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선택

31화

각자의 선택

아스티나를 간신히 달래 그녀의 막사에 데려다주고 나온 칼리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떨쳐내려 할수록 불안은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자신을 외면하던 아스티나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주군,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카시안이 가까이 다가왔다. 여러모로 지쳐 있던 칼리스는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오늘따라 내가 인기가 많군. 무슨 일이지?”
말을 고르던 카시안이 힘겹게 입을 뗐다.
“주군… 저도 벨로나 공주님을 따라 에스카리엘로 가겠습니다.”

미간을 깊이 찌푸린 칼리스가 애써 호흡을 골랐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상황이 얼마나 긴박한지 안 보이나? 넌 최정예 중 하나야. 지금 네가 빠지면 전력에 구멍이 생긴단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다 알고 있는데… 전 공주님을 도저히 혼자 보낼 수 없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칼리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치밀어 오른 감정을 애써 눌렀지만 목소리는 거칠었다.
“네 녀석이 지금 얼마나 허튼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알고 있나?! 그런 일은 아무나 시키면 되잖아!”

잠시 말없이 칼리스를 바라보던 카시안이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단했다.
“주군… 아스티나 공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갑자기 무슨!”
“그렇다면 제 마음도 이해하시겠지요.”
카시안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칼리스의 시선을 마주했다.
“저는 벨로나 공주님을 사랑합니다. 환영의 숲에서 저는 그분에게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주군이 아니라, 그분을 지키고 싶습니다.”
카시안은 잠시 숨을 골랐다.
“누구에게도 공주님을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지키고 싶습니다. …저한테는 그분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
칼리스는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카시안이 빠지면 당장 전력에 구멍이 생긴다. 오랫동안 등을 맡겨 온 그만큼 믿을 만한 자도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황궁에 있는 동안 아스티나는 누구에게 맡긴단 말인가.

문득 카시안의 말이 떠올랐다.“누구에게도 공주님을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지키고 싶습니다. …저한테는 그분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자신도 아스티나를 지키기 위해 황궁으로 가는 것이다. 심장을 되찾아야 그녀를 지킬 수 있으니까. 그런데도 왜 카시안의 말이 이토록 마음에 걸리는지 알 수 없었다.

칼리스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카시안을 노려봤다. 하지만 카시안은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칼리스는 그 모습에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정말 떠날 셈이냐? …이미 마음을 정했군.”
“예.”
칼리스는 한동안 카시안을 바라봤다.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나?”
“후회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공주님을 혼자 보낸다면… 그건 평생 후회할 겁니다.”
카시안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래, 알겠다. 사랑에 미친 바보가 또 있었군. 잘 다녀와라.”
“감사합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납시다.”
칼리스는 대답 대신 카시안의 어깨를 한 번 세게 두드렸다. 오랫동안 전장을 함께 누빈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카시안이 먼저 돌아섰다. 칼리스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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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안은 말 등에 얹힌 짐을 단단히 동여맨 뒤 안장과 편자를 차례로 살폈다.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오전 중에 출발한다고 들었는데, 준비가 끝난 것인가.”

카시안이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레오드가 부관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카시안은 서둘러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레오드는 카시안의 손에 금화가 든 주머니를 건넸다.
“여비로 쓰도록 해. 자네가 간다니 아쉽지만 칼리스경이 승낙했으니 내가 말을 보탤 필요는 없겠지. 몸조심하고 빠른 시일 내에 복귀하도록 해.”

“압박은 그쯤 하시지요. 아직 출발도 전인데 이렇게 부담을 주셔서야 말이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벨로나의 등장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벨로나는 엉성하게 잘린 단발머리를 흩날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고… 공주님, 머리가! 하, 미치겠네. 언제 자르신 거예요?!”
카시안이 다급히 벨로나에게 달려가 이리저리 머리를 살폈다. 벨로나는 귀찮다는 듯 카시안의 손길을 피했지만, 얼굴에 옅은 열이 오르자 들키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하하, 잘 어울리는군. 심경에 변화라도 있었나. 그런데… 조금 다듬어야겠어.”
“대충 자른 거라 그렇습니다. 바쁜데 그냥 두지요, 뭐.”
벨로나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자 카시안은 애가 닳았다.
“뭘 그냥 둡니까. 제가 다시 다듬어 드릴까요? 아니다, 제가 하면 망칠 것 같아요.”

그때, 카시안의 시야에 아스티나가 보였다.
“아! 아스티나 공주님께서 봐주시겠습니까?”
조금 떨어져 있던 아스티나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갑자기 쏠린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서먹해진 벨로나를 이대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스티나는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내가… 만져도 될까?”

