 움츠렸다. 혹시나 루에나마저 사라질까 그녀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불안한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칼리스였다.

칼리스, 제발날 데리러 와줘.’

눈을 질끈 감은 아스티나는 마음속으로 칼리스를 애타게 불렀다.

 

**************************

친위대를 피해 한참을 달리던 두 사람은 간신히 커다란 고목 뒤에 몸을 숨겼다.

 

디에나는 친위대가 기습했을 때부터 아랫배가 뭉치고 아파왔었다. 아무래도 아기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지만 당장의 위험이 우선이라 모른 척했다.

 

가쁜 숨을 정리하던 벨로나는 머리가 복잡해져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런 위험한 비밀을 만든 거야.’
언니 때문에 모두가 위험해졌다는 원망이 순간 치밀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런 생각들은 치워 버리기로 했다.
언니를 미워하는 감정이 지금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을지만을 생각했다.

 

디에나는 배가 점점 조여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다리 사이로 끈적한 액체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놀란 디에나가 아래를 쳐다보니 치마가 피로 흠뻑 적셔져 있었다.

아악! 안 돼!! 내 아기, 안 돼!!”

놀란 디에나가 치마자락을 말아 올려 흘러내리는 피를 막으려 애썼다.

 

벨로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디에나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멀쩡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니, 조용히 해!”

벨로나는 소리치는 디에나를 저지하며 입을 막았다.

읍읍!”

이거 놔! 내 아기를 건드리지 마!”

디에나는 사정없이 몸부림치며 벨로나를 떼어내려 애썼다.

 

아악!”

그 바람에 디에나의 손톱이 벨로나의 뺨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으윽!”

통증에 벨로나의 팔에서 힘이 풀리자 디에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났다. 멀찍이 떨어져 벨로나를 잔뜩 경계하던 디에나는 반대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아지랑이는 점점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디에나는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흐릿해져 가는 시야를 맑게 하려고 애썼다.

 

아지랑이는 어느새 건장한 체격의 남자로 변해 있었다.

흩날리는 검은색 머리에 투명한 푸른 눈동자.
반듯하고 단정한 이목구비를 한 남자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디에나.”

 

디에나는 복받치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 악몽의 날 이후, 매일 밤 그녀의 꿈속에 찾아왔던 한없이 그리웠던 남자가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에드윈, 지금 꿈인가요?

아니면진짜 당신인가요?”

에드윈은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이제 내가 옆에 있을게. 이리로 와.”

이미 남자에게 정신을 뺏겨버린 디에나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때, 자신의 허리를 붙잡는 손에 몸이 갸우뚱해 넘어질 뻔했다.

 

벨로나가 자신을 꽉 붙잡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을 한 그녀의 뺨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언니…. 정신 차려. 그는 에드윈이 아니야. 우리도망가야 해.”

몰려드는 공포에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짠 벨로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아무래도 디에나가 환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보고 있는 친위대도 환영일지 모른다. 어디서부터 진짜이고 어디서부터 가짜인지 이제는 헷갈렸다.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공포였다.

그녀는 이 기분 나쁜 숲에서 어서 탈출하고 싶었다.

 

디에나, 어서 와. 우리 아기에게 가자.”

디에나는 에드윈의 감미로운 속삭임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벨로나의 손등을 잡아뜯어 밀쳐내고는 그를 향해 달려갔다. 뒤따라온 벨로나가 다시 자신을 붙잡자 거칠게 반항하며 다시 떼어냈다.

바닥에 쓰러진 벨로나의 눈동자가 처절하게 흔들렸다. 언니를 붙잡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언니! 돌아와!! 제발…”

 

아아, 에드윈.”

에드윈에게 다다른 디에나가 그를 잡기 위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배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대로 배를 관통했다.
급격하게 쏟아지는 고통에 디에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니 배에 칼이 박힌 채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디에나의 다리가 힘없이 꺾였다.
피가 천천히 땅을 붉게 물들였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벨로나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벨로나에게 도망치라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입술 사이로는 피 섞인 숨만 새어 나왔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봤다.
손끝에 닿을 듯했던 에드윈의 모습이 검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 너머에서 친위대의 차가운 얼굴이 드러났다.

잘가라, 망가진 자.”

-!

남자는 칼을 빼내더니 한 번 더 깊이 칼날을 박아 넣었다.

으윽!”

입에서 피를 토한 디에나가 비틀거리며 친위대를 붙들었다.

 

아악! 안 돼!! 언니!”

벨로나가 달려와 언니에게서 친위대를 떼어내려 애썼다. 그를 마구 때리고 손을 물어뜯으며 발악했다.

이 미친 놈아, 그만해!!”

하지만 가녀린 그녀에겐 역부족이었다.

 

-!

꺄앗!”

벨로나가 성가셨던 친위대가 거칠게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벨로나가 쓰러지자 천천히 몸을 돌려 디에나에게 박혀 있던 검을 빼내 피를 무심하게 털어 냈다. 그리고는 죽은 디에나를 찬찬히 살폈다.

 

벨로나는 눈앞의 광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살아있던 언니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벨로나는 그가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니의 시체를 두고 가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서둘러 탈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떨리는 몸을 부여잡고 그의 동태를 살피면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친위대는 금방 벨로나에게 관심을 돌려 도망치려던 그녀를 낚아챘다.

꺄앗! 이거 놔!!”

벨로나가 거칠게 저항하자 친위대가 그녀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서걱-!

그때, 그녀를 붙잡고 있던 남자의 손목이 허공을 날았다.

으악!”

-!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진 친위대의 머리 위로 이격이 가해졌다.

! 카캉!!

친위대는 다급히 검을 들어 막았지만, 이어진 검격이 그대로 가슴을 꿰뚫었다.

 

털썩.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남자를 보며 다리에 힘이 풀린 벨로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시야가 흐려진 벨로나는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공주님!”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아득한 정신 너머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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