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황자의 숲
헤스티아는 며칠째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황궁에서 처음 아침을 맞은 날, 승전 연회복 준비로 부티크에서 방문했을 뿐 이후에 그녀를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2황자와 황녀를 거쳐 가까운 방계까지 뤼네와 공명을 시도했지만 반응은 모두 미적지근했다. 황제마저 흥미를 잃었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1황자는 오늘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별궁에 방치된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시중을 드는 시녀들도 날이 갈수록 태도가 느슨해져 헤스티아가 몇 번을 불러야 반응했다. 아마도 1황자와 만나야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날 것이었다.
헤스티아는 이안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전공을 인정받아 작위와 영지까지 하사받은 그를 두고 시녀들이 하루 종일 떠들어대는 것을 들으니, 오히려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좋으니 정원 산책이라도 가시겠어요?”
지루해하는 헤스티아에게 시녀가 말을 건넸다. 헤스티아는 흔쾌히 청을 받아들였다.
화려하게 꾸며진 장미 정원에 도착하자 시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곳은 이벨린 황녀님을 위해 만들어진 정원입니다. 특별히 영애께 산책을 허락하셨으니 영광으로 여기셔도 좋습니다.”
어쩐지 속이 뒤틀린 헤스티아는 설명을 건성으로 흘려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화려한 장미정원보다 그 너머에 자리한 조용한 숲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시녀가 말을 이었다.
“저곳은 노아르 황자 전하의 개인 숲입니다. 웬만하면 관심을 두지 마세요. 1황자 전하의 숲에는 초대받은 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시녀는 곁눈질로 헤스티아를 살폈다. 이틀 전 1황자가 황궁으로 복귀했지만 아직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호사가들이 연일 수군거렸다. 헤스티아는 노아르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노아르 황자 전하는 보기보다 엄격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헤스티아는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는 시녀의 태도가 거슬렸다. 이대로 1황자와 만나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무시에서 끝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멀리서 황녀궁 시녀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황녀궁 시녀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별궁의 시녀가 헤스티아에게 다가왔다.
“황녀궁에서 급하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정원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마십시오.”
헤스티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시녀가 불편했는데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사라지는 시녀의 뒷모습을 보던 헤스티아는 노아르의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초대받은 사람만 갈 수 있다는 황자의 숲.
겉보기에는 브렌하임에 널려 있는 숲들과 다를 바가 없는데 금칠이라도 발라뒀나 싶었다.
숲을 처음 본 순간부터 브렌하임이 그리워졌다. 답답한 마음을 잠시라도 숲에 묻어두고 싶었다. 브렌하임에서 자유롭게 뛰놀며 자란 그녀에게 숲은 놀이터이자 안식처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고요하고 평온했다. 주변에는 자신을 살피는 사람 하나 없었다.
‘황자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지 뭐.’
결심을 굳힌 헤스티아는 노아르의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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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숲에 누워 낮잠을 청하던 노아르는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검은 염색이 제대로 빠지지 못해 얼룩덜룩 엉망이었다. 급한 마음에 뒷골목 주술사에게 염색 마법을 부탁했더니 결국 이 꼴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덕분에 살았지.’
엉망이 된 자신의 머리를 보고 아연질색하던 황제의 표정이 떠오르자 노아르는 크게 웃어 버렸다.
“크하하하.”
급하게 부른 마법사들도 제대로 머리를 복구하지 못하자 황제는 그의 잘못을 추궁하기보다 머리부터 걱정했다. 그 덕에 노아르는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다.
‘에르반이 내일 온다고 했었나…’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운 에르반이 머리색을 돌려놓기 전까지 노아르는 1황자궁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꼴로 영애 앞에 나타나 황실 망신시키지 말고 에르반이 올 때까지 근신하거라!”
단호한 황제의 명령에 한시라도 빨리 뤼네를 만나고 싶었던 노아르는 어쩔 수 없이 오랜만에 숲에서 여유를 즐겼다.


빠직.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에 노아르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한가롭게 누워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호위병들이 숲 외곽을 지키고 있으니 위험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숲에 초대한 자도 없었다.
“에잇, 여긴 황자의 숲이라면서 관리도 안 하나?”
그때, 풀숲을 헤치며 한 여인이 나타났다. 숲을 얼마나 헤맸는지 치맛자락에는 풀잎이 잔뜩 묻어 있었다. 노아르를 발견한 여인의 눈빛이 한순간 멈칫하더니 곧이어 밝게 빛났다.