벨로나는 아스티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꽉 끌어안았다.
“물론이야, 아스티나. 네가 해준다면 좋겠어.”
그녀의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아스티나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제는 내가 너무 몰아붙여서 미안해. 그래도 이것만은 잊지 마. 넌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소중한 동생이야.”
“언니…”

아스티나는 카시안이 건넨 가위를 들고 벨로나의 머리카락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던 벨로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스티나, 내가 없는 동안 루에나를 잘 부탁해.”
벨로나가 잠시 아스티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너도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앞으로는 네 도움이 필요할 거야. 넌 영리하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벨로나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어렸다.
“다시 만날 땐 너도 나도 지금보다 조금 더 성장해 있자. 그리고 카시안. 이제부터 나한테 공주님이라고 부르지도 말고, 존대도 하지 마. 그냥 편하게 대해.”
벨로나가 레오드를 힐끗 바라봤다.
“내 위치는 이제 내가 스스로 찾을 테니까.”
그녀의 말에 레오드는 피식 웃었다.
“전하.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언니의 장례를 치러주십시오. 그에 대한 대가도 반드시 치르겠습니다.”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도울 테니 걱정 마. 날 너무 속물로 보는 것 아닌가.”
벨로나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아스티나가 머리 손질을 끝내자, 벨로나는 한결 가벼워진 머리카락을 흔들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스티나는 그런 벨로나를 한 번 더 껴안았다. 준비된 말에 오른 카시안과 벨로나는 마중 나온 사람들과 한 번 더 인사를 나누었다. 카시안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칼리스의 막사 쪽을 마지막으로 돌아본 뒤 말머리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모습이 유난히 선명해, 절로 미소가 번졌다.
“출발하자, 카시안.”
“…응, 가자. …벨로나.”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벨로나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벨로나가 먼저 말머리를 돌리자 카시안이 뒤따랐다. 잠시 후 말 두 필이 나란히 진영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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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에 테오도르는 한마디도 못 한 채 눈치만 살폈다. 예상보다 완강한 국왕의 태도에 자신이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깨달았다.

반듯한 반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그 역시 실망감을 간신히 억누른 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카르테시온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협상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거라 믿었다. 루스베키아를 떠나기 전 얼마나 호언장담했던가. 예상치 못한 거절에 반의 입가가 미세하게 굳었다.
‘꽉 막힌 노친네 같으니라고! 늙은 정치꾼들이란!’
커프스를 만지던 손끝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땡그랑!
커프스 단추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반은 한숨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주변에 있던 시종이 커프스를 주워 그에게 내밀자 반은 가벼운 미소로 감사를 전했다.

왕은 그가 정교하게 빚은 인형 같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섬뜩했다.  
“크로첸 경. 내 생각은 변함이 없소. 카르테시온은 어떤 순간에도 중립을 유지할 것이오.”
“중대한 일을 어찌 한 순간에 결정하십니까? 레오드 전하를 한 번 뵙고…”
“우리를 더 이상 흔들지 마시오. 나는 그와 결이 다른 사람이오.”
“폐하, 한 번만 재고해 주십시오! 연합군에는 카르테시온이 필요합니다.”

왕은 싸늘한 눈빛으로 반을 쳐다봤다.
“테오도르, 손님께서 내일 떠나신다니 그동안 접대에 소홀치 말아야 한다. 알겠느냐?”
테오도르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반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지팡이를 짚는 것이 익숙지 않은 테오도르는 금세 이마에 땀이 맺혔다. 반이 슬며시 다가와 어깨를 내어주었다. 테오도르는 반의 어깨를 짚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미안하네… 그렇게 아버님께서 강경하실지 예상 못했어.”
“아닙니다. 폐하의 입장도 이해합니다. 오랫동안 카르테시온을 평온하게 지켜오신 분이니 섣불리 위험을 감수하기 어려우시겠지요.”

반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왕자님께서도 작금의 사태를 아시지 않습니까. 한 치 앞도 모르는 세상에서 홀로 중립을 고집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지킬 수 없습니다.”
“저는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폐하를 설득하고 싶은데…
혹시 왕자님께서 도움을 주실 수 있을까요?”
테오도르가 머뭇거리자 반은 다정한 미소를 띠며 나긋하게 말했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왕자님의 친우로서 조금만 더 머물 수만 있으면 됩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테오도르도 반이 당장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리 통증으로 울적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벗이 머문다는데, 아버지도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테오도르는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 친우라면 오래 머문다 해도 아버님께서 뭐라 하시진 못하겠지.”
반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다행입니다! 왕자님과 벌써 헤어진다니…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자네가 있다면 내 울적함이 사라질 것 같아. 편안하게 머물면서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도록 해.”
테오도르도 미소를 지었다. 반은 테오도르를 부축해 방까지 안내했다. 방으로 가는 내내 오랜만에 기분이 풀린 테오도르는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반은 그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왕을 설득할 방법을 차분히 궁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왕을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설득할 필요가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된다.
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미소를 유지했다. 다만 그의 회색 눈동자만 차갑게 식어 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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