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가깝고도 먼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그레이우드 숲은 울창하고 푸르렀다. 곳곳에 세워진 임시 처소와 연합군 병력들 때문에 긴장감은 감돌았지만, 그날 자신들에게 환영과 비극을 안겨준 숲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범해 보였다.
아스티나는 숲 뒤로 위용을 뽐내고 있는 황궁을 바라봤다. 지척에 있는 황궁은 숲 너머의 시야를 압도할 만큼 거대했다.
어쩌면 평생을 갇혀 살아야 했을지도 모르는 곳.
가족의 불행이 시작된 곳.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웬 한숨이지?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나?”
아스티나가 뒤를 돌아보니 레오드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가벼운 인사로 그를 맞았다.
“아닙니다. 여러모로 배려해 주셔서 전하께는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저… 황궁을 보니 마음이 착잡해져서 그러는 것입니다.”
아스티나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레오드는 흰 아네모네 다발을 그녀에게 건넸다.
“제대로 준비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이해해 줘. 아네모네에는 떠난 이를 잊지 않겠다는 꽃말이 있다더군.”
아스티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장례를 위해 적당한 흰꽃을 찾아다녔지만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숲에서 꺾어 온 듯한 아네모네는 수수했지만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 수고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감사합니다, 전하. 정말 필요했는데…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받으려 한 것은 아니야. 그저… 산책을 하다가 발견했을 뿐이야.”
레오드는 겸연쩍은 듯 시선을 돌렸다. 그는 어쩐지 아스티나와 눈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몇 년 전 벨로나와의 혼담 때문에 에스카리엘을 찾았을 때, 멀리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어린 소녀였는데. 어느새 숙녀가 되어 진심으로 감사해하는 모습이 여간 예뻐 보이지 않았다. 레오드는 잠시 머물던 시선을 거두며 가볍게 웃었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레오드는 시선을 황궁 쪽으로 돌렸다.
햇빛을 머금은 채 찬란하게 빛나는 황궁의 모습에 저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잠시 흩어진 생각을 거두었다.
그때, 멀리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사제가 도착했나 보군. 이제 시작하지.”
레오드가 앞장서자 아스티나가 뒤따랐다. 미리 마음을 정리한 탓인지 언니를 떠나보내는 슬픔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문제는 지난밤 칼리스와 나눈 대화였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그의 말과 표정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난 미친 거야. 이런 상황에서도 그를 생각하다니…’
문득 정신을 차린 아스티나는 몇 걸음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레오드를 발견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미안해진 아스티나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언덕 위에 작게 마련된 무덤에는 디에나의 이름이 적힌 나무판이 꽂혀 있었다. 레오드와 아스티나가 다가오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한 곳으로 모였다. 아스티나는 옅은 미소를 띠며 루에나의 손을 맞잡았다. 루에나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표정은 이전보다 한결 차분해 보였다.
사제가 낮은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기 시작하자 주변에 차분한 슬픔이 내려앉았다. 헌화 순서가 되자 루에나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스티나도 아네모네를 무덤 위에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언니가 정말 떠났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결국 그녀는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몸을 휘청였다. 레오드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헌화를 마친 아스티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차마 멈출 수 없었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칼리스에게 머물렀다.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하지만 칼리스는 거대한 느티나무에 기댄 채 꼼짝하지 않았다. 무성한 나뭇잎의 그늘에 가려져 그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아스티나의 어깨가 들썩일 만큼 눈물이 쏟아졌지만 칼리스는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 순간, 아스티나는 눈앞의 거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분명 저기 있는데…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걸까.’
아스티나는 결국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그 뒤로는 장례가 끝날 때까지 칼리스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느티나무에 기대어 장례를 지켜보던 칼리스는 옅은 한숨을 뱉어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거추장스러운 절차들이 죽은 자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걸까. 그저 산 자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냉소적인 감상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아스티나를 끈질기게 쫓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레오드가 아닌 자신이 그녀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지난밤 헬리오스의 말이 그를 단단히 옭아맸다.
“결국 어중간한 인연들은 멀어지게 되는 법이지.”
아스티나와의 다툼에 이어 카시안까지 떠나겠다고 했다. 지난밤 칼리스는 연달아 벌어진 일들에 혼란스러운 마음을 제대로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껄끄러운 헬리오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칼리스는 대꾸도 하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
“칼리스, 평범한 자들의 마음을 일일이 이해하려고 하지 마. 그럴수록 너만 혼란스러울 뿐이야. 너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마 이 세상에 나뿐일 거야.”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지?”
결국 참지 못한 칼리스가 대꾸하자 헬리오스가 재밌다는 듯 히죽거렸다.
“너도 알고 있잖아. 사람들과 섞일수록 점점 겉돌고 있다는 걸. 네가 잘못된 게 아니라 그들이 불완전한 거야. 우리 같이 완전한 자들은 그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어. 그건 네 반려도 마찬가지지.”
눈동자에 붉은빛이 선명해진 칼리스가 헬리오스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반려? 너 뭘 알고 지껄이는 거야. 죽고 싶어?”
“하하하, 네 녀석이 날 죽일 수 있을까. 귀여운 짓은 그쯤 해. 그렇게 아스티나 공주가 네 반려라고 티를 팍팍 내니 누가 모를까. 아스티나 공주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거리를 좀 두는 게 어때?”
멱살을 움켜쥔 손아귀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헬리오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칼리스를 밀쳐 바닥에 쓰러뜨렸다. 곧이어 허공에서 손을 비틀자 보이지 않는 손이 칼리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뭐든 적당히 해.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고 사랑 놀음이나 하고 있으니, 쯧.”
