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엇갈린 첫 만남
불안한 마음에 이벨린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거칠게 뜯었다. 카일리스가 재빨리 그녀의 손을 붙잡지 않았다면 피가 났을지도 몰랐다.
“응접실이 준비되었습니다. 직계 황족분들, 에르반님, 그리고 헤스티아 영애만 입실하십시오.”
서둘러 응접실을 준비하느라 시종장의 머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원래는 고위 귀족들까지 참석하는 첫 접견이 예정되어 다이아홀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노아르가 황궁을 비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황궁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이미 귀족들은 뤼네를 맞이하기 위해 황궁에 모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작 1황자가 사라지다니.
뤼네의 첫 접견 자리에 1황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황실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즉시 입단속을 명하고 소수의 인원만 응접실로 들이라 지시했다.

이벨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신이 철저하게 챙겼어야 했는데, 아프다는 노아르의 말을 덜컥 믿어 버렸다.
‘하… 이 미친 놈을 어떻게 해야 하지…’
이벨린은 응접실에 들어가기 전, 카일리스에게 귓속말을 했다.
“빨리 노아르를 찾아와. 승작 연회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해.”
이벨린은 품속에서 마력이 깃든 황금 나침반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내가 노아르에게 표식을 남겨뒀어. 나침반을 따라가.”
카일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사라졌다. 이벨린은 숨을 고른 뒤 화사한 미소를 띠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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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잠들었던 걸까.
간신히 눈을 뜬 노아르는 얻어맞은 뒤통수가 지끈거려 옅은 신음을 쏟아냈다.
“으윽…”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자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되고 습기 찬 벽돌 틈에서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풍겼다. 어둠 속에 희미한 횃불만 일렁이는 것을 보니 지하 감옥에 갇힌 듯했다.
“하… 내가 안일했어.”
그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노아르는 말없이 천장만 바라봤다. 비밀 살롱에 잠입하기 위해 마법으로 머리카락까지 물들이며 신중하게 움직였는데…
‘아, 렌은!’
그 순간, 자신을 지키려다 피투성이가 된 호위기사 렌이 떠올랐다.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맞은편 감방에 피로 얼룩진 거구의 남성이 쓰러져 있었다. 렌인 것을 확인한 노아르의 표정이 굳었다.
‘꼼짝없이 갇혔구나…’
황궁을 빠져나온 지 삼 일째.
오늘 뤼네가 도착한다고 했으니 황궁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황제만큼은 자신의 부재를 모르길 바랐는데, 결국 일을 망쳐 버렸다.
황궁에선 지금쯤 모두가 뤼네를 맞이하고 있겠지.
결국 로이드가 뤼네를 손에 넣게 될까.
기회만 있다면 분명히 뤼네는 자신의 것이 될 텐데…
노아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건은 삼 일 전, 쌍둥이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노벨리스 길드에서 온 연락에서 시작되었다.
에른하르트에 위치한 살롱 골드 메달.
매달 15일 밤 파티 개최.
황자님과 닮은 접대부가 있다는 소문이 있음.
길드의 전령을 본 순간, 노아르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아무리 밟아도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오는 것들에 치가 떨렸다.
노아르는 이 모든 비극이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미인이었다. 하지만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그토록 광기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분명 이벨린의 매혹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황가의 힘이 있었을 것이다.
스테판이 죽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를 갈망하는 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그와 닮은 소년들을 만들어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의 작은 섬에서 귀양하던 어린 시절, 노아르 역시 그런 자들에게 납치될 뻔한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아버지를, 그리고 아버지를 닮은 자신을 탐하는 시선에 지독한 혐오를 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노아르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호의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부터 의심하는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황궁으로 돌아와 권력을 손에 넣은 뒤, 노아르는 아버지와 자신을 욕망하는 자들을 처단해 나갔다. 그리고 그 배후에서 로이드의 흔적을 발견했다.
‘자신의 아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남자를 이용해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황제가 알게 된다면….’
살롱에 잠입한 목적까지 들킨다면, 그 유약한 황제는 반쯤 무너질지도 몰랐다. 차라리 자신을 욕망에 취한 방탕아로 오해하는 편이 낫다고 노아르는 생각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쓰러지기 직전 마주했던 금발 소년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노아르 전하, 반갑습니다. 검은 머리도 어울리시네요.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아버지를 쏙 빼닮은 금발의 미소년.
입가의 점까지도 똑같아 기분 나쁘게 소름 끼쳤던 소년.
아마 아버지의 10대 모습이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노아르는 그자가 소문의 접대부임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저 아덴입니다.”
노아르는 희미한 기억 속에서 ‘아덴’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저에게 이 브로치도 선물해 주셨는데… 기억나시나요?”
소년이 들어 보인 에메랄드 브로치를 유심히 살펴보던 노아르는 마침내 그를 기억해냈다. 그 브로치는 성년식 때, 자신의 시종들에게 나눠 준 하사품이었다. 자신의 기억 속 아덴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귀여운 인상의 소년이었다.

