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움직이는 욕망

쾅. 쾅. 콰앙!
문이 부서질 듯 흔들렸지만, 노아르는 느긋하게 하품을 했다.
벨로체 1황자궁의 문을 저렇게 두드릴 수 있는 사람은 제국에 단 한 명뿐이었다.
노아르는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천천히 빗장을 풀었다.

문이 열리자 이벨린이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그를 노려봤다. 그녀의 뒤로 난처한 기색의 시종들과 카일리스가 보였다.
“내 아름다운 여동생께서 왜 이렇게 뿔이 나셨을까?”
노아르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이벨린은 거칠게 어깨를 치며 방으로 들어섰다. 황녀의 호위기사인 카일리스도 정중하게 인사하고 따라 들어왔다.
“노아르, 내가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렸다고 생각하지! 너 일부러 그런거지?”
노아르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시종들에게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제야 얼어 있던 시종들의 표정에 안도감이 번졌다.
“로제, 차를 부탁할게.”
“네, 전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치며 노아르가 소파에 앉자 이벨린이 몸을 바싹 당겨 앉았다.
“너 그 얘기 들었어?”
노아르는 관심없다는 눈빛으로 탁자에 놓인 케이크를 포크로 살짝 떠 입에 넣었다.
“무슨 얘기?”
“여우 같은 놈, 모른 척하기는.
폐하의 명으로 이안과 에르반이 직접 뤼네 발현자를 데리러 갔다더라.”
'이안과 에르반이 움직였다고?
폐하가 생각보다 서두르시는군.’
“아하, 그 얘기. 들었지.
아, 아쉬워. 겨우 시간을 맞췄는데 소공자와의 만남이 미뤄졌네.”
이벨린은 눈을 흘기고는 코웃음을 쳤다.
“흥, 이안 따위 알게 뭐야.”
노아르는 입매를 살짝 올리며 동생의 불편한 기색을 흥미로운 눈으로 살폈다.
그때, 시녀가 서국에서 온 귀한 차를 가져왔다. 노아르는 이벨린의 기분을 풀어주려 직접 차를 따라 건네 주었다.
“아직도 소공자에게 화가 났니?”
이벨린은 짧게 입술을 깨물고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내가 어떤 모욕을 당했는 줄 알아?”
“왜 내 탓을 하는 거야? 네가 먼저 날 돕겠다고 나섰잖아. 반드시 그를 유혹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대더니…”
“크흠, 황자님. 그쯤 하시죠.”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카일리스가 헛기침을 하며 둘을 말렸다.

이벨린이 짜증이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은 분명히 둘 중 하나야. 내 매력이 통하지 않았어. 마력이 충만하거나…”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이벨린이 노아르를 쳐다봤다.
“혹시 남자를 좋아하는 거 아냐?!”
이벨린의 엉뚱한 말에 노아르는 차를 뿜을 뻔했지만, 그녀는 푸른빛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네 녀석이 한번 해보자. 또 알아? 널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지.”
진지한 동생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진 노아르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 설마?”
"왜? 네 얼굴이면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헛소리 그만하고 내가 그를 한번 만나볼 테니 넌 이만 하는 게 좋겠다.”
또 다른 생각에 빠진 듯 눈동자를 바쁘게 굴리던 이벨린이 차를 마시며 말했다.
“그런데 이안이 진짜 발드라이크 서자일까?”
“우리 황녀마마께선 또 무슨 엉뚱한 상상을 하는 걸까?”
노아르가 카일리스를 향해 눈짓을 보내자 카일리스도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말이지. 내가 여러 번 매혹 마법을 사용했는데도 이안은 어째 기분이 안 좋아 보였어.”
노아르는 조용히 미간을 좁혔다.
황족과 대마법사인 에르반을 제외하고 이벨린의 마력이 통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안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외모가 말이지. 도저히 발드라이크 남자로 보이지 않아. 너무 매끈하게 잘나지 않았어? 게다가 어쩐지 우아하고 고상해 보였어.”
노아르도 그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아무리 후천적으로 배웠다 해도 타고난 기품은 감출 수 없었다. 친모가 전쟁 중에 만난 일반 여성이라고 들었는데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친모가 황족인 것 같아. 우리랑 같은 피가 흐르니깐 내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거지. 어때, 그럴듯하지?”
“음, 이번엔 그럴 듯한데.”
노아르가 순순히 호응하자 금세 흥미를 잃은 이벨린이 짜증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다.
“하아, 폐하는 왜 네 녀석 일이라면 두 팔 걷고 나서는 거지?
아, 짜증나! 이 무능력하고 얼굴만 예쁜 애가 뭐가 좋아서 다들 난리인 거야.”
카일리스가 무덤덤하게 말을 얹었다.
“아무래도 보기 드문 미인이시니까.”
그 말에 이벨린이 사납게 노려보자 카일리스는 얼른 찻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쌍둥이면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성별로 태어날 것이지, 이게 뭐야!”
“이벨린, 너도 충분히 아름답고 매혹적이란다. 나와 비교하는 건 시간 낭비야.”
“닥쳐, 노아르.”
노아르는 이벨린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찻잔만 기울였다.