헬리오스의 입가에 느슨한 비웃음이 걸렸다.
순간, 칼리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는 목을 조이던 보이지 않는 손을 단번에 부서뜨렸다. 곧바로 몸을 일으켜 한쪽 팔로 헬리오스의 목을 휘감고, 다른 손으로 그의 팔을 등 뒤로 꺾었다. 거구에 꼼짝없이 제압당한 헬리오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어때, 영감님. 더 지껄여 보시지.”
“컥컥… 하하하, 내가 졌다. 이만 목 좀 풀지? 힘만 세서는.”

잠시 고민하던 칼리스가 팔에서 힘을 풀자 헬리오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는 거친 숨을 고르면서도 흘러나오는 실소를 멈추지 못했다.
“그딴 마법은 안 통해. 그러니 앞으로 허튼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하하하하… 내 마법을 깨뜨리다니… 대단해. 역시 대단한 녀석이야. 완전히 마음에 들어.”
“영감님, 나한테 관심 좀 꺼.”
“영감 타령 좀 그만해. 내가 비록 이백 살이 넘었지만 외모만 보면 너와 비슷하다. 그리고 넌 내가 필요할 텐데. 대륙에서 나만큼 너에 대해 아는 자가 있을까.”
칼리스는 말없이 헬리오스를 바라봤다. 자신이 아는 최고의 마법사인 로드리스조차 명쾌하게 답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대마법사인 헬리오스라면 오랫동안 품어온 의문을 풀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꺼려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꾸만 입을 무겁게 했다.
“나와 좀 친하게 지내는 게 좋지 않겠어. 함께 황궁에 들어가야 하는데 벌써부터 삐걱거려서야 곤란하지.”
“…날 자극하지 않으면 되잖아.”
칼리스는 마지못해 말을 꺼냈다. 그런 칼리스를 흥미롭다는 듯 잠시 쳐다본 헬리오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한동안 밤하늘을 바라보다 나지막이 말했다.
“곧 폭풍이 올 거야. 네가 황궁에 들어간 순간부터 아스티나는 네 약점이 되겠지. 어딘가에 숨겨두는 것도 좋겠어.”
칼리스도 이미 고민하던 문제였다. 아스티나를 자신의 곁에 두는 것이 정말 그녀를 지키는 일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상념에 잠겨 있던 칼리스의 눈에 아스티나와 레오드가 계속 걸렸다.
‘두 사람,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저도 모르게 발을 내디디려던 칼리스가 이내 멈춰 섰다. 지금 자신이 다가가면 괜한 이목만 끌게 될 터였다. 헬리오스의 말대로라면 그것조차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어디에다 숨겨두어야 하지…’
같은 왕족 출신이라서인지 두 사람은 묘하게 잘 어울렸다.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두 사람은 유독 고고하고 우아해 보였다. 칼리스는 입안이 씁쓸해졌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자신과 아스티나는 어떻게 보일까.
문득 그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칼리스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홀로 언덕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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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스는 여관 1층의 어두운 술집 구석에 자리를 잡고 최대한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 술을 마셨다. 칼리스가 찾아온 이후로 숙소를 세 번이나 옮겼다. 황제의 눈을 피해 조용히 지내는 것이 삶의 목표였는데, 칼리스가 찾아온 뒤부터 모든 게 꼬였다. 이번에는 아예 남부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아무리 황제가 미친놈이라 해도 자신 하나 잡겠다고 대륙 끝까지 뒤질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연합군이 황궁 근처에 진을 치고 있다던데.”
근처에 모여 있던 용병들의 얘기에 로드리스의 손이 멈췄다.
“이번에야말로 뭔 일이 터지긴 할 것 같아. 글쎄, 대마법사에 황제의 사냥개까지 연합군에 붙었다잖아.”
로드리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헬리오스와 칼리스가 같은 편이라고… 그게 가능할 리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용병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에 열중했다.
“그래서 황제가 대륙에 있는 용병들을 모으고 있는 건가?”
“제아무리 발레리온경이 세다지만 막강한 제국군을 이기긴 힘들겠지? 마법사들도 모으고 있다니 연합군이 상대가 될까?”
“무엇보다 그 황궁이 문제라더군.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는 철옹성이라 버티기만 해도 승리라는 얘기도 있어.”
로드리스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헬리오스와 칼리스가 만난 것이 절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랜 세월 초야에 묻혀 살던 자가 갑자기 전면에 나섰다. 그것도 하필 칼리스가 반려를 찾은 직후였다.
‘하아… 칼리스가 반려 얘기를 했을 때 왜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까. 설마… 헬리오스가 알아낸 건가. 칼리스를 완전한 용으로 만들 방법을.’

로드리스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잊고 싶었던 어두운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을 쳐다보던 공허한 붉은 눈동자와 널브러져 있던 수많은 시체들.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도망쳐 나오던 밤처럼 로드리스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은 깨끗했지만 코끝에는 여전히 피비린내가 맴도는 듯했다.
로드리스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술집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한참 동안 속을 게워내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순간 거센 기침이 터졌다. 입을 막았던 손바닥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결국 벌을 받는 것인가…’
간신히 입가를 훔치고 정신을 차린 로드리스는 주변을 살폈다.
“칼리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해… 그래, 내가 해야만 해…”
술집 뒤편 마구간으로 달려간 로드리스는 자신의 말에 급히 올라탔다. 고삐를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발 늦지 않았기를…”
로드리스는 그대로 말을 몰아 그레이우드 숲으로 향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