“네가 그 아덴이라고? 얼굴이 다른데…”
“하하하, 제가 좀 많이 변했죠? 어떠신가요, 마음에 드시나요?”
천진난만하게 웃던 소년의 눈빛이 불빛에 비쳐 번들거렸다.
“전 언제나 전하가 부러웠답니다. 잘 나신 외모도 건방진 성격도. 전 이제 새롭게 태어났어요. 제 이름은 라비에르입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전하. 또 뵙지요.”
퍽!
그 순간 강한 충격이 뒤통수를 덮쳤다. 라비에르의 웃음소리가 기묘하게 흩어지며 노아르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의 충격이 되살아나자 노아르는 낮게 혀를 찼다.
“쳇, 건방진 놈. 다시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아덴을 우연히 만나기 전 둘러본 살롱 내부에는 두려움의 눈빛이 깃든 뤼투아인들이 있었다. 불법 노예 매매까지 자행되고 있다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일이었다. 아직 로이드와의 연결 고리를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믿을 수 있고 힘이 있는 자가 필요했다.
노아르는 이안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철컥.
어디선가 쇠사슬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울리더니 감옥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놀란 노아르가 창살에 다가가자 문이 열리며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카일리스!”
“전하, 무사하십니까?!”
“오, 내 사랑. 날 구해주러 올 줄 알았어.”
카일리스는 불쾌한 얼굴을 한 채 자물쇠를 칼로 내리쳤다.
“…오지 말 걸 그랬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왜 그렇게 되신 것입니까?”
노아르는 검게 물든 머리카락을 들어 보였다.
“아, 변장하느라.”
“전하의 미모가… 급하락한 것 같습니다.”
카일리스의 진심 어린 평가에 노아르는 크게 웃어 버렸다.
“하하하, 난 마음에 드는데. 카일은 금발이 취향이었군.”
감방 문이 열리자 노아르가 가볍게 옷을 털며 밖으로 나왔다.

“그나저나 렌 녀석은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전하를 제대로 보필도 못하고.”
노아르는 말없이 쓰러진 렌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짧게 한숨을 내쉰 카일리스는 뒤따라온 부하에게 렌을 부탁했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카일리스가 나침반을 흔들어 보였다.
“황녀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평소에는 짜증났던 추적 마법이 이렇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니…’
“우리 여동생님의 집착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군.”
“길드장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짜증나신 건 이해합니다만, 그래도 혼자 움직이시면 안 됐습니다. 폐하께서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하… 뭐라고 둘러대지? 술독에 빠졌었다고 할까? 아니면 여자?”
“그렇게 자신을 깎아내리고 싶으십니까? 전하를 위해 애쓰시는 황녀님도 생각해주십시오.”
“아, 너무 서운한데.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카일은 이벨린만 챙기는군.”
노아르의 애교 섞인 투정에 카일리스는 진심으로 질린 표정을 지으며 화제를 바꿨다.
“여기는 어떻게 할까요? 지금 기분 같아서는 폭발시키고 싶은데.”
“이곳은…”
노아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는 싹 갈아엎고 싶었지만, 제대로 뒤를 캐려면 그냥 두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우선은 그냥 두자. 꺼림칙한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야. 이 작자들이 앞으로 무슨 일을 꾸미는지를 알아야겠어.”
“무슨 단서라도 찾으셨습니까?”
“이놈들 제대로 미친 것 같아. 죽은 내 아버지와 똑같은 얼굴을 한 소년이 있더군. 이제는 비슷한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 것 같아. 아무래도 마법으로 외형을 바꾼 것 같은데…”
“길드장에게 마도회 쪽도 파보라고 전하겠습니다.”
노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멘티아에서 황족의 외형을 흉내 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죄였다. 하물며 죽은 황태자와 똑같은 얼굴을 만들어 내다니. 엄청난 수준의 마법과 치밀한 은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도회가 연루되어 있다면 결코 묵과할 수 없었다.
“여기는 저희 쪽에서 마무리할 테니 황자님께서는 서둘러 입궁하십시오.”
주변을 정리하던 카일리스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 전에 그 머리 좀 어떻게 해야겠습니다. 그 상태로는 정문도 통과 못할 것 같습니다.”

노아르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하하하, 그 정도인가. 여기 근처에 주술사가 살고 있으니 대충 복구하고 가지 뭐.”
카일리스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도 노아르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믿을 수 있는 자입니까? 그냥 에르반님께 부탁하시는 것이…”
“이러다 정말 늦겠군. 그럼 뒷일을 맡기지. 황궁에서 보자고.”
노아르는 카일리스의 염려는 무시한 채, 서둘러 지하 감옥을 벗어났다. 드디어 기다리던 뤼네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로이드와 뤼네가 공명에 성공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로이드 따위에게 뒤처질 자신이 아니었다.
‘어차피 뤼네의 주인은 나니까.’
그의 눈동자에 벅찬 기대가 차오르며 감추지 못한 기쁨이 눈가에서부터 환하게 번져 나갔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