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더 가까이

16화

한 걸음 더 가까이

요 며칠 기분이 저조했던 라일은 오랜만에 들떠 있었다.
발드라이크를 떠날 때부터 느껴지던 불안은 수도에 도착하자 현실이 되었다. 3년 전 폭행 사건으로 자신이 발드라이크에 처박혀 썩어가는 동안, 꼴 보기 싫은 동생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어딜 가나 이안의 이야기가 들렸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안과 연결되고 싶어 했다. 게다가 수도 내 타운하우스는 이미 이안의 사람들로 채워져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이안이 자작위를 받고 영지까지 하사받았다는 소식에 결국 라일은 폭주해 버렸다. 술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바람에 공작에게 호되게 야단맞고 저택 감금을 명령받았다.
‘씨발, 애 새끼도 아니고 서른이 넘어서 저택 감금이라니….’
2황자의 초대가 아니었다면 오늘도 저택에서 무료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마차 창문 밖으로 일그러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2황자를 어떻게 구워 삶을지 고민했다.

황자가 보내온 마차는 한참을 달려 에른하르트에 있는 살롱 골드 메달 앞에서 멈추었다. 이안의 영지에 들어선다는 사실이 못마땅했지만 황자의 초대가 우선이었다. 서둘러 마차에서 내린 라일은 살롱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안내된 방은 조용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좀 더 요란하고 화려할 것을 기대했던 라일은 피식 웃었다. 며칠 전 술집에서 난동을 부리며 접대부들까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바람에 수도 어디에서도 여자를 찾을 수 없었다. 쌓여 있던 욕망이라도 오늘은 풀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실망한 라일은 애꿎은 술만 들이켰다.

똑. 똑.
그의 시선이 노크 소리를 따라 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날카로운 눈빛의 사내가 들어왔다. 뒤이어 금발의 미소년이 따라 들어왔다. 사내가 정중하게 인사했지만, 라일의 시선은 그의 뒤편에 머물러 있었다.
“라일 대공자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살롱의 책임자인 아로스라고 합니다.”

라일은 말없이 고개만 까딱였다.
“황자님께서 대단히 미안하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오늘 꼭 라일 대공자님을 뵙고자 하셨는데 내일 승작 연회 준비로 급한 일이 있어 오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너른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짜증이 밀려든 라일은 술잔에 든 얼음을 거칠게 깨물었다.
‘하… 그 애송이가 감히 날 무시해?! 씨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라일의 표정을 주시하던 아로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아로스가 눈짓하자 라비에르가 슬그머니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라일의 시선이 그에게 머무르자 아로스가 말을 이었다.
“대공자께 미안함을 전하고자 황자님께서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라비에르가 천천히 다가오자 라일은 술잔을 기울이며 그를 샅샅이 훑었다.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1황자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와 달리 가녀리고 요염한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입가의 점이 매력적이었다. 라비에르의 아름다운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걸리자 라일은 몸이 점점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라비에르는 라일에게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을 건넸다. 다른 것을 기대했던 라일은 순간 멍해졌다. 아로스가 나지막하게 설명했다.
“커큐어스 독과 검은과부거미 독을 배합한 것입니다. 냄새도 맛도 흔적도 남지 않지요.”
라일은 병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아로스의 설명대로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았다.
“증상은?”
“처음엔 가벼운 두통이 이어질 겁니다. 중독이 되면 아무리 거구의 사내라도 자리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게 됩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사용하면 심장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그것은 추천하지 않겠습니다. 금세 티가 날 테니까요.”

아로스는 라일의 손에 들린 병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씩 몸을 갉아먹다가 결국 심장을 멈추게 하는 무서운 녀석입니다. 독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죽을 겁니다. 분명히 대공자의 앞날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라일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들거렸다.
“이게 황자의 선물이라고? 내게 목줄을 채울 심산인가?”
“그럴 리가요. 말 그대로 선물일 뿐입니다. 사용 여부는 온전히 대공자의 몫입니다.”
말을 마친 아로스가 라비에르에게 눈길을 보냈다.

