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

29화

연합군

그레이우드 숲이 낯선 병사들로 북적였다. 이미 숲 주위에는 연합군 병력이 촘촘하게 깔렸고, 곳곳에 임시 처소가 빠르게 들어서고 있었다. 숲에 드리웠던 안개도 말끔히 걷혔다. 대마법사인 헬리오스의 힘으로 숲을 정화한 뒤 보호 마법까지 걸고 나니 이제 숲은 완벽한 요새가 되었다.

카시안과 벨로나는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면서도 연합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카시안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오랫동안 전장을 떠돌며 수많은 군대를 상대했고,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제국군에도 몸담았지만 이들은 어딘가 달랐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모인 탓에 얼핏 보면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하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누구 하나 평범한 자가 없었다. 저마다 특출난 능력과 강한 개성을 지닌 자들이었다.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그들의 결속력이었다. 평소에는 물과 기름처럼 제멋대로 흩어져 있던 자들이, 그 남자가 나타나는 순간 놀라울 만큼 빠르게 하나로 뭉쳤다.
카시안은 무리의 중앙에서 특유의 카리스마와 여유를 뽐내는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다가오는 칼리스에게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그를 제 부하처럼 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카시안에게는 꽤나 낯설었다.
어디서든 가장 앞에 서서 사람들을 압도하던 칼리스가 아닌가.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주도권을 내준 모습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생경했다.

“쳇, 잘난 척은. 어디서든 티를 안 내고는 못 배기는 군.”
퉁명스러운 벨로나의 말에 카시안이 물었다.
“저 자를 아십니까?”
“저 자가 바로 루스베키아의 국왕인 레오드 아르센 루스베키아야. 연합군의 수장이라는군. 그리고 나와 혼담이 오갔던 상대야.”
벨로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인 말에 카시안의 속이 묘하게 뒤틀렸다. 이미 지나간 혼담일 뿐이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레오드가 흑갈색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칼리스를 비롯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레오드는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벨로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공주님. 이런 곳에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애써 예를 갖추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이제는 공주도 뭣도 아닌 걸요. 편안하게 대하십시오, 전하.”
벨로나의 차가운 태도에도 레오드는 안색에 변화 없이 정중함을 유지했다.
“그래도 옛 인연이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요.”
“저희가 인연이랄게 있었나요. 그 부분은 개념치 마십시오. 저도 미련 없으니 편히 대해주십시오.”
벨로나가 확실히 선을 긋자 잠시 머뭇거리던 레오드는 이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막힘없이 청량해 주변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하하하, 알겠소. 그럼 앞으로는 벨로나라고 부르지. 이쪽 분은?”

칼리스가 옆으로 다가와 카시안을 소개했다.
“저와 오랫동안 함께 한 카시안이라고 합니다. 무력이 출중하고 믿을 수 있는 자입니다.”
칼리스의 낯선 칭찬에 카시안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다 엉겁결에 레오드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전하. 카시안입니다.”
레오드는 거리낌 없이 호감을 드러냈다. 카시안 역시 그런 그의 태도가 싫지 않았다.
“칼리스가 칭찬하는 사람이니 앞으로 기대하겠네. 자, 인사는 이쯤 하고 의논할 것이 많으니 막사로 갑시다.”

막사에 준비된 원탁 책상 주변으로 사람들이 착석하자 레오드가 지도를 펼쳐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1군은 그레이우드 숲에 집결했고, 2군은 힐랄 산맥을 지나는 중이니 내일쯤 제국 후방에 집결할 수 있다. 문제는 지원군인데… 반에게서는 연락이 없나?”
레오드가 부관을 쳐다보자 부관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반을 믿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카르테시온이 끝내 응답하지 않는다면 계획에서 제외할 수밖에.”
“걱정 마십시오, 전하. 무스타르에서 곧 배를 타고 도착할 예정입니다. 이번 주 내로 제국 서부 지역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건장한 체격을 지닌 앙게르의 대표, 로스테인이 나섰다. 로스테인은 칼리스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황제의 개를 연합군에 합류시키는 것에 전 반대합니다. 녀석이 끄나풀일지 어찌 압니까. 저런 녀석을 어찌 믿으시고…”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섬찟하게 빛나더니 낮고 서늘한 음성이 퍼졌다.
“너한테 믿으라고 한 적 없어.”
로스테인의 얼굴이 붉어지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 저… 예의도 없는!!”

