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vel/[연재] 타오르는 달빛은 멈추지 않는다

2화) 깨어난 뤼네

by 매냐씨 2026. 7. 15.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헤일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헤스티아, 날 부축해 다오.”

헤스티아는 헤일로에게 가운을 건넨 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그의 팔을 어깨에 둘렀다. 성인 남자를 홀로 부축하기엔 버거웠지만, 몇 달 사이 야윈 헤일로의 몸은 놀랄 만큼 가벼웠다.

 

두 사람은 선대 가주들의 초상화가 늘어선 긴 회랑을 천천히 걸었다. 붉은 융단 위로 두 사람의 발소리만 낮게 울렸다.
회랑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흑철문이 나타났다.
가주 외에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금역.
흑철문 한가운데에는 브렌하임의 상징인 피닉스가 새겨져 있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깃털 하나하나에서는 당장이라도 타오를 듯한 화염의 기세마저 느껴졌다.

 

문 앞에 선 헤일로는 잠시 숨을 고른 뒤 헤스티아를 향해 미소 지었다.
헤스티아는 목 끝이 뜨겁게 메어 오는 것을 느꼈다. 오빠의 결정이 기꺼우면서도 안타까웠다.

문을 열게.”

헤일로가 피닉스의 문양 위에 손을 올리자, 새겨진 불꽃 문양을 따라 붉은 빛이 천천히 번져 나갔다.
잠들어 있던 화염이 숨을 쉬듯 문 전체를 감싸더니, 거대한 흑철문이 낮고 묵직한 굉음을 내며 서서히 갈라졌다.

 

문을 들어선 순간, 헤스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가주의 방은 화려하기보다 오래된 시간 그 자체를 간직하고 있었다.

보물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헤스티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별 게 없지?”

헤스티아의 마음을 눈치챈 헤일로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헤스티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여기쯤 땅문서를 모아 두었는데잠시만.”

헤일로가 문서 더미를 뒤적이자 낡은 양피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잔잔히 울렸다.

천천히 찾아봐. 난 구경 좀 하고 있을게. 언제 또 가주의 방에 들어와 보겠어?”

 

헤스티아는 시간을 들여 방 안을 찬찬히 살폈다.
실망했던 처음과는 달리 브렌하임의 역사와 명성을 짐작하게 할 만한 것들로 가득했다.

초대 가주가 직접 남긴 편지.
역대 황실이 하사한 칙서.
불마법의 기원을 기록한 역사서와 먼 세월을 견딘 고대 마법서.
시간이 멈춘 듯한 유물들이 조용히 브렌하임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런 건 얼마쯤 받을 수 있을까?’

헤스티아는 피식 웃었다.
가문의 역사를 눈앞에 두고 속물처럼 구는 자신이 조금 한심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영지를 살릴 만큼 값비싼 물건 하나쯤은 남아 있지 않을까.

 

유물들을 살피던 헤스티아는 오래된 양피지 하나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창문으로 스며든 햇빛이 반사된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빛을 내는 것은 그 양피지뿐이었다.

설마 진짜 보물인가?’

헤스티아는 서둘러 양피지를 펼쳤다.
양피지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헤스티아가 겨우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몇 개의 단어뿐이었다.

 

뤼네순수 마법순환불꽃
, 더 이상은 모르겠다.”

간신히 읽어 나가던 헤스티아는 금세 포기했다. 더는 읽을 수 없었다.

, 아무것도 아니잖아.’

실망한 헤스티아는 낮게 혀를 찼다.

헤스티아가 양피지를 뒤집으려던 순간, 희미하게 남아 있던 고대 문자들이 하나둘 빛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

그 자리를 대신하듯 처음 보는 문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한 빛은 살아 숨 쉬듯 피어올랐다가 이내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뭐야...? 그림이 움직여?’

잠시 망설이던 헤스티아는 천천히 손끝을 문양 위에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심장을 쥐고 흔드는 것 같은 강렬한 진동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

놀라 손을 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빛은 순식간에 손끝을 타고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으윽!”

가슴 한가운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새빨갛게 달군 쇠붙이를 심장에 그대로 박아 넣는 듯한 고통이었다. 헤스티아는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지만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심장 박동에 맞춰 뜨거운 무언가가 피부 아래를 기어 다녔다. 빛줄기는 쇄골을 지나 목덜미를 훑어, 어깨를 타고 팔 끝까지 번져 나갔다.

 

헤스티아!!”

놀란 헤일로가 달려와 헤스티아를 안았다. 헤스티아는 가슴을 움켜쥔 채 고통을 호소했다.

 

 

참아 보려 했던 비명이 끝내 터져 나왔다.

아아악!”

헤스티아, 정신 차려!! 헤스티아!”

피부 아래를 흐르던 빛은 마치 보이지 않는 펜 끝처럼 살결을 따라 무언가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선 하나.
곡선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복잡하게 얽힌 문양이 살갗 위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을 머금은 문양은 심장이 뛸 때마다 더욱 선명해졌고, 헤스티아의 몸은 경련하듯 크게 떨렸다.