“하아… 다행입니다. 제가 길을 잃어서 그러는데 1황자궁이 어느 쪽일까요?”
노아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1황자궁을 왜 찾지?”
노아르는 여인을 꼼꼼하게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자인데…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는 걸 모르나?!”
헤스티아의 미간이 순간 움찔거렸다. 머리색이 얼룩덜룩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풀숲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것을 보니 높은 지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숲은 1황자의 초대 없이는 들어올 수 없다고 했으니 1황자의 사람임은 분명했다. 게다가 초면에 반말부터 하는 걸 보니 예의도 없는 자였다.
‘황자의 뒷배만 믿고 까부는 무례한 자로군.’
절대 자신을 낮추지 말고 함부로 대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던 이안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헤스티아는 이안이 가르쳐 준 대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노아르를 내려다봤다.
“무례를 용서해 주지. 황궁이 오랜만이라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은데 1황자궁까지 안내해주면 적절한 사례를 하도록 하겠다.”
노아르는 갑자기 자신을 하대하며 도도한 태도를 취하는 그 모습에 잠시 말을 잊었다. 자세만큼은 황족 못지않게 우아했지만 머리는 나뭇잎이 붙어 엉망이라 그 이상한 부조화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푸흡.”


헤스티아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시종일관 무시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웃기까지 하다니.
“야!”
헤스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놀란 헤스티아가 다급하게 입을 막았지만 이미 노아르가 들은 뒤였다. 노아르의 눈썹이 잔뜩 치켜 올라가고 두 눈은 둥그래졌다.
“야? 지금 나한테 야라고 한 거야?”
잠시 눈치를 살피던 헤스티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방금은 미안했다. 너무 화가 나서 그만…. 하지만 네가 먼저 시작한 것이다. 면전에 대고 웃다니 참으로 무례하구나.”

노아르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 너 내가 누군지 알고…”
“흥, 넌 내가 누군지 알고! 1황자 전하께 고자질해도 소용없다. 황자님도 나를 함부로 못 하실 테니까!”
“네가 누군데?”
헤스티아는 다시금 고고한 자세를 취하며 살짝 고개를 치켜 세웠다. 어떻게 해서든 이 무례한 남자의 콧대를 꺾고 싶었다.
“나는 헤스티아 브렌하임이다. 황궁에 살고 있으니 들어본 적 있겠지?”
“…!”
노아르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잠시 말을 잊은 그가 천천히 되물었다.
“네가 헤스티아 영애라고? 그 뤼네?”
“그래, 내가 바로 그 뤼네다. 어때? 이제 1황자님께 안내할 마음이 들었느냐?”
노아르는 그제야 헤스티아를 찬찬히 살폈다.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얌전한 척 고상이나 떠는 귀족 영애일 줄 알았는데, 자신의 면전에 대고 ‘야’라고 소리치는 여자라니. 그런데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지켜보고 싶어졌다.
“드디어 만났네.”
노아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만나고 싶었어, 진심으로.”
갑자기 친근하게 다가온 그의 태도에 헤스티아는 머뭇거렸다. 예법에 따르면 낯선 사내와 사사로이 악수를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헤스티아는 선뜻 거절하지 못했다. 즐거움으로 반짝이는 그의 눈을 마주하자 쉽게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필시 이 사내는 사람을 유혹하는 법을 아는 자이다.
“반가워.”
노아르가 가벼운 눈짓을 하며 손을 더 가까이 내밀었다. 헤스티아는 마지못해 그의 손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잡았다가 금세 놓았다.
“흠흠… 이제 날 안내해 줄 마음이 생겼어?”
“1황자는 왜 찾아가는 거야? 어차피 곧 널 만나러 갈 텐데.”
“황자님께서 날 곧 만나러 갈 거래? 언제?”
기대감으로 두 눈을 반짝이며 헤스티아가 다가오자 노아르는 살짝 움찔했다.
“아마… 내일?”
“확실한 거야?”
황제의 재촉에 에르반이 다급하게 오고 있다는 전갈을 오전에 받았으니 아무리 늦어도 내일이면 도착할 것이다. 노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스티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구나. 내일이구나… 너는 1황자 전하의 시종이니? 아니면 친우?”
노아르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을 밝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정확하게는 ‘황자 노아르’가 아닌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모습이 궁금했다.
“비슷한 거야. 황자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
“그래서 그랬군.”
