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놓치지 마

콰아아앙-!!!
여관 전체가 흔들릴 만큼 거대한 충격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아스티나가 잠에서 깼다.
쾅-!!!! 콰앙!!
두번째 굉음.
“공주!”
“엇, 이게 무슨…”
아스티나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들렸다.
“위험하다! 빨리 나가야 해!”
칼리스는 재빠르게 아스티나를 수건에 감싸 안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스티나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엉겁결에 칼리스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볼에 닿은 단단한 근육을 느낀 순간, 아스티나는 크게 당황했다.
칼리스가 상체를 드러내고 하반신은 수건만 두른 상태로 그녀를 안고 있었다.
문 밖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복도를 뒤덮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당황한 것도 잠시, 연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연기 사이를 뚫고 카시안이 달려왔다.
“주군!!”
“무슨 일이냐!!”
“에스카리엘 잔당들의 습격입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놈들, 죽을 각오로 덤벼들고 있어서 만만치 않습니다. 어서 준비를…”
급하게 달려와 경황이 없던 카시안은 그제서야 벌거벗은 주군의 품에 안겨 있는 아스티나를 봤다. 카시안의 시선이 칼리스와 아스티나를 번갈아 훑었다.
“뭘 상상하는 거야!!”
칼리스는 한심해하는 카시안의 눈빛을 읽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넌 빨리 공주님들이나 보호해!”
카시안이 사라지자 아스티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벌거벗은 남자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졌다.
“내… 내려줘!!!”
그녀가 몸을 비틀자 칼리스는 더욱 꽉 껴안았다.
“가만히 있어!”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꽉 잡아!”
“절대 놓치지 마.”
아스티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절박한 그의 목소리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그저 팔에 힘을 주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 묻었다.
칼리스는 곧장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복도는 이미 전쟁터였다. 제국군과 에스카리엘 병사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고, 검은 연기 때문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서걱.
칼리스는 아스티나를 한 팔에 안은 채 검을 휘둘렀다. 달려들던 에스카리엘 병사들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슝-!
곧이어 옆에서 창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칼리스는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뒤 그대로 상대의 가슴을 꿰뚫었다.
아스티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자신을 안고 있는데.
그런데도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한 손만으로 싸운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를 가로막던 병사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보며 아스티나는 새삼 깨달았다.
황제의 사냥개.
그 별명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칼리스는 평소와 달랐다.
병사들의 칼끝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혹시라도 공주에게 닿을까.
혹시라도 자신이 그녀를 놓칠까.
평소 같았으면 진작 공주를 어딘가에 던져 두고 싸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럴 수 없었다.
공주를 내려놓는 순간 위험해질 것만 같았다.
오히려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이러는 거지.
칼리스는 이를 악물고 아스티나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얼마 후.
마지막 병사가 쓰러졌다.
불길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전투는 끝났다. 찢어진 망토 위로 에스카리엘 왕가의 은빛 문장이 보였다.
죽음을 각오한 습격이었다. 그렇기에 제국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당분간은 야영을 해야겠습니다."
카시안이 피 묻은 검을 털어내며 말했다.
"숙소를 이용하는 건 위험합니다."
칼리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결정이 뼈아픈 실책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아스티나에게 향했다.
칼리스는 짜증스럽게 시선을 거뒀다.
앞으로는 선을 그어야 한다.
더 이상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눈은 자꾸만 그녀를 쫓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은 뜨거운 열기.
아무리 손을 쥐었다 펴도 사라지지 않았다.
폭발 때문일까?
죽어간 병사들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을 감싸 안았던 남자 때문일까?
아스티나는 칼리스의 뜨거웠던 맨살의 감촉을 떠올렸다.
자신을 꽉 껴안았던 탄탄한 근육.
거칠게 내 뱉던 숨결.
귓가에 닿던 빠른 심장 소리.
아스티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칼리스를 떠올리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나라를 잃었다.
백성들을 잃었다.
그런데 자신은…
아스티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힘들어...."
울음 섞인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 가고 싶어...."
루에나였다. 겨우 울음을 멈췄던 그녀가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스티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루에나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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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카리엘 잔당들의 습격 이후, 칼리스 부대는 원래 경로를 수정해 숲길로 가기로 했다. 언제 또 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공주들의 급격한 체력 손실이었다.
황제의 소중한 전리품이 손상되면 안 될 일이다. 여관에서 구했던 마차는 불에 타버려 다음 마을에서나 구할 수 있었다. 결국 공주들을 부하들의 말에 나눠 태우기로 했다.
부하들 중 점잖아 보이는 녀석들의 말에 공주들을 각각 태웠다.
