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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의 전주

34화

악몽의 전주

언덕에 오른 로드리스는 한밤에도 환하게 빛나는 그레이우드 숲을 바라봤다. 대규모 병력이 집결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황제의 운명이 끝나려나…’
호흡을 고른 로드리스는 다시 박차를 가했다. 이미 한참을 달려온 터라 말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레이우드 숲 어귀에 다다르자 곳곳에 연합군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그를 발견한 병사들이 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시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진입할 수 없소.”
“나는 로드리스라고 한다. 하이데벨의 잊힌 마법사가 왔다고 칼리스에게 전해라.”

로드리스의 말에 병사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전시 상황에 불쑥 나타난 낯선 자를 향한 경계심이 그들의 눈빛에 역력했다. 병사 중 한 명이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물어보고 오겠소.”

로드리스는 마음이 조급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에서 내려 근처 나무에 고삐를 묶고 그 아래 주저앉았다. 품속에서 천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헬리오스가 칼리스의 곁에 있을 텐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 순간, 또다시 격한 기침이 터졌다.

“커헉. 컥.”
로드리스는 쥐고 있던 천으로 서둘러 입을 막았다. 온몸이 흔들릴 만큼 이어지던 기침이 겨우 잦아들었다. 로드리스는 피 묻은 천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는 나무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게 누군가? 오랜만이군, 로드리스.”

친근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로드리스는 서둘러 눈을 떴다. 그는 횃불을 등진 채 말을 타고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얼굴을 여기서 다시 마주하다니…’
로드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남자 뒤로 낯익은 얼굴이 보이자 이내 안도감이 스쳤다.
‘그래, 내 할 일을 하러 온 거였지.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말자.’

로드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두에 선 헬리오스를 향해 가벼운 목례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헬리오스님.”
고개를 든 그의 시선이 헬리오스의 뒤를 따르던 칼리스에게로 향했다. 로드리스는 칼리스를 향해 반가운 미소를 보였다.
“오랜만이군, 친구.”

칼리스는 웃었다.
“웬일이지? 언제는 친구 아니라고 하더니. 죽을 때가 됐나 보군.”
로드리스의 눈빛에 쓸쓸함이 스쳤다.
“그럴지도 모르지. 연합군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더니 친구하고 싶어 졌어. 네 덕에 나도 황제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겠군.”

그때 헬리오스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승기가 보이니 벌써 한몫 챙기려는 떨거지들이 몰려드는군. 레오드가 골치깨나 아프겠어.”
로드리스는 헬리오스 쪽으로 눈을 흘기며 말했다.
“전 뭔가를 바라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제라도 제 할 일을 하고자 온 것뿐입니다.”

웃음을 멈춘 헬리오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글쎄, 네 녀석 말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신의 없기로는 최고 아닌가. 오죽하면 잊힌 마법사로 낙인이 찍혔을까.”
헬리오스는 칼리스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칼리스, 이 녀석과는 상종도 하지 말거라. 반드시 네 뒤통수를 칠 우라질 녀석이다.”
“…!!”
로드리스는 반박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헬리오스 앞에서 과거사를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칼리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흥, 영감님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내가 누구와 친하게 지내든 영감님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하아… 여기 우라질 놈이 또 있었군.”

칼리스는 헬리오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에서 내려 로드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야? 황제 근처도 안 오던 자가.”
로드리스는 헬리오스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널 만나러 온 거야. 해야 할 말이 있어.”

“무슨 일인데?”
칼리스의 물음에 로드리스는 헬리오스를 흘깃 쳐다봤다. 그가 듣고 있는 이상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여기서는 안 돼. 잠깐만 따로 얘기하자.”
“칼리스, 서둘러야 해.”
그때, 잠자코 있던 헬리오스가 칼리스를 다그쳤다.
“지금은 안 돼. 난 지금 저 영감이랑 할 일이 있어.”
불현듯 아스티나가 떠오른 칼리스가 로드리스의 팔을 붙잡았다.
“잘됐다! 여기에 내 반려가 있어.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녀를 지켜줘.”

