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냐씨 2026. 8. 19. 08:28

 한층 표정이 밝아진 헤스티아가 에르반에게 물었다.

황자님들께서는어떤 분이신가요?”

에르반은 잠시 이안과 눈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곰곰이 황자들을 떠올렸다.
이안이 섣불리 입을 열지 않자 에르반이 결국 말하기 시작했다.

제국에 두 분의 황자님이 계신 것은 알고 계시죠? 1황자 노아르 전하와 2황자 로이드 전하십니다.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실망하진 않으실 겁니다.”

“…그렇군요.”

결국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정되겠지. 얼굴은 상관없으니 말이 통하면 좋겠군.’

헤스티아의 가늘고 풍성한 속눈썹이 눈가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안이 말을 보탰다.

아무래도 아직 황태자 책봉 전이다 보니 조심스럽습니다. 자칫 권력 분쟁이 될 수가 있으니까요.”

 

이안의 말을 잠자코 듣던 에르반이 나섰다.

그래도 성공률이 높은 쪽은 노아르 전하일 겁니다. 직계 황손이라 황가의 피가 짙거든요. 예로부터 황가와 뤼네는 높은 공명률을 보였습니다.”

, 그리고 노아르 전하는 백금빛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지닌, 마치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분입니다. 귀족 영애들이 그분을 한 번만 보려고 줄을 선다는 소문도 있으니, 영애도 예외는 아닐지 모르겠군요.”

에르반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만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에르반의 눈빛이 잠시 깊어졌다.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두 사람을 번갈아 지켜보던 이안이 분위기를 바꾸려 화제를 돌렸다.

에르반님, 자연 발화된 뤼네는 백 년 만이라고 들었는데 그동안 뤼네였던 분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에르반은 눈빛을 반짝이며 몸을 이안 쪽으로 돌렸다.

, 공자님. 좋은 질문입니다. 백 년 전, 뤼네의 자연 발화가 완전히 끊겼습니다.
그 이후 마법사들의 오랜 연구 끝에, 뤼네의 힘을 조금 이어받을 수 있는 마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흥미 있는 분야를 말하는 에르반의 표정은 한껏 들떠 있었다.

 

그때부터 황비의 자격을 갖춘 여인들을 대상으로 2~3년 동안 꾸준히 그 마법을 주입해 뤼네의 힘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마법이라 대부분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없었습니다. 간혹 성공하더라도 황가의 힘은 미약하게만 깨어났습니다.”

가까운 예로, 라르테 선황제는 능력이 발휘되지 않은 반면 스테판 황태자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셨지요.”

흥미로운 이야기를 늘어놓던 에르반의 목소리가 문득 멈췄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결국폭주하셨지만요.”

 

잠시 침묵에 잠겼던 에르반은 다시 표정을 고쳐 말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 덕분에 황가의 마법은 가까스로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헤스티아 영애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에르반의 눈빛에는 지금껏 보지 못한 강한 집념이 어려 있었다.

헤스티아는 에르반의 부탁에 선뜻 응하지 못했지만, 방금 오빠에게 베풀었던 그의 호의를 떠올렸다.

“…물론입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에르반의 눈빛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르반이 헤스티아 가까이 다가갔다.

제가 뤼네 문양에 잠시만 손을 올려봐도 될까요?”

에르반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화들짝 놀란 이안이 에르반을 말렸다.
헤스티아는 곧 황자비가 될 몸이었다. 그런 여인의 가슴에 손을 올리겠다니.

 

당황한 헤스티아가 에르반을 가만히 응시했다.
에르반의 눈빛에는 한 톨의 욕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순수하고 집요했다.

잠시라면허락하겠습니다.”

헤스티아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망설임 대신 단단한 결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영애!”

이안은 난감한 상황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고귀한 영애의 가슴에 손을 얹겠다는 마법사도, 이를 허락한 그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된다면…’

이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안은 낮게 혀를 차며 미간을 구겼다.

 

이안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르반은 허락을 받자마자 문양에 손을 올렸다. 응접실에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에르반님, 이제 그만 두십시오. 충분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이안이 에르반에게 말했지만, 에르반은 반응하지 않았다. 미간을 살짝 좁힌 에르반이 서서히 마력을 손끝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헤스티아는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처음 에르반의 손이 닿았을 때엔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서서히 그의 손끝을 타고 서늘한 냉기가 흘러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엔 약하게 흘러 들어오던 것이 점점 강하게 몸속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파박!

