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첫 번째 공명
황궁에 복귀한 뒤 한동안 이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대공 승작 연회 준비에, 갑작스럽게 하사된 에른하르트 영지와 자작 작위까지. 거기에 공작부인과 라일까지 수도에 도착하면서 하루가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게다가 어제는 이안의 작위 소식을 들은 라일이 술집에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그 뒷수습까지 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전쟁터에서는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없던 그였지만, 연이은 일들에 지친 몸은 끝내 피로를 이기지 못했다. 창가에 앉은 이안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의식이 희미해지자 귓가에 낯익은 노랫소리가 은은하게 되살아났다. 어느새 그의 의식은 헤스티아가 노래를 부르던 마차 안에 머물러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제야 그 노랫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자작님, 이안 자작님.”
그를 부르는 소리에 이안은 스르르 눈을 떴다.
“아, 미안해요. 나를 부르는 줄 몰랐어요. 아직 자작이라는 호칭이 익숙하지 않아서…”
“점점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래야겠죠. 무슨 일이죠?”
“황궁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이안은 산적한 업무들을 떠올리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황제가 자신을 제대로 부려먹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황궁에 가면 헤스티아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를 둘러싼 온갖 소문은 원하지 않아도 귀에 들어왔다. 낯선 황궁에서 외롭고 힘들 것 같았지만, 지금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괜히 나서는 것은 그녀에게 더 많은 소문만 안겨줄 뿐이었다.
이안은 책상 한쪽에 놓인 푸른 종이 전령새를 바라봤다.
“전령새… 사용할 줄 모르나.”
이안은 애꿎은 전령새만 만지작거렸다. 언제든 보내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헤스티아로부터 온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용법을 자세히 알려줄 걸 그랬나.’
답답한 마음에 이안은 전령새를 무심코 구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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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늦는다는 연락에 이안은 황제 전용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다. 황제의 최측근만 올 수 있는 곳에 안내를 받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영광이었다. 황금빛으로 장식된 응접실은 화려함보다 절제가 돋보였다. 황제의 성정을 그대로 닮은 공간이었다.
이안은 중앙 벽에 커다랗게 걸린 스테판 황태자의 초상화를 한참 바라보았다. 1황자와 외모는 닮았지만 풍기는 느낌이 달랐다. 1황자는 곱게 자란 귀공자의 분위기인 반면, 스테판 황태자는 아찔하고 위험한 분위기였다. 어쩌면 황녀 쪽이 아버지를 더 닮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황제의 목소리에 이안이 서둘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황제의 뒤를 이어 노아르와 에르반도 들어왔다. 초상화 앞에 서 있는 이안을 보고 황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스테판의 초상화는 처음 보는 것인가? 노아르와 많이 닮았지?”
“아무래도 부자지간이니까요.”
노아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처음 봅니다. 소문대로 눈을 뗄 수 없는 분이시군요.”
“실물이 훨씬 대단했다고 장담할 수 있네. 요즘 많이 바쁠 텐데 급하게 불러서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자리에 앉으려던 황제가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그 모습에 노아르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요즘 두통이 잦으신 것 같습니다.”
“늙어서 그런게지. 네 녀석이 말썽만 안 부리면 덜 아플 것 같다.”
황제는 어색하게 웃는 노아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다행이다, 머리색이 돌아와서. 그럼 다들 앉지.”
소파에 모두들 착석하자 황제가 천천히 본론을 꺼냈다.
“요즘 예상외로 주변국들이 시끄러워. 뤼투아를 점령하면 잠잠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제국을 도발하려는 발칙한 짓거리들을 하고 있단 말이지. 칼데이크가 요즘 서국과 친밀한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뤼투아 내에 반란군이 잔존하고 있는 것도 문제고…”
황제가 노아르를 향해 눈짓을 보내자 노아르가 말을 이었다.
“자네, 살롱 골드 메달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나?”
이안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에른하르트에 최근 생긴 살롱인데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꽤 이름이 알려졌지. 그곳에서 뤼투아 노예 거래가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정황을 발견했어. 폐하와 나는 뤼투아 반란군과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어.”
‘아직 영지 정보를 파악 중인데, 벌써부터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되다니…’
이안은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짚었다.
“자네가 1황자를 도와 해당 건을 조사해주었으면 하네. 이제 자네의 영지이니 책임져야지.”
이안은 필시 황제가 자신을 괴롭히기로 작정한 것이라 믿었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황제의 무언의 압박에 결국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명 받들겠습니다.”
똑똑.
그때, 응접실 문 너머에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헤스티아 영애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 해라.”
이안의 시선이 저절로 문 쪽을 향했다.
문이 열리고 헤스티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화려하게 치장한 헤스티아의 모습은 이안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가르쳐준 대로 예법을 제대로 지키며 인사하는 모습에 이안은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이안과 눈을 맞춘 헤스티아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잠시 뒤 헤스티아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자세가 흐트러진 헤스티아는 황제의 부름에도 반응을 못하더니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았다.
