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아름답고 매혹적인 쌍둥이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황자와 황녀는 그들을 원하는 사람들의 호의를 뒤로 하고 이안을 향해 걸어왔다. 라그리스와 홀던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아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안은 얕게 한숨을 내쉰 뒤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제국의 빛나는 두 분을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이안 소공자. 발드라이크 공작은 종종 뵈었는데 소공자는 오랜만이라 더 반갑군요.”
노아르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갑게 대했다. 이안은 자신과 별 접점이 없던 황자의 친근한 태도가 어색했다.
“뤼투아 전투에서의 활약상이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동년배라고 알고 있는데, 소공자께는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노아르는 친근한 미소를 띤 채 이안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웃음기 어린 푸른 눈은 부드러웠지만, 그 시선만큼은 집요할 정도로 세심했다. 자신을 샅샅이 살피는 눈길에 이안은 까닭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오라버니, 저도 소개시켜 주셔야죠?”
곁에 서 있던 이벨린이 앞으로 나서자, 노아르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소개했다.
“소공자, 이벨린 황녀와 만난 적이 있던가?”
이안이 무덤덤한 얼굴로 이벨린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네, 황녀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성년식 때 한번 뵈었습니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연회에서 좀처럼 뵐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 앞으로는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벨린은 물빛을 닮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안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위험할 정도로 짜릿한 그녀의 향기에 이안은 순간 몸이 굳었다. 성년식 때만해도 황녀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었다. 그녀에게 발드라이크 서자는 그다지 매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달라진 태도에, 그제야 자신이 세운 공훈의 무게를 새삼 실감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관심이 생긴 것은 잠시였다. 와인잔을 부딪혀오는 황녀의 눈빛에서 푸른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모든 것이 묘하게 뒤틀렸다. 아름답던 미모도 짜릿하던 향기도 모두 거북해졌다. 이안은 시선만 살짝 거둔 채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누님, 소공자께서 곤란해 보입니다. 너무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낮게 깔리는 부드러운 음성에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밀빛 금발을 흩날리며 로이드 2황자가 상냥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이벨린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왔구나, 로이드. 있는 줄도 몰랐네. 우린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가던 길 계속 가려무나.”
“제가 가려던 길이 여깁니다, 누님. 형님은 여전하시군요.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발드라이크 소공자가 아니라 형님 같습니다.”
로이드는 이벨린의 견제 따위 깨끗이 무시하고 노아르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노아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하하, 나름 덜 치장하고 왔는데도 타고난 것은 어쩔 수가 없구나. 너는 꽤 신경을 썼는지 오늘은 봐 줄만 하구나.”
로이드의 입가에 경련이 살짝 일었지만 끝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쉽게도 제게는 외양에 공들일 여유가 없답니다.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아직도 너무 많아서요. 소공자께도 제가 배움을 좀 받고…”
“아쉽게도 소공자는 나와 선약이 있단다. 그렇지, 이안?”
로이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아르가 이안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며 말했다. 이안은 순간 멈칫했다. 정치 싸움에 말려드는 것은 절대 사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1황자를 홀대한다면 대공 승작을 앞둔 공작가에 누가 될 것이었다.
“…네, 황자 전하.”
못마땅한 눈빛의 이안을 쳐다보며 노아르는 웃겨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안은 그 꼴이 보기 싫어 시선을 돌려 버렸다.
냉랭한 분위기를 읽은 이벨린이 이안의 옷깃을 잡아 끌었다.
“답답해서 잠시 바람을 쐬고 싶군요. 소공자, 함께해 주시겠어요?”
“그래, 좋은 생각이군. 이벨린을 부탁하지.”
노아르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니 이안은 마지못해 승낙했다. 황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마침 두 황자의 신경전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차였다. 이안은 이벨린의 손을 잡고 테라스로 향했다.

이대로 이벨린에게 기회를 뺏길 수 없다는 생각에 로이드가 두 사람을 따라 나서려 했다. 그때, 노아르가 로이드의 팔을 붙잡았다.
“눈치는 있는 줄 알았는데. 젊은 남녀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다른 즐거움을 찾아보려무나.”
“형님!”
로이드의 표정이 처음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공개된 자리에서조차 거리낌 없이 선을 넘는 태도에 로이드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 얼마나 천박하고 오만한가.’
“아니면, 내게 할 말이 남아 있나? 난 없는데.”