순간 뤼네와 에르반의 손 사이에 마력 충돌이 일어나며 강한 불꽃이 튀었다.

…”

!!!”

놀란 에르반이 다급하게 손을 거두었지만, 강한 충격을 받은 헤스티아가 그대로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영애! 헤스티아 영애!!”

이안이 다급하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지만, 헤스티아는 몸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고통에 몸을 동그랗게 웅크렸다.

 

헤스티아는 뤼네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는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뤼네를 타고 퍼지는 냉기가 가슴을 얼음칼로 후벼 파는 듯해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영애, 실례하겠습니다.”

차마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었던 이안은 그녀를 끌어안아 떨리는 몸을 단단히 붙들었다. 이곳에서 헤스티아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큰일이었다. 이안은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고 그녀를 진정시키는 데만 집중했다.

 

영애, 정신 차리세요! 에르반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

이안의 추궁에도 에르반은 대답 없이 저릿한 손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르반님!”

아무리 불러도 에르반이 대답하지 않자 이안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곧 헤스티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따져 묻는 것은 나중이었다. 지금은 그녀의 안위가 먼저였다.

 

하아하아…”

역한 기운이 쏠려와 구토할 것만 같던 헤스티아는 옅게 느껴지는 씁쓸한 박하향에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헤스티아는 본능적으로 그 향기를 좇아 연신 들이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

이안은 조금씩 난감해졌다.
다급한 마음에 헤스티아를 끌어안았지만, 그녀가 점점 자신에게 밀착해오고 있었다. 급기야 헤스티아는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그의 체취를 연신 들이마셨다.

영애?!”

얼굴이 붉어진 이안이 헤스티아를 떨어뜨리려 하자 헤스티아가 달아나려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제서야 이안은 손으로 전해지는 떨림이 확연히 약해졌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조금씩 진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이안은 더 이상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안의 서늘한 향기와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헤스티아의 긴장도 조금씩 풀렸다.

하지만 헤스티아는 아직도 온기가 부족했다.

뤼네 주위로 퍼져 들어간 냉기가 여전히 그녀를 괴롭혔다. 당장의 아픔이 우선이었던 헤스티아는 이안의 손을 끌어다 뤼네 위에 올렸다. 그의 크고 따뜻한 손이 뤼네에 닿자 서서히 온기가 퍼져 나갔다.

 

온화한 빛이 뤼네를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번졌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숨이 동시에 멎었다.
손끝을 타고 숨이 막혀오는 아찔한 감각이 전해졌다.

 

순간적으로 온몸이 굳을 만큼 강렬했지만, 이내 따뜻하고 맑은 기운이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퍼져 나갔다. 메말랐던 몸 구석구석을 적셔 주는,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충만함이었다.

 

이안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헤스티아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흔들림 없던 초록빛 눈동자는 당황한 듯 잔잔히 일렁였고, 하얗던 두 볼에는 어느새 옅은 홍조가 번져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갈증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안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방금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에르반이 놀란 얼굴로 갑자기 두 사람에게 바짝 다가왔다.

이안은 그 얼굴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에르반님! 당신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자칫하면 영애에게 큰일이…”

그때, 헤스티아가 이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그는 말을 멈추었다.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너무 노여워 마세요.”

헤스티아는 이안을 달랜 뒤, 이내 굳은 표정으로 에르반을 쳐다봤다.

에르반님, 해명해주십시오.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에르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미안한 기색이 퍼졌다.

영애,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자연 발화된 뤼네는 처음 보는 것이라 제 마력과 어떤 작용을 할지 궁금했습니다.”

“…단순한 제 호기심이 영애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에르반님, 이 일은 반드시 책임을 묻겠습니다.”

이안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끓어오르는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달게 받겠습니다.”

에르반은 묵묵히 수긍했지만, 이안의 의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무리 괴짜 마법사라 해도 이번은 도가 지나쳤다.

 

에르반은 진지한 눈빛으로 헤스티아를 응시했다.

헤스티아 영애. 공자님과의 공명은 어떠셨습니까? 분명히 저와 달랐습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말씀해주십시오.”

 

헤스티아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에르반을 노려보았다.

그가 한 짓은 분명 괘씸하고 자신을 무시한 처사였다. 그에게 어떤 것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에르반은 대마법사였고, 오빠의 안위까지 걸려 있다고 생각하니 마냥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헤스티아는 미세하게 두근거리는 뤼네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것이 심장의 두근거림인지 뤼네의 불안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에르반과는 달랐다.
너무나도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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