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흔들리는 마음

짙은 어둠이 가라앉은 지하 감옥.
메레디아는 신경질적으로 손가락 끝을 움직였다.
분명 느꼈다.
잠깐이었지만, 멈춰 있던 심장이 따뜻하게 뛰는 것을.
그런데 어느 순간 다시 사라졌다.
칼리스를 볼 수만 있다면 알 수 있을 텐데.
심장이 왜 반응했는지.
정말 반려를 찾은 건지.
아니면 자신이 착각한 건지.
하지만 황제는 그녀를 이 지하에 가둬 놓은 채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황제를 죽여 버릴까?
황제 따위, 눈 한 번 깜빡이면 죽일 수 있는데.
그 순간. 철그럭.
황금 사슬이 살을 파고들었다.
“으윽….”
황제에 대한 불온한 생각만으로도 반응하는 저주 같은 구속구.
메레디아는 비틀거리며 웃었다.
하이데벨 마법사들이 만들었다던가.
하여튼 그 영감들은 쓸데없는 걸 잘도 만든단 말이지.
목을 문지르던 메레디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우스워졌다.
대마녀꼴이 이게 뭔지.
수백 년을 살아 놓고도, 고작 한 남자에게 이토록 집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랑?
그딴 시답잖은 단어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건 훨씬 오래되고, 훨씬 위험하고, 훨씬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
처음 그를 본 순간부터.
메레디아는 이미 끝나 있었다.
"후후..."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칼리스가 그녀를 선택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도망쳐도 미워해도 상관없다.
결국 마지막에 그가 바라보게 될 것은 자신뿐일 테니.
“쿨럭!! 쿨럭… 켁켁….”
갑자기 검붉은 피가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메레디아는 손등으로 피를 훔쳤다. 최근 들어 피를 토하는 횟수가 늘고 있다.
이 몸도 이제 한계다.
새로운 숙주가 필요하다.
건강하고 오래 버틸 수 있는 몸.
가능하면 아름다워서 칼리스를 매혹시킬 수 있다면 더 좋겠다.
검은 안대 사이로 메레디아의 요망한 보라색 눈이 번뜩였다.
"흐흐흐, 조금만 기다려."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칼리스인지.
새로운 숙주인지.
아니면 황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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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티나는 며칠 동안 폭풍처럼 휘몰아친 현실에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 얼어붙어 있던 근육이 조금씩 풀려 갔다. 따뜻한 수프까지 먹고 나니 배도 든든했다.
왕궁 생활 때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좋았다. 침대에 몸을 묻은 아스티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문득 칼리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차갑게 돌아서던 얼굴과 건조하고 낮게 깔리던 목소리.
아스티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겼다.
괜히 이것저것 따져 묻지 않았어도 됐는데.
아직 제국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마음 한구석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똑- 똑- 똑-
자꾸만 눈이 감기던 아스티나는 노크 소리에 잠이 깼다.
“…누구냐?”
“공주님, 카시안입니다.”
아스티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카시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무슨 일이야?”
“주군께서 목욕물을 준비하라 하십니다.”
"...응?"
아스티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난 방금 목욕했는데?"
"주군의 목욕물 말입니다."
아스티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 이 미친놈이 진짜.
순간 울컥 욕지거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언니들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현명하게 판단하리라 믿어, 공주.”
아스티나는 불현듯 칼리스의 말이 떠올랐다. 아스티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참자. 대가는 치러야지.
그 덕분에 노예 주제에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그의 방으로 안내해줘.”
아스티나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카시안을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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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기운과 나른한 향유향에 아스티나는 또 다시 잠이 쏟아졌다.
눈꺼풀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감겼다.
아..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정말… 안되는데……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향유를 풀다 말고 욕조에 기댄 채 잠들어 버렸다.
칼리스는 목욕 준비를 위해 상의를 탈의했다.
그의 탄탄한 상체에는 오래된 상흔으로 가득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위험을 겪었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 당돌한 공주가 얼마나 황당해했을까.
칼리스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앞으로는 멋대로 굴 수 없게, 오늘 버릇을 단단히 고쳐줄 테다.
모든 옷을 탈의하고 커다란 수건으로 하체를 감싼 칼리스는 욕조가 있는 방문을 열었다.
벌컥.
칼리스는 방문을 연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가 이렇게 당황한 적이 있었던가.
욕조에 기대 잠든 아스티나의 모습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희미한 수증기 사이로 드러나는 새하얀 목선과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젖은 금발 머리.
잠결에 흐트러진 드레스.
그 사이로 드러난 매끄러운 허벅지.
나른한 향유향과 열기가 방안을 가득 채워 분위기를 더욱 자극적으로 만들었다.
칼리스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삼켰다.
낯설고 원초적인 감각에 몸이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짜증이 났다. 여자를 모르는 철부지도 아니고.
고작 어린 여자 하나 때문에 이토록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어째서 눈앞의 여자가 사람을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는 걸까?
"...미쳤군."
낮게 중얼거린 칼리스는 이마를 짚었다. 시중 같은 걸 시키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아스티나를 잔뜩 골려줄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정작 당황한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칼리스는 시선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이 쉽지 않았다.
욕조에 기대 잠든 아스티나는 지나치게 무방비했다.
똑-똑-.
"주군?"
그때, 카시안의 목소리가 문 뒤에서 들렸다.
칼리스는 깜짝 놀라 문으로 달려갔다. 혹시라도 아스티나가 깰까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뭐지?"
"목욕물이 부족할까 싶어 더 가지고 왔습니다."
칼리스는 아스티나를 쳐다봤다.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을 카시안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필요없으니까 꺼져!”
"예?"
"당장 꺼지라고!"
카시안은 문밖에서 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욕을 뱉었다.
칼리스는 마음 같아선 카시안을 패고 싶었지만 그가 사라질 때까지 참았다.
발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기다렸다,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아스티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가느다란 숨결만 규칙적으로 흘러나왔다. 정말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칼리스는 아스티나를 찬찬히 훑어봤다.
이목구비가 잘 빚어놓은 조각상 같이 아름답고 수려했다.
그러나, 단지 외모 때문에 그녀에게 관심이 가는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미인들을 봤던가.
아스티나에게는 칼리스의 시선을 잡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왜 이렇게 자꾸 흔들리고 판단이 흐려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칼리스는 아스티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만 손을 뻗어도 닿을 거리.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숨결이 닿을 거리.
희미하게 벌어진 붉은 입술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머물렀다.
그리고 순간 멈췄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려 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칼리스는 욕설을 삼켰다.
겨우 어린 공주 하나 때문에 이성을 잃고 있었다.
칼리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이상 여기 있으면 안 된다. 당장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콰아앙-!!!
여관 전체가 흔들릴 만큼 거대한 폭음이 터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