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절망은 언제나 나의 곁에
똑. 똑.
짧게 두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갑지 않은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집사 베른의 알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헤스티아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입을 열었다.
“들어와요.”
어두운 표정의 베른 뒤로, 콜커스 상단주 아서가 들어왔다. 그는 예의를 차려 인사했지만, 눈동자에는 무심한 거리감이 옅게 깔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헤스티아는 주눅 들지 않으려는 듯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우십니다, 헤스티아 영애.”
아서는 느긋한 시선으로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입가에는 사람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값비싼 물건을 감정하듯 노골적이었다.
“브렌하임은 몰락해도 영애의 가치는 여전하군요. 영애의 아름다움을 저 드레스가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한 벌 선물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베른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헤스티아는 괜찮다는 듯 베른을 한번 바라보고는 아서의 희롱을 여유 있게 넘겼다.
“선물을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잡담은 이쯤에서 접으시고, 용건을 말씀하시죠.”
짧은 침묵이 흘렀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아서의 눈빛이 서서히 식어 갔다.
“이번 주 내로 밀린 대금을 전액 상환하십시오.”
헤스티아는 밀려드는 떨림을 멈추려 두 손을 꽉 쥐었다.
“너무 갑작스럽군요. 브렌하임과 콜커스 간의 신의가 이 정도였나요?”
“영애, 신의는 계약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존재합니다. 저희는 충분히 인내하고 기다렸습니다. 콜커스 상단을 탓하기 전에 브렌하임의 어그러진 신의를 먼저 살펴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서는 노골적으로 짧게 혀를 찼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만큼 주먹을 움켜쥔 헤스티아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어린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업신여김을 받는 일은 낯설지 않았다. 멸시도, 은근한 조롱도 이미 수없이 견뎌왔다. 이 정도로는 그녀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숨을 조용히 가다듬고 양피지를 꺼내 아서에게 내밀었다.
“분명 상환일이 보름 뒤로 명시되어 있는데, 어째서 상단주는 브렌하임을 모욕하시는 거죠?”
헤스티아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 당당한 태도에 아서는 기막혀 했다.
“브렌하임 재정 사정을 뻔히 아는데, 지금 없는 돈이 보름 뒤라고 생긴답니까?”
“그건 보름 뒤에 알게 되겠죠.”
잠시 침묵하던 아서는 다시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계약서를 찬찬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성급했군요. 혹시나 하는 염려에 조급함이 앞섰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길.”
헤스티아는 마치 너그럽게 용서를 베푸는 사람처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서의 표정이 묘하게 비틀렸다.
“그럼 보름 뒤에는 즐거운 얼굴로 마주하길 고대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응접실을 나서는 아서는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걸음마다 분노가 묻어 있었다. 난처한 표정의 베른이 황급히 따라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걷던 아서가 갑자기 몸을 돌려 베른을 노려봤다.
“헤스티아 영애는 뭘 믿고 저리 오만하게 구는 거지? 곧 죽어도 귀족이라 이건가?”
베른은 연신 몸을 숙이며 아서의 비위를 맞추려 애썼다.
“이제 막 성년을 앞둔 분입니다. 상단주께서 훨씬 어른이시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아서는 헤스티아의 도발적인 눈매와 발그레한 볼을 떠올렸다. 그녀의 도도한 태도는 거슬렸지만, 저 아름다움과 귀족적 우아함은 돈으로도 쉽게 살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보름 뒤엔 저택을 경매에 붙이겠다. 준비해두게.”
“상단주님, 그건 너무!!”
놀란 베른이 황급히 아서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그는 거침없이 뿌리치며 말했다.
“싫으면 내 청혼서를 수락하든지.”
아서는 아연질색한 베른을 뒤로 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아서가 마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헤스티아는 깊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이 땀으로 흥건했다. 가슴도 어찌나 빨리 뛰는지 연신 호흡을 가다듬었다.
보름.
그 짧은 시간이 브렌하임의 운명을 결정할 터였다.

“아가씨, 베른입니다.”
“어서 들어와.”
베른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금의 당당하고 고고하던 귀족 영애는 사라지고 성년을 앞둔 천진한 아가씨로 돌아가 있었다. 밝은 미소로 그를 맞이한 헤스티아는 긴장이 풀린 듯 온몸을 축 늘어뜨리고 의자에 널브러졌다.
“아하, 긴장돼 죽는 줄 알았네.”
“흠흠, 아가씨, 체통을 지키십시오.”
주인의 흐트러진 모습에 베른은 헛기침을 연거푸 했지만, 헤스티아는 헤실거리며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놈이 뭐래?”
베른은 거침없는 언사를 내뱉는 주인의 태도에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헤스티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보름 뒤에 저택을 경매에 붙이겠다고 했습니다. 싫다면 청혼서를 수락하라고…”
“하, 미친 새끼.”
