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의 선택

15화

이안의 선택

황제는 직접 차를 따라 이안에게 건넸다. 이안은 그것이 영광스러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다행이야, 노아르가 뤼네의 주인이라니…”
가벼운 혼잣말로 운을 뗀 황제는 이안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둘만 있을 때엔 편하게 대해도 될까? 자네에게는 항상 마음이 쓰였지.”
이안은 황제가 여러모로 자신을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흔쾌히 답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혼식과 황태자 책봉을 서둘러야겠어. 노아르가 뤼네와 성공적으로 공명했으니 시끄러운 입들은 금방 조용해질 거다.”
‘약혼식’이라는 말에 이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결정될지 몰랐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구나…’

황제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노아르 혼자서는 부족해. 이안, 네가 힘이 되어주어야겠다.”
“…”
이안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황실 권력에서 멀어지고 싶은 자신의 마음은 고려되지 않는 현실이 답답했다.
“…폐하, 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공은 걱정 말거라. 그는 이미 노아르 편이니 너만 마음을 정하면 된다.”

황제는 에둘러 내민 그의 거절을 단칼에 잘라냈다. 이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언제나 황실은 발드라이크에게 절대적인 희생을 강요했다. 태초의 맹약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목줄 채워진 개 취급을 받지는 않았을 텐데.

“내 친아들은 로이드이지만… 나는 그 녀석이 좋은 황제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정이 지나치게 외가를 닮았지. 훗날 큰 화를 부를 수 있어.”
황제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짙어졌다. 이안은 말없이 찻주전자를 들어 그의 빈 잔을 채웠다.

“이안, 너도 알겠지만 칼데이크의 최근 행보가 신경에 자꾸 거슬려. 소국 주제에 제국 일에 너무 깊숙이 관여하고 있어. 스테판 말대로 칼데이크와의 인연은 할머님 대에서 끊었어야 했는데 내가 정작 그분의 도움으로 황제 자리에 앉은 거라 쉽게 정리할 수 없었지.”

황제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황비까지 칼데이크 출신이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지 않나. 내가 자초한 일이니 누가 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 강력한 황권 유지를 위해서라도 노아르가 뒤를 잇는 것이 맞아.”

“하지만 노아르가 아직 많이 부족해. 녀석 자체가 큰 욕심이 없다는 것도 문제야. 뤼네가 나타났으니 앞으로 달라지겠지.”
먼 곳을 바라보던 황제의 시선이 이안에게 향했다.
“너는 나이에 비해 경험도 풍부하고 훌륭한 배경도 가지고 있다. 네가 노아르를 돕는다면 더 이상 걱정이 없을 것 같다. 그래 주겠느냐?”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머뭇거린다면 대공가에 피해가 올 수도 있었다. 황제는 이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황실이 네게 베푼 것들을 절대 잊지 말아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노아르 전하를 따르겠습니다.”

그의 마지못한 대답을 끌어내고서야 흡족해진 황제는 화제를 돌렸다.
“너에 관해 시끄러운 소문이 돌더군. 황녀에게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이냐?”
이안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송구합니다. 황녀 전하와는 아무런 사이가 아닙니다.”
“널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황녀를 아끼는 만큼 너도 아끼고 있다. 황녀에게 주의를 줄 테니 더 이상 그 일에는 마음 쓰지 말거라.”

이안은 입안이 씁쓸해졌다.
황제가 느닷없이 황녀 문제를 꺼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의 관심이 오로지 1황자에게 쏠려 있다는 소문은 역시 사실이었다. 이안은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마음 한구석이 편해진 것은 다행이었다. 황녀가 퇴짜를 맞았다는 악의적인 소문 때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적어도 황녀와 관련된 오해만큼은 이제 끝난 듯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브렌하임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에르반이 너와 헤스티아 영애를 주기적으로 만나게 해주면 어떻겠냐고 청하던데?”
“…!”

이안은 뤼네에 손을 가져다 댔던 일을 떠올렸다. 에르반이 그 일과 관련해 알맹이만 빼고 황제에게 전달한 듯싶었다. 어디까지 얘기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황제가 말을 이었다.
“에르반의 생각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어. 단순한 호기심인지 뭘 알고 그러는 건지…”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폐하, 에르반님을 믿으십니까?”

황제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글쎄… 그가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만은 확실하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궁으로 오는 도중, 카라스의 습격을 받았었습니다.”

황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때, 에르반님이 의도적으로 상황을 피하셨습니다. 저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분이 연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안은 황제의 의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미 간자를 마도회에 심어 두었습니다. 곧 소식이 들려 올 겁니다.”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은 에르반의 뜻대로 움직여볼까? 영애에게 선생들을 붙일 거다. 바쁘더라도 네가 가끔 확인해주면 좋겠구나.”