“루에나 공주는 이리로.”
칼리스는 일부러 루에나를 자신의 말에 태웠다.
여관 사건 이후 그는 의도적으로 아스티나를 피했다. 앞으로는 그녀를 멀리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카시안”
“네, 주군.”
“아스티나 공주는 네 말에 태워라.”
아스티나는 카시안에게 맡겼다. 부하들 중 가장 믿을 만한 녀석은 카시안 뿐이었다.
“예? 전 제 말에 아무도 안 태웁니다.”
카시안은 칼리스의 서늘한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 귀찮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공주님은 저보다 칸델이 훨씬…”
“카시안.”
칼리스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카시안을 노려봤다.
“네, 분부를 따르지요.”
카시안은 얄미운 미소를 짓더니, 아스티나를 본인의 말에 태웠다. 칼리스는 안심한 듯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때, 칼리스의 손끝으로 잦은 떨림이 전해져 왔다.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루에나가 겁에 질려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칼리스는 부아가 치밀었다.
루에나는 처음부터 자신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해 눈도 제대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지금도 신사적으로 대해주고 있는데, 이렇게 사시나무 떨듯이 하다니.
“공주, 제대로 내게 붙어. 그러다 떨어진다.”
칼리스는 루에나를 거칠게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히익!”
루에나는 칼리스의 손길에 바짝 긴장해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칼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욕을 뱉을 뻔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른 칼리스는 더 이상 공주에게 신경을 끄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정면만 응시했다.
한참 숲 속을 달리던 칼리스는 루에나의 몸이 이상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공주? 루에나 공주?”
아무리 불러도 공주가 대답을 하지 않자, 칼리스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살펴봤다.
루에나는 기절한 상태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미치겠군.
칼리스는 머리가 지끈거려 손가락으로 관자를 지긋이 눌렀다.
“멈춰라! 여기서 잠시 쉬어간다.”
뒤따르던 병사들이 일제히 말을 멈췄다.
“주군, 무슨 일…”
놀란 카시안이 쓰러진 루에나와 칼리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카시안의 말에 타고 있던 아스티나도 두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언니!”
“공주님을 때렸습니까?”
“무슨!!”
카시안의 어이없는 질문에 칼리스는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아스티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넌 생각을 좀 하고 말을 뱉어! 공주 혼자 기절한 거야.”
카시안이 이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얼마나 주군이 무서웠으면. 하하하하!”
칼리스는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카시안을 한 대 쳐버릴 것만 같았다.
“우선 공주님을 말에서 내려 쉬게 해야겠어요. 갈길이 먼데 성가시게.”
아스티나는 미운 말을 하는 카시안을 쏘아봤다.
“내가 제대로 성가시게 해줄까?”
카시안은 항복의 제스쳐를 보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공주님. 이 미천한 놈이 실수했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카시안은 이 맹랑한 공주와 엮이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이런 타입은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무 그늘에서 쉬던 루에나는 점점 의식이 깨어났다.
“루에나, 정신이 드니?”
디에나가 다정하게 물었다. 공주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루에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언니, 여기는?”
“여긴 숲 속인데,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어. 말에 탔다가 기절했는데, 기억나니?”
그제야 디에나는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울기 시작했다.
“흑흑흑… 언니, 너무 무서워. 그 말에 타고 싶지 않아.”
겁에 질린 루에나가 디에나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가 나를 만졌을 때,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어. 흑흑흑….”
아스티나는 겁먹은 루에나의 상태보다, 칼리스가 더 신경쓰였다. 루에나의 태도가 칼리스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불안해졌다.
“칼리스만 아니면 괜찮은 거야?”
아스티나가 물었다. 루에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랑 바꿔. 카시안이 얄미운 건 맞지만, 헛 짓할 녀석도 아니고 말도 잘 몰아.”
루에나는 그제서야 안도의 눈빛을 비췄다.
칼리스는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듯 말을 거칠게 손질하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루에나 공주는?”
아스티나를 발견한 칼리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좋아졌어. 이제 출발해도 될 것 같아.”
아스티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말을 했다.
“…그래.”
칼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공주를 다시 말에 태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칸델이나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부하를 부르려 고개를 돌린 칼리스는 놀라 그 자리에 멈췄다.
아스티나가 두 팔을 벌린 채 그를 향해 서 있었다.
“… 공주, 지금 뭐하는?”
“날 안장 위로 올려줘야지.”
아스티나는 초록빛 눈동자를 빛내며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내가 이 말을 탈거야.”
칼리스는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서.”
당당한 아스티나의 고갯짓에, 칼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역시 이상한 공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