칼리스는 상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숨 막힐 정도로 냉혹했다.
“전장에서 예의가 무슨 소용인가. 실력이 중요하지. 앙게르의 로스테인. 나와 겨루어 이길 자신이 있나?”
“…!”
“자신이 없다면 내 밑으로 기어야지.”
“이씨! 그걸 말이라고…”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었다. 누구도 칼리스의 말을 단순한 허세로 여기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피를 볼 듯한 분위기에 장내가 숨죽인 듯 고요했다.

쾅!
“우리가 우애를 다지자고 모인 자리였나? 순간 헷갈렸군. 회포는 나중에 따로 풀고, 지금은 중요한 이야기부터 하지.”
레오드가 책상을 내리치자 팽팽하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흩어졌다. 그의 진중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모였다.
“로스테인경, 칼리스경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어. 같은 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칼리스경은 나와 신의의 맹약을 나누었어. 적어도 우리가 제국을 무너뜨릴 때까지, 그의 칼이 우리를 향할 일은 없네.”
‘신의의 맹약’이라는 말에 로스테인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정리되자 헬리오스가 칼리스를 향해 물었다.
“숲에 환영 마법을 건 것을 보니, 황제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알고 있나?”
벨로나를 흘깃 쳐다본 칼리스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의 심기를 건드릴 일이 있어서… 디에나 공주를 죽이려 했다. 아마 우리도 더 이상 필요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나를 길들일 요량으로 했을 수도 있지.”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무리하면서까지 공주들을 끌고 가 놓고 왜 죽이냐는 말이지? 원래 목적이 신탁 때문이지 않았나?”

“아… 신탁의 주인을 알아냈구나. 그게 누구지?”
헬리오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칼리스는 심사가 뒤틀렸다.
“왜 궁금해하지? 너도 영생을 원하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칼리스. 난 이미 이백년을 넘게 살았어. 나는 영생 따윈 관심 없어. 신탁의 주인만이 할 수 있는 일에 관심이 있는 거지.”

“그것이 헬리오스님께서 말씀하셨던 대의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레오드가 헬리오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헬리오스는 칼리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응, 맞아. 그것은 내 오래된 염원이자 대의를 완성해 줄 열쇠지. 그러니 칼리스. 우린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어. 내 염원이 바로 네 염원이기도 하니까.”

칼리스는 헬리오스의 시선도 말투도 모두 신경에 거슬렸다. 어쩐지 그가 불편하고 어려웠다. 그의 앞에서는 쉽게 긴장을 놓을 수 없어 말투도 거칠어졌다.  
“무슨 개소리야? 알기 쉽게 말해.”
“하하하, 조급해하지 마. 곧 알게 될 테니까.”
헬리오스는 그런 칼리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 넘기며 레오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레오드. 제국을 치기 전에 해결해야 할 것들이 분명해졌어. 메레디아를 먼저 처리해야 해. 그 여자가 내 마법 눈동자를 가진 이상 막는 것에 한계가 있어. 그 눈동자가 제법 힘이 강하거든. 그리고 칼리스가 심장을 되찾아 황제의 힘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해. 저 녀석 심장을 쥐어짜면 숨도 못 쉬고 쓰러져 버리거든. 그래서야 전력에 큰 지장이 생기지 않겠나.”

