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난 뤼네

2화

깨어난 뤼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헤일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헤스티아, 날 부축해 다오.”
헤스티아는 헤일로에게 가운을 건넨 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그의 팔을 어깨에 둘렀다. 성인 남자를 홀로 부축하기엔 버거웠지만, 몇 달 사이 야윈 그의 몸은 놀랄 만큼 가벼웠다.

두 사람은 선대 가주들의 초상화가 늘어선 긴 회랑을 천천히 걸었다. 붉은 융단 위로 두 사람의 발소리만 낮게 울렸다. 회랑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흑철문이 나타났다.
가주 외에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금역의 공간.
흑철문 한가운데에는 브렌하임의 상징인 피닉스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힘차게 펼쳐진 날개와 섬세하게 조각된 깃털 하나하나에서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기세가 느껴졌다. 몰락한 지금과는 달랐던 가문의 위용을 마주한 헤스티아는 한동안 말없이 그 문양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헤일로는 잠시 숨을 고른 뒤 헤스티아를 향해 미소 지었다. 헤스티아는 오빠의 결정이 기꺼우면서도 안타까워 목이 뜨겁게 메었다.
“이제 열게.”
헤일로가 자물쇠 위에 손을 올리자, 새겨진 불꽃 문양을 따라 붉은빛이 서서히 번져 나갔다. 잠들어 있던 화염이 숨을 쉬듯 문 전체를 감싸더니, 거대한 흑철문이 낮고 묵직한 굉음을 내며 서서히 갈라졌다.

문을 들어서자 묵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뽀얀 먼지가 걷히자 드러난 것은 기대와는 달리 낡고 소박한 방이었다. 가주의 방은 화려하기보다 오래된 시간 그 자체를 간직하고 있었다.
‘보물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헤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별 게 없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헤일로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헤스티아는 억지로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여기쯤 땅문서를 모아 두었는데… 잠시만.”
헤일로가 느릿한 걸음으로 문서가 쌓여 있는 쪽으로 향했다. 문서 더미를 뒤적이자 낡은 양피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천천히 찾아봐. 난 구경 좀 하고 있을게. 언제 또 가주의 방에 들어와 보겠어.”

헤스티아는 시간을 들여 방 안을 찬찬히 살폈다. 처음의 실망과 달리, 방 안은 브렌하임의 오랜 역사와 명성을 짐작하게 할 만한 것들로 가득했다.
초대 가주가 직접 남긴 편지.
역대 황실이 하사한 칙서.
불마법의 기원을 기록한 역사서와 먼 세월을 견딘 고대 마법서.
시간이 멈춘 듯한 유물들이 조용히 브렌하임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런 건 얼마쯤 받을 수 있을까?’
헤스티아는 피식 웃었다. 가문의 역사를 눈앞에 두고 속물처럼 구는 자신이 조금 한심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영지를 살릴 만큼 값비싼 물건 하나쯤은 남아 있을지도.

유물들을 살피던 헤스티아는 오래된 양피지 하나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창문으로 스며든 햇빛이 반사된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빛을 내는 것은 그 양피지뿐이었다.
‘설마 진짜 보물인가?’
헤스티아는 서둘러 양피지를 펼쳤다. 양피지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헤스티아가 겨우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몇 개의 단어뿐이었다.

“뤼네… 순수 마법… 순환… 불꽃… 아, 더 이상은 모르겠다.”
더듬더듬 읽어 나가던 헤스티아는 금세 포기했다. 그녀의 수준으로는 더는 읽을 수 없었다.
‘쳇, 아무것도 아니잖아.’
실망한 헤스티아는 낮게 혀를 찼다. 양피지를 뒤집으려던 순간, 희미하게 남아 있던 고대 문자들이 하나둘 빛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
그 자리를 대신하듯 처음 보는 문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한 빛은 살아 숨 쉬듯 피어올랐다가 이내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뭐야…? 그림이 움직여?’
잠시 망설이던 헤스티아는 천천히 손끝을 문양 위에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손끝에서 시작된 강렬한 진동이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
놀라 손을 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빛은 순식간에 손끝을 타고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으윽!”
가슴 한가운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새빨갛게 달군 쇠붙이를 심장에 그대로 박아 넣는 듯한 고통이었다. 헤스티아는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지만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심장 박동에 맞춰 뜨거운 무언가가 피부 아래를 기어 다녔다. 빛줄기는 쇄골을 지나 목덜미를 훑어, 어깨를 타고 팔 끝까지 번져 나갔다.

“헤스티아!!”
놀란 헤일로가 달려와 헤스티아를 안았다. 연달아 밀려드는 고통에 애써 삼키던 비명이 끝내 터져 나왔다.
“아아악!”
“헤스티아, 정신 차려!! 헤스티아!”

피부 아래를 흐르던 빛은 마치 보이지 않는 펜 끝처럼 살결을 따라 무언가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선 하나. 곡선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복잡하게 얽힌 문양이 살갗 위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을 머금은 문양은 심장이 뛸 때마다 더욱 선명해졌고, 헤스티아의 몸은 경련하듯 크게 떨렸다.