“헬리오스랑 무슨 일을 하는데? 어딜 가는 건데?!”
칼리스의 말에 로드리스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기밀이니까 그런 건 묻지 말고. 아스티나 공주나 잘 지켜 줘. 네가 있다니… 다행이군.”
아스티나를 두고 떠나야 했던 칼리스에게 로드리스의 등장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하지만 로드리스의 마음은 정반대였다. 그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묻어났다.
“칼리스, 헬리오스를 믿지 마. 저놈은 널 이용하려는 거야.”
“알아.”
예상치 못한 대답에 로드리스는 당황했다.
“알고 있다고? 그런데… 왜 그와 함께하는 거지?”
“서로 원하는 게 일치할 뿐이야. 아무나 덥석 믿을 만큼 순진하진 않으니까 걱정 마.”

로드리스는 칼리스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헬리오스는 네 생각보다 훨씬 미친 놈이야. 저놈은 널…”
“로드리스. 회포는 나중에 풀도록 해.”
헬리오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로드리스는 헬리오스를 노려봤다. 수십 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그자의 한마디에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사실이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아는 이상, 함부로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언제까지 노닥거릴 거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칼리스.”
칼리스는 헬리오스를 한 번 쏘아본 뒤 로드리스의 어깨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걱정 마. 다녀와서 얘기해.”
로드리스가 칼리스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칼리스는 주변에 있던 병사에게 로드리스를 부탁한 뒤 말에 올라탔다.
헬리오스는 말머리를 돌리기 전 로드리스를 한 번 돌아봤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조소가 스쳤다.

두 사람은 말에 박차를 가하며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로드리스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또다시 그날의 악몽이 되풀이되려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보기만 할 것인가.
로드리스는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아니.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칼리스가 그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이 떠올랐다.
“아스티나 공주…”
칼리스가 듣지 않겠다면, 그녀에게라도 진실을 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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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운 소리에 메레디아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이미 체력이 바닥난 데다 환영의 숲에 걸어둔 마법까지 깨지면서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황제가 계속 요구한다면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다. 메레디아는 죽음이 코앞까지 온 것을 느꼈다.

가까이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안대를 통해 여러 사람의 흐릿한 형상이 비쳤다.
“서로 인사라도 하지 그래? 앞으로 함께하게 될 사이이니.”
황제의 말에 열 명의 마법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다 인사를 했다. 낯선 목소리에 메레디아는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황제를 쳐다봤다.

“새로운 방패막이들인가요? 제가 지금… 좀 급해서 그런데… 몇 명만 이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이런 메레디아. 며칠 전에도 보냈는데 별 소용이 없었잖아.”

황제의 차가운 반응에 메레디아의 마음이 급해졌다.
“아닙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자들의 마력이… 마력이 부족해서 회복이 더딘 것입니다. 좀 더 데려와 주면, 아니 로드리스라도 잡아와 주면 다시 예전처럼 폐하를 보필할 수…. 있습니다.”
“하하하, 메레디아. 재밌는 말을 하는군. 명이 다한 너를 위해 내가 그런 수고를 들여야 할까?”
황제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서늘하게 빛났다.

“날 버리겠다고? 지금까지 승승장구한 게 누구 덕분인데! 내가 없으면 얼마나 버틸 것 같아?”
메레디아는 황가의 사슬이 살을 파고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를 향해 소리 질렀다.
“헬리오스가 연합군에 있다고 들었어! 그럼 저딴 애송이 마법사 수십 명보다 내가 필요할 거야. 난 그에게 치명상을 입힌 적도 있단 말이야!”

황제는 메레디아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눈동자에서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메레디아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한기가 흘렀다.
“메레디아, 널 버리겠다고 한 적 없어. 마지막으로 아주 중요한 일을 하게 될 거야.”
메레디아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마… 마지막… 이라고요?”

황제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제국을 위해 충성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지, 메레디아.”
그제야 메레디아는 깨달았다. 저들은 자신을 살리러 온 생명줄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러 온 사자(使者)들이라는 것을.

“그럼, 시작해라!”
황제는 뒤쪽으로 물러나며 마법사들에게 명령했다. 머뭇거리던 마법사들은 병사들의 날카로운 칼끝을 버티지 못하고 메레디아가 갇힌 감옥 속으로 들어갔다. 다가오는 발소리에 메레디아는 도망치려 했지만 점점 옥죄어오는 황가의 사슬 때문에 결국 꼼짝할 수 없었다.

