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렌하임의 노래

11화

브렌하임의 노래

이안은 밤새 습격의 뒷수습을 하느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경이 곤두선 탓도 있었지만, 헤스티아가 품에 안겼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아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더욱 부지런히 움직이며 일에 몰두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나무에 기대어 잠깐 쪽잠을 자던 그를 라그리스가 흔들어 깨웠다.
“부대장님, 잠시만 일어나보십시오.”
뺨을 스치는 차가운 새벽 공기에 몸을 잔뜩 움츠리며 눈을 뜬 이안에게 라그리스가 쪽지를 건넸다.

급한 일정이 생겨 먼저 떠납니다.
어제는 도움을 못 드려서 죄송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에르반으로부터

“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안은 거칠게 숨을 뱉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라그리스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의 얼굴엔 죄책감이 어려 있었다.
“분명히 잘 지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순간에 픽 쓰러져 버렸습니다. 일어나 보니 이미 에르반님은 떠나고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은 라그리스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앞을 나섰다. 이안은 에르반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젯밤의 행동도 단순한 변덕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리를 나서는 이안을 쫓으며 라그리스는 자신의 생각을 내비쳤다.
“뤼네에 관심이 떨어지신 건 아닐까요?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였다거나…”
라그리스의 말을 유심히 듣던 이안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반대일 수도 있어. 급하게 떠나야 할 이유가 생겼을 수도 있지… 아무튼 믿을 수 없는 사람이야. 마도회에 사람을 하나 심어둬. 에르반님의 움직임을 계속 확인해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한참을 걸어가던 이안이 잠시 말을 고르다 라그리스를 쳐다봤다.
“…영애께서는 마차에 계시나?”
“네.”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는 내가 영애와 함께 마차에 타겠다. 에르반님이 안 계시니 도착 전까지 황궁 역사와 예절을 가르쳐 드려야겠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이안은 깨어 있는 부하들을 다독이며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일행들은 어느덧 여정의 절반에 해당하는 락웰 지방을 지났다.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 탓에 숲을 돌아왔음에도 일정에는 크게 차질이 없었다. 이안은 헤스티아에게 역사서 요약본을 읽게 한 뒤, 새로 도착한 보고들을 확인했다. 카라스는 워낙 은밀한 조직이라 아직 접근하지 못했지만, 마도회 잠입에는 성공했다.
‘절반의 성공인가… 카라스를 어떻게 잡아야 하지…’

한참을 고민하던 이안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헤스티아에게로 향했다.
책에 파묻힌 헤스티아는 이안이 자신을 쳐다보는지도 모르고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헤스티아는 영특하고 눈치가 빨라서 그의 수업을 곧잘 따라왔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수업을 받게 된 그녀는 잔뜩 들떠 이안이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경청하려고 애썼다. 모르는 것은 즉시 묻고, 배운 것은 곧바로 응용했다. 성실하고 진지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생각보다 큰 보람이 있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이안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싱그럽고 청량한 향기가 코끝을 은은하게 스쳤다. 복잡한 황궁 가계도를 외우는 헤스티아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마차 안에 울려 퍼졌다.
계속 긴장을 유지한 데다 잠이 부족했던 탓에 이안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애써도 한 번 감긴 눈은 결국 그를 잠에 빠트렸다.

꿈을 꾸면 그는 언제나 이곳으로 돌아왔다.
문제의 사건이 있었던 14세 생일날.
이안은 상석에 앉아 호화로운 생일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서자인 데다 공작마저 늘 바빴기에, 이안이 언제나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공작이 성을 비울 때면, 공작부인의 냉대와 라일의 괴롭힘을 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오랜만에 공작이 성에 머물렀고, 공작부인도 몇 달 전부터 유달리 신경을 써서 생일 연회를 준비해 왔다.

이안은 며칠 전부터 잔뜩 들떠 있었다.
공작에게서는 테르마리온에서 특별히 공수한 명마를, 황실에서는 보검인 흑검을 하사받았다. 질투로 이글거리던 라일의 눈빛도 잊을 수 없었다. 평소 자신을 지나치게 괴롭히던 형을 제대로 골탕 먹였다는 사실에 이안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친우와 방계 친척, 수많은 귀족들까지 성을 가득 메웠다. 그날은 발드라이크가 온종일 환한 불빛과 떠들썩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지독히도 아름다운 날이었다.
음료수가 든 잔을 높이 쳐들고 이안은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두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이안의 눈은 샹들리에보다도 밝게 반짝였다.

그리고, 음료수가 목구멍을 타고 전신에 퍼져 나가는 순간.
이안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살을 찢는 듯한 고통에 신음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목에서 피가 날 때까지 긁어 댔지만, 검붉은 피만 토할 뿐 막힌 숨은 좀처럼 터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에 섞여 멀리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공작의 얼굴이 보였다.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점점 흐려졌지만 공작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공작부인의 서늘한 눈빛은 또렷하게 기억에 박혔다. 라일이 아마 희미하게 웃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잠든 이안의 목울대가 연신 움직였다. 꿈인 것을 알면서도 그때가 떠올라 목이 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이안의 귓가에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노래에 맞춰 빠르게 뛰던 심장 박동도 점점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깜빡이며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였다. 노랫소리는 바람을 타고 이안의 귀를 어루만졌다. 따뜻한 노랫소리에 기대듯, 그의 의식은 천천히 현실로 떠올랐다.