“그만… 제발…!”
“헤스티아, 몸이 너무 뜨거워. 집사! 거기 아무도 없느냐!!”
손톱이 바닥을 긁으며 긴 자국을 남겼다. 숨이 막혔다. 피가 끓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웠다.

마침내 마지막 선까지 새겨지는 순간, 문양이 눈부신 빛을 토해냈다. 방 안을 가득 메우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모든 통증도 끊기듯 멎었다. 그러나 심장 위에 새겨진 황금빛 문양은 희미한 빛을 머금은 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건… 뤼네…?!”
혼몽한 의식 속에서 헤일로의 목소리만 아득하게 들려왔다. 헤스티아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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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멘티아 황궁은 승전 연회로 온종일 떠들썩했다.
수백 개의 샹들리에마다 불꽃이 일렁였고, 화려한 음악과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가득 메웠다. 연회장은 저마다 잔을 부딪치며 승리를 축하하는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오늘의 주인공인 이안 발드라이크의 표정만은 편치 않았다. 목 끝까지 조여 오는 제복과 거추장스러운 장식들 탓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답답한 목깃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하려는 듯 무심코 몸을 뒤척였다.
그 모습을 본 발드라이크 공작 크러서스가 낮게 헛기침했다.
“흠흠.”
이안은 움찔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불편하더라도 오늘만큼은 조금 참거라. 연회장 내 모든 시선이 네게 쏠려 있어.”
“…네, 아버님.”

대답을 마친 이안은 곧장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다가오는 귀족들에게 흠잡을 데 없는 예의와 정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 어디에도 진심은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폐하를 알현하고 오마.”
“예.”
공작은 몇 걸음 옮기다 말고 다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난번처럼 연회장을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거라.”
이안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
“이번 기회에 다른 귀족들과도 안면을 익혀 두어라. 앞으로 도움이 될 일이 많을 테니.”
“…알겠습니다.”
마지못한 대답이었지만 공작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이안은 와인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렇게 급하게 드시면 금방 취하십니다, 부대장님.”
반가운 목소리에 이안은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부대원인 라그리스와 홀던이 히죽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에 있었던 거야? 나만 공작 각하 곁에 버려두고 너무들 하는군.”
“오늘의 주인공이신데, 어찌 저희 같은 나부랭이들과 어울리려 하십니까?”
“귀족나리들이 우리 부대장님한테 눈도장 한 번 찍으려고 엉덩이가 들썩이는 것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두 사람의 짓궂은 농담에 굳어 있던 이안의 표정이 슬며시 풀어졌다.
“그게 어디 나에 대한 관심이냐? 다 아버님에 대한 것이지.”
“공작님께서 황제 폐하께 가시던데, 이번에야말로 대공 작위가 수여되겠지요? 그동안 얼마나 고대하셨습니까. 이제 부대장님께서는 대공자 나리가 되시는 겁니다!”
라그리스의 호들갑이 부담스러웠지만, 공작과 이안 모두 오래도록 바라던 일이었다. 이안은 기대감을 애써 누르며 에둘러 말했다.
“하하, 헛소리 말거라. 형님이 계신데, 내가 무슨 대공자인가.”
“에잇, 라일님이 어찌 우리 부대장님과 비교나 되겠습니까? 성품이며 인물이며 한참 아래지요!”

홀던도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세운 공만으로도 충분하지요.”
홀던이 거들자 라그리스는 더욱 신이 났다.
“황제 폐하께서도 어떻게든 부대장님을 수도에 잡아두고 싶으신 눈치던 걸요. 다들 부대장님께 보내는 뜨거운 관심을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이럴 때 탄탄하게 자리를 잡으셔야죠.”
“맞습니다, 저 영애들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부대장님께서 한 번 돌아봐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안은 홀던이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 모여 있던 영애들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수군거렸다. 열다섯 살부터 전장을 떠돌았던 터라 이런 노골적인 호감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안은 괜스레 와인잔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때였다.
“노아르 레제프 아르세리온 1황자 전하와 이벨린 레오나 아르세리온 황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우렁찬 외침에 연회장을 가득 메운 시선들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자신에게 열렬한 애정을 쏟아붓던 영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언제 봐도 신기한 그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거대한 문이 열리자 찬란한 조명이 두 사람 위로 쏟아졌다.
불빛을 머금은 금빛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윤기가 흘렀다.
맑고 선명한 푸른 눈과 흠잡을 데 없이 반듯한 이목구비까지, 보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남매였다.

그러나 닮은 얼굴과 달리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백금발의 노아르가 화사하고 건강한 아름다움을 지녔다면, 옅은 금발의 이벨린은 아찔하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서로 다른 매력이 한데 어우러지자 두 사람의 존재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하지만 정작 사람을 압도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사람에게만 허락된 기품과 여유가 몸짓 하나, 미소 하나에도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새어 나왔다. 방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연회장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홀린 듯 두 남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아,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뵈니 두 분의 미모가 상당합니다.”
라그리스가 두 볼을 붉히며 홀린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게. 언제 봐도 대단한 남매지.”
이안은 담담히 와인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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