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9화) 가까워지는 두 사람

매냐씨 2026. 6. 29. 14:27

 

짧은 휴식을 마무리하고, 공주들이 말을 바꿔 탄 뒤 반나절이 흘렀다.

늦지 않게 야영을 하려면 노던 숲을 서둘러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울창하게 우거진 숲은 말을 몰기에 썩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여름 내 자란 나무들은 하늘을 가릴 만큼 높게 가지를 뻗고 있었고, 곳곳에 계곡과 바위가 길을 막고 있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나뭇가지까지 쉴 새 없이 얼굴을 스쳐, 칼리스는 달리는 와중에도 가지를 꺾어내야 했다.

 

칼리스는 아스티나를 힐끔 쳐다봤다.

혹시나 나뭇가지가 그녀의 여린 피부에 상처를 낼까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아스티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 보였다.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아스티나의 체취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며칠째 향유를 쓰지 못했을텐데, 아스티나는 달콤하고 그윽한 향기를 뿜었다. 그녀의 향기는 목덜미에서 더 짙게 퍼져, 칼리스는 되도록 고개를 빳빳이 들려고 노력했다.

 

칼리스는 갑자기 자신만 신경 쓰고 긴장하는 것이 한심해졌다.

자신의 품에 쏙 들어와 있는 아스티나에게 온 신경을 뺏긴 자신이 우스웠다.

그렇게 멀리 하려고 애를 썼는데.

자신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 여자는 너무나 쉽게 다가왔다.

 

루에나 언니는원래 겁이 많은 편이야.”

아스티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심약한 데다 많이 지쳐 있기도 하고.”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덧붙였다.

무서워서 그런 거지, 널 싫어하는 건 아니야.”

칼리스는 공주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자신의 배려와 친절이 무시당한 것 같았다.

 

공주도 내가 무섭나?”

아스티나가 고개를 돌려 칼리스를 쳐다봤다. 아스티나의 푸른색 눈동자가 맑은 구슬처럼 반짝거렸다.

약간? 처음엔 진짜 무서웠었는데, 지금은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

그래?”

“…다행이군

아스티나는 다행이라고 낮게 읊조리는 칼리스의 목소리에 살짝 가슴이 떨렸다.

무서웠다면 자진해서 같이 말을 타겠어?”

, 그건 그렇지.”

칼리스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아스티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제국까지는 한참인데, 날을 세워봐야 도움될 것이 없다.

 

불편하지는 않나?”

칼리스가 부드럽게 물었다.

없어. 안정감 있고 편안해.”

 

헤헤, 누워서 잘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스티나는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게 되었다.

아스티나와 눈이 마주친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크게 확장되었다. 장난칠 요량으로 한 짓인데 칼리스가 당황하니 아스티나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공주는 위험하게 고개를 왜!!”

칼리스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아스티나는 기분이 상해 입술을 비죽거렸다.

, 뭐 그런 걸로 화를 내고…”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칼리스는 아스티나의 기분이 상한 것 같아,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공주는 조심할 필요가 있어. 황제 앞에서도 그렇게 맹랑하게 굴었다가는 큰일날거다.”

칼리스의 말에 빈정이 상한 아스티나가 쏘아붙였다.

내가 바보야!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불현듯 아스티나는 잊고 있었던 현실감이 생생하게 느껴져 온 몸이 긴장되었다.

자신들을 원하는 제국의 황제.

오만하고 잔인한 성정이라고 들었다.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스티나가 긴장한 것을 본 칼리스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너무 그녀를 다그쳤나 싶어 그녀의 기분을 살폈다.

이 정도에 마음 상하는 거냐?”

무슨 말이지? 난 완전 평온한 상태야.”

아스티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칼리스는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인생에서 여자를 달래 본 경험은 없었다.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건데, 냉랭한 그녀의 모습에 안절부절하는 자신이 이해되질 않았다.

 

공주는 속이 좁군.”

겨우 나온 말이 이거라니.

칼리스는 자신의 어휘력에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화난 아스티나가 눈을 흘기며 뒤돌아봤다.

도대체 날 긁어서 뭘 하고 싶은 거야?!”

칼리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눈썹에 잔뜩 힘을 준 아스티나는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칼리스는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보였다.

 

발레리온 경.”

아스티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제부터는 우리 조용히 가도록 하죠.”

아스티나는 경어를 사용하며 확실히 선을 그었다.