“아가씨!”
“헤헤, 미안. 욱해 버렸네.”
헤스티아는 용서를 구하듯 배시시 웃었다. 베른은 그 모습에 결국 따라 웃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보름 만에 그 큰 돈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웃음이 잦아들자 베른의 눈빛에 초조함이 어렸다. 밀려드는 불안감에 헤스티아는 탁자에 엎드린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20년 전 전쟁만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살아 계셨을 것이고, 어머니 역시 고생만 하시다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지는 않았겠지. 오빠 역시 가문을 살리려 무리하게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고, 평생 절뚝이는 다리를 끌고 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브렌하임은 한때 루멘티아를 지탱하던 네 공작가 가운데 하나였다.
화염 마법을 계승한 신의의 가문.
영지민들의 존경을 받던 그 이름은 전쟁과 함께 무너졌다. 패전 배상금을 빌미로 막대한 빚을 떠안았고, 광활했던 영지는 갈가리 찢겨 나갔다.
헤스티아는 책상 위에 펼쳐진 장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적자. 또 적자.
손끝으로 장부를 천천히 넘기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한 줄에서 멈췄다.
티에베른 평원.
브렌하임의 상징. 선대 공작들이 대대로 지켜 온 땅. 가문의 기사들이 검을 겨누고 맹세를 올리던 곳이자, 영지민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드넓은 평원이었다.
‘……그곳이라면 돈이 되겠다!’
한순간 떠오른 생각에 헤스티아는 스스로도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오빠가 허락할까?’
그 땅은 단순한 영지가 아니었다. 브렌하임이라는 이름 그 자체였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을까.
헤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베른, 오빠는 지금 어디에 있지?”
“치유사가 도착해서 침실에 계십니다.”
몇 달 전부터 이어진 다리 통증을 더는 견디지 못한 헤일로는 결국 치유사를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귀족 가문에서 민간인들이나 이용하는 주술에 의존하는 것은 분명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를 고용할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오빠의 고통만 덜어줄 수 있다면 헤스티아는 그보다 더한 일도 마다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오빠 기분이 괜찮아야 할 텐데…’
똑-. 똑-.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방문 틈 사이로 옅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지?”
“헤스티아예요. 할 말이 있어요.”
“…들어와.”
헤일로의 침실 문을 연 헤스티아는 매캐한 연기와 짙은 약초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약초 기운에 취해 누워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보니 통증으로 한참을 고생한 것 같았다.
“윽, 뭐 하는 거야! 환기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이러다 냄새에 질식하겠군.”
헤스티아는 치유사를 쏘아본 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던 치유사에게 얼른 돈을 쥐여 내보냈다. 중요한 이야기를 앞두고 정신이 몽롱한 오빠에게 제 진심이 제대로 전해질지 걱정스러웠다.
한결 상쾌해진 공기가 방 안을 채우자 헤스티아는 먼저 헤일로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그의 안색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헤스티아, 그녀를 나무라지 마. 내가 원한 거야.”
헤일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댔다. 여전히 통증이 가시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에 헤스티아는 가슴 한구석이 찌릿해졌다.
“많이 아프세요?”
헤일로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아니, 지금은 괜찮아. 할 말이 뭐야?”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한 헤스티아는 애꿎은 드레스 자락만 만지작거렸다. 헤일로는 동생의 망설임을 깨닫고는 다정하게 손을 잡았다. 그의 따스한 손길에 용기를 얻은 헤스티아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티에베른 평원을… 팔고 싶어요. 허락해주세요.”
헤스티아의 갑작스러운 얘기에 헤일로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들으신 대로예요. 티에베른 평원을 팔고 싶어요.”
헤스티아의 표정에는 어느 때보다 단호한 결심이 어려 있었다. 헤일로는 동생이 진심임을 깨달았다. 그는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질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 헤스티아?”
“네.”

서슴없는 동생의 단언에 헤일로는 가슴 한복판을 칼날이 긋고 지나간 듯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차올랐다.
‘어떻게 티에베른 평원을 팔겠다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
헤일로의 눈썹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분노와 충격이 뒤섞인 감정이 동생을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곧게 뻗은 시선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남아 있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동생의 굳은 결심을 깨달은 헤일로는 서서히 무너졌다. 헤스티아는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꺼낼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브렌하임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던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티에베른 평원을 팔겠다고 결심했다. 그것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정말 더는 방법이 없는 거구나.’
분노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깊은 절망과 자책이 스며들었다. 헤일로의 어깨가 힘없이 처졌다.
“…미안하다.”
낮게 흘러나온 한마디에는 가주의 죄책감과 깊은 무력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