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돌이킬 수 없는
장례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레오드는 아스티나에게 제안했다.
“당분간 루스베키아 왕궁에서 지내면 어떤가? 곧 전쟁이 시작될 거야. 이곳은 공주들이 머물기에 너무 위험해.”
아스티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곳이 위험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뭇잎 그늘에 가려져 표정을 읽을 수 없었던 칼리스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칼리스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짧게 머리를 자르고 임무를 위해 떠나던 벨로나의 뒷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아스티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끌려 다니며 멈춰 있고 싶지 않았다. 언니처럼 자신의 손으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싶었다.
“루에나 언니만 우선 보내는 것은 어떨까요? 몸이 많이 쇠약한 상태라 이곳에서 지내기 힘들어하고 있어요.”
한참을 고민하던 아스티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공주는? 황제가 여전히 그대들을 노리고 있는데 흩어지는 것이 괜찮을까?”
“오히려 그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황제도 지금은 전쟁 준비 때문에 이전처럼 저희에게 마음대로 손을 뻗기는 어려울 겁니다. 루에나 언니는 이곳보다 왕궁으로 가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저 역시 연합군 진영 안에 있으니 황제가 쉽게 손을 댈 수는 없을 테고요.”
아스티나의 얼굴에 단단한 결의가 어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분명히 제 역할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후방에서 치료사를 돕겠습니다.”
“공주가 감당하기에는 고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너무 위험해.”
“벨로나 언니 말대로 더 이상 공주가 아니니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분명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머뭇거릴 수는 없지요. 저도 한 사람 몫은 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레오드는 머뭇거리다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영 뒤편에 마련된 후방 부대에 머물도록 해.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루스베키아로 가겠다고 약속해.”
레오드는 솔직히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흘러갈지 장담할 수 없는 격전지 한가운데에 그녀를 두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전쟁터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가 지내기에 몹시 고된 곳이었다. 그럼에도 푸른 눈동자를 밝게 빛내며 뜻을 굽히지 않는 그녀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레오드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약속해. …아스티나.”
처음으로 이름을 부르고 나니 묘하게 낯설었다. 레오드는 어색한 기분에 헛기침을 했다.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아스티나가 작게 웃었다. 아직 슬픔이 가시지 않은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유난히 선명했다. 레오드는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결국 루에나만 서둘러 루스베키아로 떠나기로 결정되었다. 레오드의 지시로 마차와 수행 인력이 빠르게 준비되자 아스티나의 마음도 바빠졌다. 루에나의 짐을 정리하려 막사에 들른 아스티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연질색했다. 칼리스가 정신없이 아스티나의 옷가지와 물품들을 가방에 우겨 넣고 있었다.

“칼리스, 지금 뭐 하는 거야!”
칼리스는 아스티나를 힐끔 쳐다본 뒤 다시 하던 일에 열중했다. 아스티나는 서둘러 그의 손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냐고 묻고 있잖아!”
“너도 가는 거야, 루스베키아로.”
“무슨 말이야? 난 안 가. 난 여기 남기로 결정했어.”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스티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걸 누가 결정했지? 넌 여기 남을 수 없어.”
“내가 결정한 거야. 난 어디도 안 갈 거야. 나한테 명령하지 마.”
아스티나의 단호한 태도에 칼리스가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네가 불행을 겪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난 곧 황궁으로 갈 거야. 내가 없는 이곳은 너무 위험한 곳이야.”
아스티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그를 달래려 애썼다.
“후방에서 치료사들을 보조하는 것뿐이야. 주변에 연합군이 이렇게나 많은데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오히려 이곳에 있는 게 더 안전할 수 있어.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면 그때 떠날게. 난 더 이상 도망치지도 끌려 다니지도 않을 거야.”
아스티나는 칼리스의 손을 잡고는 눈을 맞추려 애썼다.
“칼리스, 왜 자꾸 혼자 결정하고 나를 밀어내려 하는 거야? 이곳이 위험하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어. 하지만 난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네가 말했잖아. 우리는 운명으로 묶여 있다고.”