이안은 어리둥절했다. 방금까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던 그녀가 한순간에 무너진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슬며시 옆에 앉은 노아르를 쳐다봤다. 노아르의 눈빛이 장난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안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헤스티아는 한순간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황제가 자신을 여러 번 불렀음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안이 쳐다보고 있는데도 자꾸만 흐트러지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헤스티아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눈앞에서 생글거리며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든 남자. 분명히 얼룩덜룩한 머리였는데 지금은 밝은 백금발을 휘날리며 즐겁다는 듯 그가 웃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헤스티아 브렌하임 영애. 1황자인 노아르 레제프 아르세리온입니다.”
노아르는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씩 힘주어 발음했다. 헤스티아는 주변 사람들만 없었다면 그의 뺨을 한 대 갈기고 싶었다. 그녀는 노여움이 비친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그의 인사에 간신히 답했다.
“…반갑습니다, 전하. 헤스티아 브렌하임입니다.”
두 사람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에르반이 말을 꺼냈다.
“그럼 노아르 전하께서 영애의 뤼네에 손을 올려 보시겠습니까?”
헤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그가 반응이 없기를 기도했다. 만약 그가 뤼네의 주인이라면… 그에게 앞으로 휘둘릴 생각에 아찔해졌다.
노아르가 헤스티아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갔다. 헤스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바짝 움츠렸다. 노아르는 가벼운 미소를 흘리며 귓속말을 했다.
“긴장하지 마. 처음도 아닌데.”
헤스티아는 욕지거리가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노아르는 그녀의 반응이 그저 재밌었다.
노아르의 손가락이 천천히 뤼네 문양에 닿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숨이 동시에 멎었다.
“…!”
“…!”
손끝에서 시작된 뜨거운 감각이 순식간에 서로의 몸을 관통했다. 노아르는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두 눈만 깜빡거렸다. 뤼네의 따뜻하고 맑은 기운이 그의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마력에 그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노아르는 점점 젖어드는 헤스티아의 눈빛에 견디기 힘든 갈증이 일었다. 헤스티아는 그의 뜨거운 시선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노아르는 어쩐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의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등을 돌려 그녀를 가리고 선 채 노아르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떨리는 손끝을 감춘 채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제야 헤스티아도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봤다. 노아르는 그 도발적인 눈빛이 마음에 들어 입꼬리가 내려가지 못했다.
“어쩌지, 영애. 나인 것 같은데?”
모두들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두 사람을 감싸는 뤼네의 빛 줄기가 응접실을 환하게 비추었다가 노아르가 손을 떼자 스르륵 사라졌다. 현실감 없는 신화적 광경에 모두들 말을 잇지 못했다.
“…황자님, 축하드립니다.”
에르반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제서야 황제도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대단하군, 대단해. 노아르가 뤼네의 주인이었군!”
“….”
이안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가 없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노아르가 헤스티아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부터 불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빛에 휩싸이자 이안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그가 평생 처음 느껴보는 어둡고 추악한 마음이었다.
헤스티아는 공명이 끝나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축하 인사를 서로 건네는 사람들을 보며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폐하, 죄송하지만… 저는 이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몸이 조금 좋지 않아서…”
어두운 표정의 헤스티아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영애가 기력 소모가 심했나 보군. 어서 쉬도록 해라.”
이안이 머뭇거리는 찰나, 노아르가 재빨리 나섰다.
“그럼, 제가 영애를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해라. 할 말이 있으니 이안 자작만 남고 모두 물러가라.”
따라 나서려던 이안이 마지못해 답했다.
“…네, 폐하.”
사라지는 헤스티아의 뒷모습을 보며 이안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노아르와 헤스티아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를 불편해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둘만 둬도 되는 걸까. …그렇지만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이안은 갑갑한 마음에 목깃만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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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 헤스티아 영애!”
헤스티아는 노아르의 부름에도 아랑곳 않고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도 그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노아르가 달려와 그녀를 붙잡고 나서야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하아… 정말 빠르군요.”
잠시 숨을 고른 노아르가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헤스티아는 그의 눈부신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자 마음이 흔들릴 것만 같아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버렸다.
자세를 바로 고친 노아르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흠… 영애가 화가 난 것은 이해합니다.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노아르의 말에 헤스티아는 그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매는 사납게 치켜 올라가 마치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황자님은 절 기만하셨어요! 그날 황자님이 누구인지 알렸어야죠. 절 놀리는 게 재밌으셨나요!”
“영애, 나는 황자가 아니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영애 혼자 오해해 놓고 이제 와 내 탓을 하면 내가 더 억울한걸요.”
뻔뻔한 노아르의 태도에 헤스티아의 목소리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황자님과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황자와 이보다 가까운 사이가 있을까.”
정중하던 그의 자세가 점점 흐트러지더니 말끝도 짧아졌다. 노아르는 어느새 오만한 황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순식간에 바뀐 태도에 헤스티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그를 노려만 봤다.
곱씹어보면 황자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왜 황자의 숲에 있는 그를 황자 본인이라고 의심하지 못했을까.
낯선 이에게 스스럼없이 하대하고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던 그 태도를 어떻게 시종이라고 생각했을까.