“선물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대공자님?”
라비에르의 부드러운 미성에 라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라비에르는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슬며시 가져다 대었다.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에 라일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럼 저는 어떠신가요? 라비에르라고 합니다. 오늘 밤 대공자님을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욕망에 이글거리는 라일의 표정을 확인한 아로스가 가벼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황자님께는 대공자께서 선물을 흡족해하셨다고 전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문이 천천히 닫혔다. 방 안에서는 라비에르와 라일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아로스는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불빛만 비치는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그는 세상 일이 참으로 쉽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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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을 머금은 오렌지빛 햇살이 대리석 바닥 끝까지 길게 드리웠다. 열린 창문으로 스며든 서늘한 바람이 방 안의 따스한 공기와 뒤섞였다. 조용한 방 안에는 박자를 세는 이안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헤스티아는 그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자 헤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 바람에 자세가 흐트러지며 이안의 발을 밟고 말았다.

“앗, 죄송합니다.”
허둥대는 그녀를 안심시키듯 웃음기가 밴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헤스티아는 괜스레 귀를 어루만졌다.
“괜찮습니다. 많이 힘드시죠?”
“…죄송합니다.”

벌써 몇 번째 같은 곳을 틀렸는지 모르겠다. 헤스티아는 차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바닥만 바라봤다. 자신의 잦은 실수에도 이안은 화 한 번 내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줬다. 그 마음이 고맙고 미안할수록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신에게 괜스레 화가 났다.

가볍게 머리를 쓸어 넘기던 이안은 시계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 밤, 연회 전 대공과 최종 점검할 사항들이 있었다. 늦어도 30분 뒤에는 황궁을 출발해야 타운하우스까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의 이안이었다면, 무리해서 일정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일 연회에서 헤스티아가 제대로 춤을 출 수 있을지가 내내 신경 쓰였다. 지금 그녀의 잦은 실수를 보고 있자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먼저 침묵을 깼다.
“영애, 잠시만 구두를 벗어주시겠어요?”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를 바라보며 이안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제 발 위에 영애의 발을 올려두세요. 제가 하는 대로 따라오면서 감각을 익히면 금방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헤스티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스티아의 발이 이안의 구두 위로 올라왔다. 그녀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준 이안은 다시 박자를 세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안의 발 위에 올라서 있다는 사실에 온 신경이 쏠렸지만, 점차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임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가벼워진 몸놀림에 그녀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오랫동안 전장을 돌았다고 들었는데 춤은 언제 배운 걸까.’
군더더기 없이 유려한 그의 춤 동작에 헤스티아는 오늘 몇 번이나 감탄했다. 솔직히 황궁에서 붙여 준 춤 선생보다 한 수 위였다.

계속 틀렸던 동작까지 깔끔하게 끝내자, 그제야 헤스티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기쁨에 찬 그녀의 눈빛에 이안도 밝게 눈을 반짝였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내일 긴장만 하지 않으신다면 완벽합니다.”
“이게 다 스승님 덕분입니다. 어쩜 춤도 이렇게 잘 추십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잔뜩 들뜬 헤스티아가 끊임없이 칭찬을 쏟아내자 이안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면전에서 그렇게 칭찬하시면… 얼굴을 들기가 어렵습니다.”
마차에서도 느꼈지만, 완벽한 이 남자가 수줍어하는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스승님께서는 얼마든지 당당하게 누리셔도 됩니다. 무려 제국 최고의 남자가 아니십니까.”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참을 수 없었던 이안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의 귀부터 목덜미까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부끄러우면 여기가 붉어지는구나…’
어쩐지 그 부분이 계속 눈에 걸린 헤스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바람에 맞잡은 손바닥이 간질거리자 이안이 손을 움찔했다.
“…어, 영애. 손이… 간지럽습니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달은 헤스티아는 허둥거렸다.
“아!! 죄송…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이제 춤 연습은 그만해도 될 것 같습니다.”

헤스티아가 서둘러 손을 놓고 바닥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 두 사람의 스텝이 엉켜 버렸다.
“어엇!”
“…!”

쿠당탕.
당혹스러움과 민망함도 잠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크게 웃어 버렸다.
“푸흡, 하하하.”
“하하하하.”
바닥에 엉켜 쓰러진 서로의 모양새가 너무 우스웠다. 헤스티아는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며 황궁에 온 이후 이렇게 웃은 적이 있었나 생각해 봤다. 문득 오늘 이안의 방문으로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정돈한 이안이 헤스티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헤스티아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
“오늘 와 주신 것도, 춤을 가르쳐 주신 것도… 모두 감사드립니다.”

헤스티아가 이안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스티아는 이안을 향해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선 제가 만난 최고의 행운입니다.”

이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가슴을 가득 채운 이 감정이 흩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슴이 따스하게 젖어 들면서 코끝이 살짝 아려 왔다. 이안은 햇살보다 환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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