노아르는 황금으로 세공된 고블릿을 들어 로이드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찰랑이는 와인 너머로 보이는 노아르의 표정은 끝내 읽을 수 없었다. 로이드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자리를 떴다.
천천히 와인을 들이켜던 노아르의 눈빛에서 웃음기가 스르르 걷혔다.
“하, 시시한 녀석.”
와인잔을 내려놓은 노아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화사하게 웃으며 뒤에서 숨죽이고 서 있던 라그리스와 홀던을 쳐다봤다.
“곧 황자궁으로 초대하지. 소공자와 함께 와.”
“영광입니다, 전하.”
“곧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노아르가 자리를 떠나자, 라그리스와 홀던은 굳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황족들의 신경전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하고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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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차가운 밤공기에 이벨린은 가녀린 어깨를 살짝 떨었다. 그녀의 떨림을 느낀 이안은 망토를 벗어 이벨린을 덮어주었다. 그녀는 망토를 살며시 움켜쥐고 이안을 올려다보며 감사의 눈인사를 보냈다.
“공자님께서는 참으로 상냥하시네요.”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천천히 내려앉자 푸른 눈동자가 더욱 신비롭게 일렁였다. 이안은 달빛 아래에서 더욱 화려하게 빛나는 그녀의 미모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지만, 다시 밀려드는 뒤틀린 감각들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 발드라이크가 대공 작위를 받으면, 명실공히 제국 최고의 가문이 되는 겁니다.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니 기쁘시겠어요.”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라 섣불리 말씀드리기가 주저됩니다. 저보다는 아버님께서 바라시던 것입니다.”
이벨린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이안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너무 겸손한 것도 죄입니다. 소공자는 충분히 자신만만하셔도 됩니다. 그 큰 공을 세우셨고 곧 대공가를 이어받으실 테니…”
달콤한 향기가 가까워질수록 숨이 막히는 듯한 불쾌감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황녀가 자신에게 무슨 술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실의 검으로 살아온 발드라이크의 일원이 황녀를 향해 이토록 불온한 감정을 품을 리 없었다.
“발드라이크 대공비는 그에 견줄 만해야겠죠.”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등으로 향했다. 단단하게 솟은 힘줄까지도 그녀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벨린은 손끝이 스칠 만큼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그 자리는 최고의 여인에게 어울리는 곳이죠.”
이벨린은 가녀린 손가락으로 이안의 턱을 슬며시 잡아당겨 자신을 쳐다보도록 했다. 푸른 불꽃이 일렁이듯 열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그녀의 눈동자에 이안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거부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소공자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황녀를 보며, 이안은 진심을 전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안은 이벨린의 손을 잡고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에서 떼어 냈다.
“황녀님, 발드라이크에는 어엿한 장자가 있습니다. 아무 힘도 없는 저에게 하실 말씀이 아닙니다.”
이안은 흔들리는 이벨린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황녀님께 필요한 사내는 제가 아닙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전 황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벨린은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드는 것도 모른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 소공자가 착각한 것 같은데… 내가 소공자와 어찌해보려는 것이 아니야! 내가 친히 최고의 여인을 소개하려고…”
미간을 찌푸린 이벨린이 순간 말을 잇지 못하자 이안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제가 착각한 것이라면 정중히 사죄드리겠습니다. 전장에서만 지내다 보니 예법이 서툴러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이벨린은 귀끝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매서운 눈길로 그를 쏘아봤다. 평소의 성정이었다면 한바탕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자신의 편으로 삼아야 하는 남자였다.


이벨린은 눈을 감고 긴 호흡을 하며 흐트러진 마음을 다스렸다. 잠시 뒤,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햇살 같은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 순간, 이안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감각들도 사라졌다. 황녀의 관심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이안은 흘러나오려는 헛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소공자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어요. 제가 오해할 행동을 했다면 그건 친근함의 표시였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추워서 전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이벨린이 몸을 휙 돌리자 이안의 망토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이벨린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대로 테라스를 떠나 버렸다.
황녀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차갑게 굳어 있던 이안의 입술이 느리게 호선을 그렸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황녀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피하고 싶지만, 어쩐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망토를 툭툭 턴 이안은 난간에 몸을 기댔다.
이미 벌어진 일을 걱정하는 것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달빛이 내려앉은 황실 정원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