헤스티아는 안일하게 대처한 과거의 자신에게 결국 화살을 돌렸다. 바보같고 한심해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울게 된다면 더 비참할 뿐이었다. 헤스티아는 눈물을 간신히 삼킨 뒤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지금이라도 오해가 풀렸으니 다행입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차갑게 뒤돌아선 헤스티아의 앞을 노아르가 가로 막았다. 생글거리는 얼굴에 헤스티아는 간신히 진정된 마음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간신히 입술 끝만 억지로 끌어올렸다.
“…제게 볼 일이 남으셨나요, 전하.”
노아르는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조금 전 손끝을 타고 번졌던 뜨거운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녀를 자꾸만 붙잡으려 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그는 생경한 기분을 감추듯 미간에 옅은 주름을 만들었다.
“헤스티아 영애.”
그의 목소리가 낮고 차분하게 울렸다.
“날 미워해서 영애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노아르의 눈빛은 어느새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싸늘한 기세가 피부를 타고 스며들며 등골을 서늘하게 훑었다.
“폐하는 이미 마음을 굳히셨어. 뤼네와 내가 계속 성공적으로 공명하게 된다면 우린 곧 혼인하게 될 거고 황자비도 영애 차지가 되겠지. 그렇게 되면 영애는 상상도 못할 막대한 부와 명예를 손에 넣게 될 거야.”
헤스티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진심을 살폈다. 그녀가 떠올렸던 수십 가지의 가능성 중 가장 최선의 선택을 제시한 그가 의심스러웠다.
“정말 저와… 혼인하실 생각이신가요?”
“왜 내 말이 의심스럽나. 언젠가는 해야 할 결혼이야. 그동안 관심을 보인 가문이나 영애는 많았지. 하지만 딱히 누구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
노아르는 잠시 헤스티아를 바라보다 입꼬리를 느슨하게 끌어올렸다.
“그런데 영애는 마음에 들어. 물론 뤼네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지만 외모도 내 취향이고, 성격도 재미있어. 영애의 생각은 어때? 내가 남편감으로 부족한가?”
“설마요… 제국에서 황자님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헤스티아는 선뜻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노아르의 제의가 달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황자비가 될 준비가 되어 있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나와 테르마리온 공작가 사이에 혼담이 오간 것을 알고 있나?”
헤스티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드문 이야기였다.
“폐하께서는 내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가문을 원하셔. 황태자 자리를 두고 2황자와 경쟁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지. 그런 의미에서 테르마리온은 좋은 선택지지.”
“그런데도 저를 선택하시겠다는 건가요?”
노아르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테르마리온보다 영애가 줄 수 있는 것에 더 마음이 끌렸어.”
“…뤼네가 돈이나 권력보다 대단할까요?”
“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지. 나에게 부족한 건 마력뿐이야. 그리고 그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영애뿐이고.”
헤스티아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자신을 진지하게 원한다는 그의 말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뤼네가 아닌 황자비의 자격까지 자신이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전 황자비가 될 자신이 없어요… 브렌하임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혼인 말고도 다른 방법이…”
그의 시선이 뜨겁게 부딪혀 와 헤스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나와 공명을 했을 때 영애 표정이 어땠는지 혹시 알고 있나? 나는 다른 이와 뤼네를 공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래서 혼인을 제안하는 거야. 나에게만 묶일 수 있도록.”
“내가 이렇게 정성을 들이며 영애를 설득하고 있잖아. 이제 그만 내게 넘어오지 그래?”
호흡이 맞닿을 만큼 그가 가까이 다가왔지만, 사슬에 묶인 것처럼 헤스티아는 꼼짝할 수 없었다. 첫 만남 때도 느꼈지만, 노아르가 진심으로 다가올 때면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리고 말았다.

“좋게 생각해. 영애는 최고의 혼처를 찾아 가문을 살리게 되는 셈이 되고, 나는 마력과 아내를 동시에 얻는 것이니 우리 둘 다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대가 협조하는 만큼 나도 성실하겠다고 약속할게.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야.”
헤스티아는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뤼네가 발현된 순간부터 과연 자신에게 선택권이라는 것이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 눈앞에는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고 있었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고 했어. 까짓 것 황자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주겠어.’
헤스티아는 노아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황자님. 저도 의무를 다 할 테니 황자님께서도 절 제대로 대우해주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노아르는 당돌한 그녀의 태도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내민 손을 잡은 노아르는 악수 대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손등에 남은 온기에 헤스티아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
“아주 마음에 들어, 나의 피앙새.”
헤스티아는 능글거리는 그의 태도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미소는 거두지 않았다. 황자가 작정하고 놀릴 생각이라면 자신도 하면 그뿐이었다. 황자를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별궁 시녀들의 콧대를 먼저 꺾어주고 싶었다.
“그럼 절 별궁까지 안내해주시겠어요?”
“물론이죠.”
노아르가 그녀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손을 얹을 줄 알았던 헤스티아는 망설임 없이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예상 밖의 당돌함에 노아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춘 채 정중하게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이 당돌한 여자 때문에 지루했던 일상이 재미있어질 것만 같았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