그제야 헤스티아는 그가 왜 이렇게 오만방자한지 알 것 같았다.
“내일 황자님께서 방문하신다면 굳이 내가 찾아갈 필요는 없지.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걸 비밀로 해줘. 그럼 나도 네 무례를 덮어 줄게.”
“황자님을 보고 싶었던 거야? 이렇게 찾아올 정도로?”
헤스티아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렴. 만난 적도 없는 분을 왜 보고 싶겠니?”
“…….”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헤스티아는 처음 보는, 그것도 황자의 최측근에게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일일이 떠들어대긴 싫었다.
“길을 잃은 것뿐이야. 황자궁에는 이제 볼 일이 없으니 황녀님의 장미정원으로 향하는 방향을 알려줘. 곧 시녀가 날 찾으러 올 것 같아.”
노아르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까지 1황자궁을 찾던 사람이 길을 잃었을 뿐이라니. 뻔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의심은 잠시였다. 헤스티아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숲을 빠져나가려 했다. 노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하는 거야!”
헤스티아가 짜증을 내며 그의 손을 뿌리치자 이번에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노아르는 그녀를 붙들어 둘 적당한 말을 고르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건 거래가 안 맞는데.”
“…뭐?”
“나는 황자의 숲에 몰래 들어온 엄청난 사실을 덮어주는데, 너는 고작 무례한 걸 덮는 것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 거야? 너 황자님이 숲에 얼마나 민감한지 알고나 있어? 들키면 최소한 곤장 열 대라고.”
그의 말에 헤스티아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설마 정말 믿을 줄은 몰랐던 노아르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치사한 자식… 원하는 게 뭐야?”
노아르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어리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헤스티아는 그의 표정에 불안함을 느꼈지만 얼른 사태를 수습하고 장미정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 뤼네를 보여줄 수 있어?”
“미친!”
헤스티아는 다급하게 말을 끊었다. 왜 이 자 앞에서는 평정심이 자꾸 흐트러지는지 알 수 없었다.
헤스티아의 거친 발언에도 노아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짜증이 치민 그녀와는 달리 노아르는 더없이 즐거워 보였다.
“나 진짜 보고 싶었거든.”
“다음에 봐. 어차피 가슴선이 드러난 드레스도 자주 입으니까 멀리서 보면 되잖아.”
“아니, 나는 지금 보고 싶어. 지금 당장.”
노아르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뤼네를 보여주기 전에는 자신을 놓지 않을 것 같았다. 멀리서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아 그녀의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헤스티아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헤스티아가 노아르를 향해 눈을 흘겼다.
“너… 황자님께는 절대 비밀이다.”
노아르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럼, 당연하지. 나만 알고 있을게.”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은 헤스티아가 드레스 단추를 풀어 뤼네 문양을 드러냈다. 햇빛을 받은 뤼네 문양은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넋이 나간 노아르의 진심 어린 칭찬에 헤스티아는 부끄러워졌다.
“너 진짜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된다. 브렌하임은 끝까지 복수한다, 그런 말 들어봤지?”
헤스티아의 서슬 퍼런 협박에 노아르는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응, 알았어.”

노아르의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순간 위험하게 느껴져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혹시… 만져봐도 돼?”
“그만하지? 슬슬 도가 지나친 것 같은데. 나가는 방향이나 알려줘.”
드레스를 다시 여미던 헤스티아의 눈빛에 서늘한 냉기가 차올랐다. 노아르는 아쉬웠지만 더 이상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환심을 사야 할 마당에 미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는 순순히 장미정원 방향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숲 입구에 다다르자 노아르는 헤스티아와 조금 더 함께하고 싶었다.
“여기… 아직 나뭇잎이 붙어 있어.”
“어? …어디?”
노아르는 헤스티아의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을 하나씩 떼어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다정한 손길에 헤스티아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헤스티아는 조심스레 그를 바라봤다. 얼룩덜룩한 머리 때문에 미처 몰랐는데, 가만히 보니 생각보다 꽤 근사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노아르의 눈매가 나른하게 휘어졌다. 자신이 얼마나 근사하게 웃는지 잘 아는 사람처럼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헤스티아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오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이름… 궁금하지 않아? 알려줄까?”
나지막한 목소리에 헤스티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여기서 이 남자와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다.
“아니, 안 궁금해. 말하지 마.”
헤스티아는 그대로 숲을 벗어나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노아르는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흡…”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일 봐, 헤스티아.”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