칼리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당황한 눈빛을 감추려는 듯 도리어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대마법사를 우습게 보지 마. 내가 모르는 것은 세상 누구도 모르는 거야.”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던 헬리오스는 금세 진지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나와 칼리스가 먼저 황궁에 침입하는 것은 어떨까? 칼리스는 심장을 되찾고, 나는 마법 눈동자를 회수하고. 그 이후에 공격한다면 승산은 우리 쪽이 훨씬 높아.”

부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황궁은 황제의 성정을 닮아 함정도 많고 내부 구조도 복잡하고 치밀한 곳이었다.
“…황궁 침입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경계도 삼엄해질 테고 황제라면 뭔가 술수를 써 놨을 수도 있습니다.”

칼리스는 헬리오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헬리오스라면 병사 수십보다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심장을 빼내 오면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칼리스는 성공 가능성이 높은 그의 제안에 결국 마음이 움직였다.
“걱정 마. 황궁이라면 비밀 통로 두어 개쯤 알고 있다. 언제 출발할 생각이지?”
칼리스의 목소리는 한껏 누그러져 있었다. 헬리오스는 그런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네가 준비가 될 때.”

헬리오스는 칼리스에게 머물던 시선을 이번에는 벨로나 쪽으로 돌렸다.
“아,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어. 에스카리엘에서 물건을 하나 찾아와야 하는데… 반드시 공주들 중 한 명이 가야 해.”
헬리오스의 말에 벨로나의 두 눈이 커졌다.
“저희들이요? 반드시 저희들 중 한 명이 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에스카리엘 지하 무덤에 내가 찾는 물건이 있는데, 그곳은 에스카리엘 왕족의 피를 가진 자만 통과할 수 있거든. 우리의 승리에 꼭 필요한 물건이니 빨리 가져다주면 좋겠어.”
“그럼 동생들과 의논해 보겠습니다. 저는 언니 장례 준비도 해야 해서…”
“좋아, 의논하고 누가 갈지 알려줘.”
“찾으시는 물건은 어떤 것입니까?”
“한 뼘보다 약간 큰 정도의 단검이고 칼자루에 용 문양이 새겨져 있어. 아, 신탁의 주인은 칼에 접근하지 않는 게 좋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죽을지도 모르거든.”

헬리오스의 말에 칼리스의 눈빛에 다급함이 스쳤다. 벨로나는 장례 준비로 바쁘고 루에나는 제정신이 아니다. 간다면 아스티나 일 것이다. 하지만, 아스티나는 신탁의 주인이다. 그녀를 사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내 생각에는! 저 공주가 가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런 중요한 일을 아무나 할 수 없지.”
칼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의 말에 벨로나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무슨! 그런 것을 왜 당신이 결정하는 겁니까. 난 다른 일들로 바쁜…”
“그런 건 아스티나한테 맡겨. 사사로운 일에는 신경 쓰지 말고 중요한 일을 해야지. 어서 떠나.”
“이 무례한 놈!!”
벨로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쳤다. 마음 같아서는 칼리스를 한 대 갈겨주고 싶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주먹만 부들부들 떨었다. 결국 분을 참지 못한 벨로나는 그대로 장막을 뛰쳐나가 버렸다.  

“하아… 주군. 이번에는 정말 잘못하신 겁니다.”
카시안은 깊은 한숨을 쉰 뒤 그녀를 뒤따라 나갔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헬리오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칼리스는 방금 벌어진 상황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장막 내 사람들이 그를 향해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을 알아챈 후에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옆에 앉아있던 레오드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자네, 은근 고약한 사람이군. 용족이라 그런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죠… 진짜 심장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고…”
웅얼거리는 칼리스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칼리스는 자신의 심장 부근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선명한 두근거림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분명 심장은 그곳에서 뛰고 있었다. 그럼에도 온몸에 스산하게 퍼지는 감각은 끊임없이 경고했다.
이것이 진짜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황제가 가진 진짜 용의 심장을 되찾아 박아 넣으면 조금은 인간다워질 수 있을까. 아니면 지금보다 더 잔인한 괴물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칼리스는 입안이 텁텁해져 피식 웃어버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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