헬리오스의 말이 칼리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스티나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헬리오스의 말처럼 그녀는 자신의 약점이었다. 칼리스는 아스티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소중하니까 안전하게 지키고 싶은 거야. 내가 찾아갈 때까지 루스베키아 왕궁에 숨어 있어. 여기서 이런 고생하지 말고 예전처럼 맘 편하게 풍족히 지내면 너도 좋잖아.”
아스티나의 눈매가 사납게 좁아지며 선명한 분노가 어렸다. 그녀는 칼리스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그럴 거면 애초에 에스카리엘을 침략하지 않았으면 됐잖아. 내가 공주 놀이를 하고 싶다고 했어? 왜 멋대로 판단하고 네 맘대로 하려고 하는 거야? 내가 우스워?”
제 발로 위험 속에 남겠다는 아스티나의 고집에 칼리스는 화가 치밀었다. 두려움과 분노가 한데 뒤엉켜 견딜 수 없었다.
왜 이 여자는 이렇게나 자기 멋대로일까.
순순히 내 말을 따라주면 안 되는 걸까.
칼리스는 가방을 들고 아스티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잔말 말고 가. 이번만큼은 네 맘대로 못 해.”
“이 미친 놈아! 이거 놔!”
아스티나는 팔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울지 않으려 애썼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미워. 너무 미워.’
천막 입구까지 다다르자 아스티나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칼리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대로 끌려가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아스티나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칼리스의 팔을 물어뜯었다. 칼리스가 움찔하며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렸다. 옷가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윽! 아스티나, 지금 뭐 하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아스티나의 공격에 칼리스는 크게 당황해 결국 그녀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스티나는 그 틈에 천막 구석까지 물러나 칼리스를 노려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칼리스는 이빨 자국이 선명한 팔을 만지며 가만히 그녀를 쳐다봤다.
‘왜 내 마음을 모르는 거지. 왜 날 이해하지 못하지.’
칼리스의 붉은 눈이 어둡게 젖어 들었다.

“저리 꺼져! 한 번 더 손대면 우린 끝이야. 빨리 황궁에나 가버려!”
아스티나의 푸른 눈동자에 분노와 슬픔이 뒤엉켜 위태롭게 일렁였다. 칼리스는 옅은 한숨을 뱉은 뒤 천천히 막사를 떠났다. 아스티나는 울음 섞인 웃음을 흘리며 떠나는 칼리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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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려앉은 그레이우드 숲 곳곳에서 수백 개의 횃불이 타올라 밤을 낮처럼 밝혔다. 황궁 성벽 위에 선 시온은 숲을 가득 메운 불빛을 내려다보며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연합군의 진격 소식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제국은 환영 마법을 지나치게 믿고 있었다. 대마법사가 직접 나서 환영의 숲을 무너뜨린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시온은 뒤를 돌아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는 힐랄 산맥을 넘어 황궁 후방에 진을 친 또 다른 연합군 수천 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방까지 뚫린 것도 문제였지만, 무스타르의 선단마저 출항했다는 간자의 보고가 더욱 거슬렸다. 황제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저 미친 놈들이 힐랄 산맥을 넘을 줄이야…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변명 따위를 할 거라면 입을 열지 마라.”
황제의 서늘한 목소리에 시온은 고개를 숙였다.
“우리 쪽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지?”
“제국군 2만에 용병 5천 명 정도를 끌어모아 성벽과 주요 방어선에 배치했습니다. 연합군보다 병력은 적지만,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우리의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마법사들도 열 명 정도 대기 중입니다.”
“마법사 수가 중요한 게 아니지. 메레디아는?”
시온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진작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환영의 숲이 깨지면서 몸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불거졌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쓸모없는 것… 빨리 로드리스를 찾아내. 메레디아가 쓸모를 다했다면 그 늙은이라도 필요할 테니.”
“네, 폐하.”

그때, 전령이 다급하게 그들 쪽으로 달려왔다. 편지를 내미는 전령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황제가 느리게 글자를 훑어 내려갔다.
칼리스 발레리온, 연합군에 합류.
황제의 푸른 눈동자에 싸늘한 빛이 스치더니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이 개새끼가 감히 주인을 물어.”