“아무튼 넌 그 잘난 외모를 더욱 가꾸도록 해. 헤스티아 영애를 한 눈에 사로잡으란 말이야.
로이드 그 능구렁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겠어. 아무리 폐하가 너를 지지한다고 해도 제국의 절반은 그 녀석 편이라고.”
노아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벨린은 늘 자신의 꿈을 대신 꾸었다. 그 꿈이 그녀를 버티게 한다면, 굳이 깨뜨릴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그 여자...
정말 진짜 뤼네일까.'
노아르는 마력이 1도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녀가 진짜 뤼네라면 나에게도 마력이라는 게 생기는 걸까?”
이벨린이 눈매를 곱게 휘며 웃었다.
“마력이 뭐야, 다이아울프를 소환할지도 몰라.”
다이아울프.
뤼네 자연 발현자가 사라지면서 함께 자취를 감춘 황가를 수호하던 짐승.
모든 마법에 대한 저항성이 있고 강력한 스피드와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신화 속 존재.
노아르의 푸른 눈동자가 흥미롭게 빛나는 것을 놓치지 않은 이벨린이 가까이 다가갔다.
“노아르,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네가 천하를 가질 기회라고.”
"황녀님."
카일리스가 위험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공주를 저지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한 발 물러선 이벨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노아르를 향해 한 번 더 당부했다.
“아무튼 내 말 명심해, 오라버니. 난 내 모든 것을 너에게 걸었어. 네가 망하면 나도 망하는 거야. 반드시 뤼네를 네 걸로 만들어, 알겠지?”
이벨린의 추궁에 질려버린 노아르가 눈을 감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아, 몰라. 나 잘 거야. 빨리 가.”
입술을 비죽인 이벨린이 사라지자 노아르는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다이아울프 그림을 꺼냈다.
까맣게 손때가 묻은 흐릿하고 오래된 그림이었다.
하지만, 노아르에게는 보물 중 보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얼마나 꺼내 봤는지 모른다.
꿈 속에서도 몇 번이나 만났던 나의 친구.
아주 어릴 때, 다이아울프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다들 꿈이라고 했지만, 그 기억이 너무나 선명해 지금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섬세하게 휘날리던 은빛 털과 햇빛을 머금은 듯 빛나던 황금빛 눈동자.
자신만의 다이아울프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아르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헤스티아 영애가 어떤 여자여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다이아울프를 되찾아 줄 수만 있다면 노아르는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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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장에서 노아르가 자신을 무시했다.
이안은 자신의 호의를 피했다.
그리고 뤼네까지 나타났다.
모든 것을 철저히 계획하고 움직이는 로이드로써는 자꾸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이 어긋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탐탁치 않은 눈빛으로 로브를 깊게 눌러쓴 아로스에게 와인이 든 고블릿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황자 전하.”
“그럼, 우리의 계획은 중단되는 것인가?”
3년을 공들여 준비해 온 계획인데.
로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짓이겼다.
“우선은 멈춰야죠. 진짜가 나타났으니.”
아로스는 고블릿을 들어 보인 뒤 단숨에 들이켰다.
“하아, 답답하군. 이제 어쩔 생각이지?”
“우선은 조금 더 지켜보시지요. 저희에게는 준비된 패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상황을 보면서 대응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움직인다면?”
로이드가 미소를 띠며 말했지만, 눈빛은 그 어느때보다 서늘했다.
“글쎄요, 저라면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또한 전하의 뜻이니 마음가는대로 하소서.”
아로스는 입끝을 살짝 올린 뒤 눈을 지그시 눌렀다.
로이드 입가에 잔잔한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감히 나에게 명령하는 것인가?”
“그럴리가요. 그냥 흘러가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로이드가 말을 이었다.
“내가 뤼네를 원한다면?”
“글쎄요. 그것이 뜻대로만 된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노아르 전하께서 더 상성이 좋으실 겁니다.”
로이드의 따가운 눈빛에 아로스는 이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황가의 피가 짙으니까요. 노아르 전하는 분명히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실 겁니다.”
“하아, 그럼 큰 문제이지 않나!”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로이드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아로스는 그가 드디어 초조해한다는 사실에 피식 웃었다.
“문제가 될지 호재가 될지는 두고 봐야죠. 우선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진행시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뤼네 건이 중단되었다면, 다른 준비도 서둘러야겠군.
…실험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현재까지 성공률은?”
“마지막 열쇠만 확보하면 완성됩니다. 혹시 발드라이크 쪽에 접근할 수 있습니까?”
로이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게 필요하지?”
로이드의 질문에 아로스의 눈이 번들거렸다.
“되도록이면 멍청하고 욕망이 넘치는 자가 좋겠죠.”
누군가를 떠올린 로이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적당한 자가 있지. 발드라이크 피가 짙으니 성공율을 높일 수 있겠지.
그런데, 그 녀석이 여간 욕심쟁이가 아니라서… 그 녀석을 꼬실만한 먹잇감이 필요한데.”
‘돈이라면 넘쳐나는 그 녀석이 탐낼 만한 먹잇감이 뭘까?’
곰곰이 생각에 빠진 아로스에게 로이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녀석, 금발이라면 미친다고 들었지.”
“후후... 그쪽 취향이었습니까.”
로이드가 턱을 어루만지며 느긋하게 말했다.
"되도록 어리고 아름다운 쪽이 좋겠군."
아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하실 만한 것으로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아로스가 방을 나서자, 로이드가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그러자 천장에서 검은 복면을 쓴 검은 옷의 남자가 순식간에 나타났다.
“카라스, 일을 하나 해야겠어. 떠들썩하게 환영식을 준비해 볼까.”
로이드는 고블릿에 담긴 와인을 무심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안이 막는다면 실력을 볼 수 있으니 좋고.”
고블릿에 로이드의 얼굴이 비쳤다.
수십 개로 비춰진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로이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못 막는다면 더 좋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