이안은 자신을 기다리는 산더미 같은 일들을 떠올렸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헤스티아를 만날 기회가 얼마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이안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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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이어진 교육이 끝나자 녹초가 된 헤스티아는 소파에 털썩 쓰러졌다.
1황자와 공명한 뒤 그녀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숙소는 벨로체 1황자궁으로 옮겨졌고, 하루 종일 예법과 황실 교육이 이어졌다. 귀족들의 초대장은 매일같이 쏟아졌고, 그녀 앞으로 배정된 예산은 브렌하임의 1년 예산을 훌쩍 뛰어넘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일들에 헤스티아는 그저 휩쓸려 갈 뿐이었다.

“내 약혼자는 참으로 대단하군.”
헤스티아는 붉게 물드는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푸훗.”
헤스티아는 노아르의 팔짱을 끼고 별궁에 갔던 날을 떠올렸다. 아연질색한 별궁 시녀들의 표정은 나름 볼 만했다. 헤스티아는 황자궁으로 옮기면서 자신을 시중들던 별궁 시녀들을 모두 내보내고 새로이 사람을 뽑았다.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이라니. 나름의 복수를 한 것 같아 속이 시원했다.

똑똑.
“헤스티아 영애님, 이안 자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소파에 쓰러져 있던 헤스티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제 시녀에게서 앞으로 이안이 주기적으로 교육 상황을 확인할 예정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급하게 옷 매무새를 정돈한 헤스티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들어오세요.”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긴장한 헤스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문이 열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띤 이안이 가볍게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시녀가 뒤따라 들어오지 않았다면 헤스티아는 그에게 달려갔을지도 몰랐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헤스티아는 온화한 미소로 그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자작님.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이안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화답했다.
“제가 더 영광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요. 자작님께서는 요즘 많이 바쁘시지요?”
“네. 아무래도 영지 운영은 처음이라… 많이 헤매고 있습니다.”

이안은 황궁으로 올 때보다 살이 빠져 보였다. 그가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로제, 차를 준비해줘. 준비한 간식도 같이.”
헤스티아는 능숙한 태도로 시녀에게 지시했다. 시녀의 뒷모습을 열심히 눈으로 쫓던 그녀는 문이 닫히자 그제야 자세를 풀었다.

“하아… 이제 좀 살겠네. 잘 지내셨나요, 스승님?”
둘만 있게 되자 스스럼없는 태도로 바뀌는 헤스티아의 모습에 이안은 결국 참았던 웃음이 터졌다.
“풉.”
“…!”

이안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방금은 영락없는 귀족 영애이셨는데 지금은… 제가 알던 그분이 맞군요.”
헤스티아가 뾰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원래부터 귀족 영애였습니다.”
“네, 제가 실언했습니다. 영애는 처음부터 완벽한 귀족 영애셨습니다.”
“그만 놀리십시오. 제가 황궁에서 얼마나 시달린 줄 아신다면… 스승님까지 절 놀리시면 안 됩니다.”

이안은 헤스티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따스한 눈빛에 헤스티아는 마음이 몽글거렸다.
“…1황자 전하 때문입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헤스티아는 갑자기 울컥했다. 그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그동안 삼켜왔던 말들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이안에게 노아르의 흉을 봐도 되는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헤스티아는 한참 동안 말을 골랐다.
“…오해가 있었지만, 지금은 좋아졌습니다. 황자님께선 제게 충분히 다정하십니다.”
노아르가 다정하게 대한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인데, 이안은 입안이 텁텁해졌다.

시녀가 차와 간식을 내오면서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헤스티아는 간식을 이안 쪽으로 밀었다. 이안은 자신을 챙기는 그녀의 손길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시녀가 나가자 헤스티아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것 드셔 보세요. 서국에서 왔다는 귀한 과자인데 아주 맛있습니다. 원래는 노아르 전하 몫인데, 제가 특별히 스승님을 위해 챙겨 두었답니다.”
으스대는 그녀의 모습에 이안의 입가에도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과자를 한 입 베어 문 이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의 반응에 헤스티아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제 말이 맞지요? 정말 맛있지요? 스승님을 위해 제가 또 귀한 것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작은 것 하나라도 챙겨준 게 언제였는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입안에 남은 달콤함보다 그녀의 한마디가 더 오래 가슴에 맴돌았다. 괜히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일이 승작 연회라 바쁘실 텐데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제야 용건이 생각난 이안이 조심스럽게 입가의 가루를 털어내며 말했다.
“바로 승작 연회 때문에 온 것입니다. 연회에서 황자님과 춤을 추셔야 합니다. 그 전에 점검을 한 번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왔습니다.”

헤스티아는 싫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으윽… 그건 생각도 못했습니다. 춤을 배우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금방 황자님과 춤을 춰야 하다니…”
“아무래도 귀족들 앞에 처음 선보이는 자리라 단단히 준비하셔야 합니다.”

근심 가득한 헤스티아의 눈빛에 이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최고의 스승이 왔으니 걱정 마세요.”

그의 다정한 눈빛을 마주하자 헤스티아의 긴장도 서서히 풀렸다. 이안은 허리를 숙이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노을빛에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할까요?”

헤스티아는 잠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짧게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네!”
바닥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잔잔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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