황제는 시온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법사들을 지하 감옥으로 불러와. 주인이 직접 못된 버릇을 고쳐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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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테시온 왕궁은 혼란스러운 주변 정세와는 달리 평온한 밤을 맞고 있었다.
은쟁반을 든 시녀가 긴 회랑을 천천히 걸어갔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국왕의 침전 문 앞에서 멈춰 선 시녀는 떨림을 멈추려 잠시 숨을 골랐다.
‘눈 딱 감고 하는 거야. 이것만 해내면 내 거지 같은 인생이 바뀔 테니.’
시녀는 조금 전 마주했던 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하고 여유로웠다. 반은 그녀에게 익숙한 은쟁반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평소와 똑같아 보이는 약과 물잔이 놓여 있었다. 시녀는 말없이 은쟁반을 들고는 반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평소처럼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반은 금화가 두둑이 든 주머니를 은쟁반 위에 살짝 올렸다. 팔로 전해지는 금화의 묵직함에 시녀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게 뭔지… 궁금해하면 안 되는 거죠?”
“아는 것이 많을수록 위험한 법입니다. 알고 싶으십니까?”

시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전 아무것도 모르고 어떤 것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반이 방금 쟁반에 올린 금화 주머니보다 훨씬 큰 주머니를 꺼내 들어 보였다.
“잘만 해준다면 충분한 보상이 따를 것입니다.”
시녀의 눈빛이 밝게 번뜩였다.
시녀는 금화 주머니를 품속 깊이 감췄다. 크게 한 번 숨을 내쉰 뒤 문을 두드렸다.
똑. 똑.
“폐하, 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국왕의 허락이 떨어졌다.
“들어오너라.”
시녀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몇 시간 뒤, 시녀는 약속한 장소에서 초조하게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된 왕궁 뒤편 정원에는 희미한 달빛만 비치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본궁은 불빛과 사람들 소리로 이미 난리법석이었다. 금방이라도 병사들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 옷 안쪽 주머니를 더듬었다. 혹시 몰라 몰래 챙겨 온 왕궁 비상용 신호탄이 손끝에 닿았다. 그제야 불안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몸을 숨기니 어둠 속에서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로브 차림에 시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지금 본궁은 난리가 났는데…”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던 시녀가 순간 주춤했다. 달빛에 드러난 얼굴은 반이 아니었다. 낯선 사내의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시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저…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쥐 죽은 듯 조용히 살 테니… 제발… 부디 목숨만은…”
남자는 말없이 단검을 빼 들었다. 달빛에 날카로운 칼날이 번뜩였다. 입술을 질끈 깨문 시녀는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신호탄을 꺼내 하늘을 향해 터트렸다.
“이씨!”
남자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시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렸지만 늦었다. 칼날이 옆구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아악!”
남자가 칼을 뽑자 피가 왈칵 쏟아졌다. 시녀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다시 칼을 들어 올렸다.
국왕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본궁으로 향하던 로스터는 근처에서 치솟은 신호탄을 발견하고 황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왕궁 뒤편 정원에 다다르자, 한 사내가 쓰러진 시녀를 향해 칼을 치켜들고 있었다. 로스터는 단검을 뽑아 던졌다.
퍽―!
날아든 단검이 남자의 손목을 스쳤다. 칼을 쥔 손이 순간 흔들리며 칼끝이 시녀의 목 바로 옆으로 빗나갔다.
“큭!”
남자가 빠르게 몸을 돌렸다. 로스터는 이미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뭐 하는 놈이냐.”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잠시 뒤 두 사람의 검이 거칠게 맞부딪쳤다.
챙! 챙―!
멀리서 병사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병사들의 접근을 눈치채고 곧장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서라!”
로스터가 남자를 뒤쫓으려다 멈췄다. 바닥에 쓰러진 시녀의 상태가 심각했다. 그는 급히 검을 내려놓고 시녀 곁에 무릎을 꿇고 상처를 강하게 눌렀다.
“정신 차려!”
시녀의 흐려진 눈동자가 로스터를 향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이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이 감겼다.
그 순간 왕궁 중심부에서 다급한 종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댕―! 댕―! 댕―!
세 번의 종소리는 국왕의 승하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로스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가 붙잡고 있던 시녀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