칼리스는 내심 서운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 이상 그녀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 공주님.”

빈정거리는 칼리스의 말에 아스티나는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참자. 참자.

간신히 화난 그의 마음을 풀었지 않나.

아스티나는 이 평화가 더 이상 깨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잠시 뒤.

숲길에는 말발굽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칼리스는 슬쩍 아스티나를 내려다봤다. 그 뒤로 아스티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었는데.

 

칼리스는 괜히 목이 답답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

아스티나는 반응이 없었다. 칼리스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나.

공주?”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주?!”

겨울 바람처럼 싸늘한 그녀의 뒷모습에 칼리스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스티나?”

아스티나의 어깨가 긴장으로 수축되는 것이 보였다. 처음으로 이름을 부른 칼리스도 왠지 입 속이 메말라졌다.

아스티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칼리스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나뭇잎 붙었어.”

칼리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조심스럽게 떼어주었다. 그의 따뜻함에 아스티나는 차가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을 것만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미워.”

칼리스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손만 거두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자신의 마음이 들킬 것만 같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밉다.

너무 미운 남자다.

아스티나는 속으로 그에 대한 미움을 끝없이 뱉어냈다.

하지만, 도무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

며칠째 내린 비로 계곡물은 눈에 띄게 불어나 있었다.

말을 타고 건너기에 위험할 정도였다. 결국 제국군은 말에서 내려 계곡을 건너기로 했다.

 

주군, 공주님들이 건너기에는 위험해 보입니다. 제가 안아서 옮기겠습니다.”

왠일로 병사 한 명이 불편함을 자처했다.

칼리스는 붉은 눈을 굴리며 그를 유심히 살펴봤다. 아무래도 다른 뜻이 있어 보였다.

 

카시안, 네가 공주님들을 한 명씩 옮겨.”

칼리스는 결국 만만한 카시안에게 명령했다.

? 주군은 왜 힘든 일만 저를 시키십니까?”

카시안이 질린다는 얼굴로 툴툴거렸다.

저보고 네 번이나 여길 왕복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번이라.

칼리스의 시선은 아스티나에게 자연스럽게 쏠렸다.

그건 비효율적이다. 나와 칸델, 그리고 빌헬름이 돕기로 하지.”

 

칼리스는 성큼성큼 아스티나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 공주 이리로.”

아스티나는 잔뜩 긴장했다.

어서.”

칼리스가 무덤덤한 얼굴로 아스티나를 향해 손짓했다. 아스티나는 주춤거리다 칼리스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에게 안기는 것이 두번째인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아스티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는 긴장한 것이 들킬까 그의 어깨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꽉 잡아, 아스티나.”

또 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 남자.

그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너무 부끄러워 숨어버리고 싶었다.

 

칼리스도 긴장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은 너무 정신이 없었던 탓에, 아스티나를 안는 것이 이렇게 자극적일지 예상하지 못했다. 목을 감은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가 스칠 때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은은하게 느껴지던 달콤한 체취는 그의 코 끝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칼리스는 정신을 단단히 붙잡고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강한 압박에 아스티나가 움찔거렸다. 그 바람에 칼리스는 그녀를 놓칠 뻔했다.

“…공주, 긴장 좀 풀지. 나를 못 믿나?”

칼리스는 아스티나를 잡은 손을 고쳐 잡았다.

칼리스가 너무 쎄게 잡아서…”

 

그녀가 나지막이 자신의 이름을 내뱉자, 칼리스는 심장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내 이름이 이렇게 달콤한 것이었나?

한 번 더 불러봐.”

칼리스의 말에 아스티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

칼리스는 눈을 활처럼 휘고는 그녀를 쳐다봤다.

내 이름.”

아스티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을 하는거야!”

부끄러워진 아스티나의 목소리가 점점 조그맣게 사그라졌다.

“… 빨리 건너기나 해.”

칼리스는 아쉬움에 잠시 머뭇거리다 계곡으로 성큼 성큼 들어갔다.

 

첨벙. 첨벙.

됐어. 내가 알아서 해.”

공주님!”

 

루에나를 안고 계곡을 건너던 카시안이 시끄러운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당황해하는 칸델을 뒤로하고, 벨로나가 계곡물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 돌아버리겠네.”

카시안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벨로나는 항상 그랬다.

얌전히 있으면 좋으련만.

기어코 일을 벌리고야 마는 말괄량이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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