메레디아 주위를 둘러싼 마법사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마법진을 그린 뒤 동시에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카르네시움 에르바티스, 모르테나 아르카디움!”

메레디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설마… 역생(逆生)의 의식을…!”
그녀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안대에 마력이 봉인된 데다 황가의 사슬까지 그녀를 옥죄었다.
“널 죽여 버릴 거야!! 감히 나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메레디아의 저주가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 영창이 시작되었다.

“녹투르니아 칼리고스, 아비스테라 모르벨리스!”
마법사들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빛이 순식간에 메레디아를 에워쌌다. 메레디아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으아아악! 저리 가!!”
영창이 격해질수록 빛은 더욱 거세졌다. 비명이 커지며 메레디아의 몸이 급격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황제와 시온, 그리고 병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끼 낀 벽면 위로 메레디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몸부림칠 때마다 그림자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곧이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그림자에서 세 개의 목이 솟아났다.
메레디아의 비명은 차츰 기괴한 울음소리로 변했다.
“카아아아악!”

“으윽!”
“힉!”
전장을 누볐던 병사들도 그 괴상한 모습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황제의 눈빛만은 더없이 환희로 가득 찼다.

메레디아는 어느새 괴물로 변해 있었다.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까마귀가 보랏빛 눈동자를 번뜩였다. 검은 날개가 펼쳐지자 감옥의 벽면에 균열이 일었다. 괴물이 강철 같은 발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두꺼운 벽돌이 종잇장처럼 뜯겨 나갔다.

황가의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쇠사슬이 버티지 못하고 끊어질 듯 요란하게 울렸다. 놀란 마법사들이 서둘러 주문을 외우며 괴물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황가의 사슬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나올 것 같았다.

“시온, 저걸 좀 봐라!”
황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저 정도라면 칼리스도 무사하지 못하겠지.”
황제의 뒤에 서 있던 시온이 다가왔다.
“예, 폐하. 분명히 칼리스는 물론 연합군도 큰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크흐흐. 역시 내 마녀는 끝까지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 아주 좋아!”
황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때, 지하 감옥을 뒤덮었던 빛이 사라졌다. 몸부림치던 괴물이 바닥에 고꾸라지자 마법사들은 서둘러 감옥 밖을 나섰다. 황제가 제일 먼저 나온 마법사의 멱살을 붙잡았다.
“왜 저 괴물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거야?! 실패한 거냐?”
“아… 아닙니다, 폐하. 마법은 성공했습니다. 의식 전부터 몹시 쇠약한 상태였던 터라… 마력만 회복하면 금세 기운을 차릴 것입니다.”
“그래?”
순간, 황제의 눈빛에 잔인한 빛이 어렸다.

황제는 감옥을 빠져나오려던 마법사를 발로 차 안으로 밀어 넣은 뒤 감옥 문을 잠가 버렸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6명의 마법사들이 창살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여기서 당장 꺼내 주시오!”
“약속이 다르잖아! 당장 우릴 풀어줘!!”

황제는 느긋한 미소를 띤 채, 제일 처음 탈출한 마법사에게 물었다.
“괴물이 마력을 회복하려면 6명이면 되나? 더 필요한가?”
마법사는 온몸을 벌벌 떨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그 정도면… 충… 충분합니다…”  

“끄으으윽….”
그때, 괴물이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괴물의 세 머리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보랏빛 눈동자가 차례로 드러났다. 눈알을 굴리던 괴물은 구석에서 몸을 떨고 있는 마법사들을 발견했다. 몸을 천천히 일으킨 괴물은 마법사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럼 괴물은 만찬을 즐겨야 하니 우린 이후 일정이나 의논해봅시다.”
황제는 가장 먼저 빠져나온 마법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밖으로 나섰다. 나머지 세 마법사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계단을 오르자, 감옥 내부를 찢는 날카로운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피비린내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물론 병사들까지 감옥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황제만은 기분이 좋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성벽 위에서 느꼈던 위기감이 일순간 사라졌다. 그는 어서 빨리 자신에게 칼을 겨눈 자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칼리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좋은 선물을 줄 테니.”
황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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