 

그만제발…!”

헤스티아, 몸이 너무 뜨거워. 집사! 거기 아무도 없느냐!!”

손톱이 바닥을 긁으며 긴 자국을 남겼다.
숨이 막혔다.
피가 끓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웠다.

 

마침내 마지막 선까지 새겨지는 순간, 문양이 눈부신 빛을 토해냈다.

방 안을 가득 메우던 빛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동시에 모든 통증도 끊어진 실처럼 멎었다.

그러나 문양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장 위에 새겨진 황금빛 문양은 희미한 빛을 머금은 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건... 뤼네...?!”

혼몽한 의식 속에서 헤일로의 목소리만 아득하게 들려왔다. 헤스티아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감겼다.

 

 

**************************

루멘티아 황궁은 승전 연회로 온종일 떠들썩했다.

수백 개의 샹들리에마다 불꽃이 일렁였고, 화려한 음악과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가득 메웠다. 연회장은 저마다 잔을 부딪치며 승리를 축하하는 이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런 화려함 속에서도 이안 발드라이크의 표정만은 편치 않았다.

목 끝까지 조여 오는 제복과 거추장스러운 장식들이 숨을 막히게 했다. 그는 답답한 목깃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하려는 듯 무심코 몸을 뒤척였다.

그 모습을 본 발드라이크 공작 크러서스가 낮게 헛기침했다.

흠흠.”

이안은 움찔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불편하더라도 오늘만큼은 조금 참거라.”

“…, 아버님.”

대답을 마친 그는 곧장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다가오는 귀족들에게 흠잡을 데 없는 예의와 정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 어디에도 진심은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폐하를 알현하고 오마.”

.”

크러서스는 몇 걸음 옮기다 말고 다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난번처럼 연회장을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거라.”

이안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

이번 기회에 다른 귀족들과도 안면을 익혀 두어라. 앞으로 도움이 될 일이 많을 테니.”

“…알겠습니다.”

마지못한 대답이었지만 크러서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짧은 한숨을 내쉰 그는 황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이안은 와인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렇게 급하게 드시면 금방 취하십니다, 부대장님.”

반가운 목소리에 이안은 갈색 눈을 반짝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부대원인 라그리스와 홀던이 반가운 미소를 띠며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에 있었던 거야? 나만 공작 각하 곁에 버려두고 너무들 하는군.”

오늘의 주인공이신데, 어찌 저희 같은 나부랭이들과 어울리려 하십니까?”

귀족나리들이 우리 부대장님한테 눈도장 한번 찍으려고 엉덩이가 들썩이는 것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두 사람의 짓궂은 농담에 굳어 있던 이안의 표정이 슬며시 풀어졌다.

그게 어디 나에 대한 관심이냐? 다 아버님에 대한 것이지.”

공작님께서 황제 폐하께 가시던데, 이번에야말로 대공 작위가 수여되겠지요? 그 동안 얼마나 고대하셨습니까. 이제 부대장님께서는 대공자 나리가 되시는 겁니다!”

라그리스의 호들갑이 부담스러웠지만, 공작과 이안 모두 오래도록 바라던 일이었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하, 헛소리 말거라. 형님이 계신데, 내가 무슨 대공자인가.”

에잇, 라일님이 어찌 우리 부대장님과 비교나 되겠습니까? 성품이며 인물이며 한참 아래지요!”

잔뜩 흥분한 라그리스를 도와 홀던도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세운 공만으로도 충분하지요.”

홀던이 거들자 라그리스는 더욱 신이 났다.

황제 폐하께서도 어떻게든 부대장님을 수도에 잡아두고 싶으신 눈치던 걸요. 다들 부대장님께 보내는 뜨거운 관심을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이럴 때 탄탄하게 자리를 잡으셔야죠.”

맞습니다, 저 영애들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부대장님과 눈을 맞추기만을 열렬히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이안은 홀던의 시선을 따라 맞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러 명의 영애들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수근거리는 그녀들을 보니 목이 더 갑갑해져 왔다. 15세부터 전장을 떠돌아다녔던 터라 영애들의 호감 어린 시선은 익숙하지 않았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때였다.

노아르 레제프 아르세리온 1황자 전하와 이벨린 레오나 아르세리온 황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우렁찬 외침에 연회장을 가득 메운 시선들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자신에게 열렬한 애정을 쏟아붓던 영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언제봐도 신기한 그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거대한 문이 열리자 찬란한 조명이 두 사람 위로 쏟아졌다.

백금빛으로 윤기 있게 빛나는 머리카락.
맑은 하늘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푸른 눈동자.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이목구비는 마치 신이 공들여 빚어낸 조각상 같았다.
타고난 기품과 여유로운 미소는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황족의 위엄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새어 나왔다.
방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연회장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홀린 듯 두 남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아, 언제봐도 두 분의 미모는 대단합니다.”

라그리스가 두 볼을 붉히며 홀린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게. 언제 봐도 대단한 남매지.”

이안은 담담히 와인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