“아, 깨셨어요?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아닙니다. 제가… 깜빡 잠이 들었었군요.”
이안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어제 고생이 많으셨죠?”
“아… 평소에는 며칠 밤을 지새워도 끄떡없는데… 어제는 꽤 긴장했었나 봅니다.”
헤스티아가 조용히 웃으며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잠시 멍해 있던 이안은 입가에 흐른 침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닦아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와 고개를 돌려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늘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 애썼기에, 이토록 무방비하게 잠든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이안은 헤스티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실수를 했을까요?”
잠시 생각을 하던 헤스티아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훗, 코를 살짝 고셨어요.”
“예?!”
아찔해진 이안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무슨 추태인가! 천하의 이안 발드라이크가 숙녀 앞에서 코를 골다니…

“걱정 마세요. 소공자님은 코를 고셔도 멋있으셨답니다.”
“실례했습니다. 제발 잊어주십시오.”
이안은 민망한 듯 입술만 살짝 비죽였다. 고고하기만 하던 소공자의 의외의 모습에 헤스티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걱정 마십시오, 이건 우리만의 비밀인 겁니다.”
헤스티아는 입술 위를 손가락으로 슥 그으며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이안도 피식 웃어 버렸다.

불현듯 아까의 노랫소리가 궁금해진 이안이 물었다.
“방금 영애가 불렀던 노래가 무엇인가요?”
“아하, 브렌하임에 전해져 오는 민요 같은 것인데 제목은 저도 몰라요.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던 것이라…”
“혹시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이안은 그 노랫소리를 들었을 때,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감각을 떠올렸다. 헤스티아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익숙한 선율을 천천히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새는 새벽을 품고,
푸른 들은 바람을 품네.
신의를 심은 이의 발자국마다,
꽃은 계절을 넘어 피어나니.
편히 잠들어요, 브렌하임의 아이여.

헤스티아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꿈을 꾸는 듯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마차 안을 부드럽게 채워갔다.

이안은 햇살을 닮은 따스하고 눈부신 여인의 모습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모든 풍경을 그림처럼 마음에 새겨 두었다.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될 것만 같았다.

그때의 그는 몰랐다.
그날의 노랫소리가 오래도록 자신의 마음을 붙들게 되리라는 것을.
그녀의 잔상에 수없이 흔들리게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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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가까이에 다다르자 아르세리온 황궁이 거대한 산맥처럼 지평선 위로 우뚝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워질수록 끝이 보이지 않는 성벽과 찬란하게 빛나는 궁전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헤스티아는 그 압도적인 위용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몇 번은 방문할 수 있었을 테지…’
헤스티아는 쓴웃음을 삼키며 활기로 가득 찬 수도의 풍경과 위엄을 자랑하는 황궁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곧 황궁입니다. 자세를 바로 하십시오.”
정신을 차린 헤스티아는 배운 대로 자세를 정돈했다.

이안은 그녀의 눈빛에 어린 두려움과 긴장을 읽었다. 위로의 말을 건네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대공 승작 이후에는 전쟁 포상으로 주어질 영지 운영과 가문의 일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어쩌다 연회에서 한두 번 마주칠 수는 있겠지만, 그뿐이었다.
황궁에 닿는 순간, 두 사람의 인연도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싶었다. 황궁까지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였을까. 아니면 어쩐지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였을까.

“황궁에 도착하면… 헤어지겠군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헤스티아가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안은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최고의 스승에게 배우지 않으셨습니까.”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헤스티아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소공자께서는 최고의 스승님이 맞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저를 스승님이라고 부르시면 안 됩니다. 남들에게 책잡힐 일은 피하십시오.”
“하지만…”
헤스티아는 단호한 이안의 태도에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삼켰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럼… 둘만 있을 때는 괜찮나요? 저는 소공자님과 친우로 남고 싶습니다.”

친우라….
이안은 그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예비 황자비와 친분을 맺는 것은 분명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훗날 대공가를 이끌게 된다면 든든한 인연이 될 수도 있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이해득실을 따져 망설임 없이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 앞에만 서면 계산이 자꾸 흐트러졌다. 친해지는 것이 맞는지, 거리를 두는 것이 맞는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녀에 대한 호감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헤스티아는 아무런 계산 없이 자신과 친우로 지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나만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가.’
문득 웃음이 났다. 솔직히 그녀와의 인연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오랜만에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난 탓일 것이다. 이안은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 둘만 있을 때만입니다.”
“또 비밀이 생겼네요. 소공자님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겠습니다.”

이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품 안에서 옅은 푸른색의 마법 전령새 여러 개를 꺼내 헤스티아에게 건넸다.
“이건 제가 사용하는 마법 전령새입니다. 제가 필요하실 때, 이 전령새를 펼치고 글을 적거나 말을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다시 접어 하늘로 날리면 제가 어디에 있건 저에게 도착합니다. 제가 항상 영애의 편에 있을 겁니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헤스티아는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내어 마법 전령새를 조심스럽게 담았다.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끼이익.
마차가 멈추는 소리에 두 사람의 대화는 멈추었다. 헤스티아는 몰려오는 긴장감에 드레스를 움켜 쥐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로의 눈빛을 읽은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먼저 내려 헤스티아를 정중하게 에스코트했다. 헤스티아는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황궁의 모습과 자신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눈앞이 아찔하고 손발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손끝에서 전해져 오는 강한 압박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정신 차리세요.”
이안의 나지막한 속삭임에 헤스티아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녀는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이제 더 이상 브렌하임의 영애가 아니라 백 년 만에 나타난 뤼네로서 황궁에 첫발을 내딛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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