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백 년 만의 기적

황금빛 장식이 눈부시게 빛나는 황제의 전용 응접실.
카스테로 황제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찻잎을 곱게 갈아 천천히 차를 우려 냈다. 다관에서 피어오른 은은한 풀향이 응접실을 가득 채우자 긴장으로 굳어 있던 크러서스의 어깨도 조금씩 풀어졌다.
제국의 정점에 선 황제가 직접 차를 우리는 모습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수십 년을 곁에서 지켜본 크러서스는 알고 있었다. 카스테로는 황제가 되기에는 너무 심성이 순한 사람이었다.
크러서스는 자신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흘렸다.
“공작 왜 웃지?”
“아 죄송합니다, 폐하. 오랜만에 다기를 다루는 모습을 보니 옛 생각이 나서 그만…”
카스테로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렇지, 공작은 오랜만이겠군. 몇 년을 전장만 돌았으니.”
푸른 눈동자에 옅은 그리움이 번진 카스테로는 벽에 걸린 백금발 사내의 초상화를 가만히 응시했다.
“스테판과 자네, 나 이렇게 차를 마시던 때가 그립군.”
크러서스도 초상화를 쳐다봤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남자.
제국 역사상 최고의 황제가 될 거라 모두들 추앙했던 남자.
눈부신 미모와 뛰어난 재능으로 모두를 압도했던 남자.

어쩐지 입안이 씁쓸해진 크러서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늙었는지 요즘 상념에 젖을 때가 많아졌다.
“저도 늙었나 봅니다. 이제는 스테판 황태자에 대한 좋은 기억만 떠오르는 군요.”
“그건 나도 그래. 스테판에게 항상 감사할 뿐이야.”
"...그가 반란을 일으킨 덕분에 내가 황제가 되었으니까."
자조 섞인 웃음을 짓는 카스테로의 표정이 무척 쓸쓸해보여 크러서스는 일부러 크게 웃었다.
“하하하,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왠 농담이십니까?”
크러서스의 호탕한 웃음에 카스테로는 다시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늙은 게지. 그건 그렇고 내가 왜 자넬 따로 불렀는지 알고 있겠지?”
카스테로의 말에 크러서스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두 눈을 반짝였다.
“그 여우 같은 에르네스트와 테르마리온이 결국 두 손 들었습니까?! 황비 전하께서도 찬성하시고요?”
카스테로는 미소가 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하네, 발드라이크 대공. 보름 뒤에 작위 수여식이 있으니 수도에 좀 더 머물게.”
크러서스는 어린아이처럼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귀족들의 위선과 가식에 시달려 오던 카스테로에게 크러서스 공작의 솔직함은 더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공작, 아니 대공. 이제부터는 중앙 정치에도 적극 참여해보는 것이 어떤가?
대공 덕분에 당분간 전쟁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이안 녀석도 잘 구슬려봐.”
흥분에 들떠 있던 크러서스의 눈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폐하, 진심으로 이안을 가까이에 두시려 하십니까?”
카스테로는 굳은 표정으로 단단한 눈빛을 보냈다.
“더 이상 숨기기 어려울 것이야.
자네도 오늘 그를 봤지 않나? 누가 이안을 전장을 떠돌던 자라고 생각할까.”
크러서스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
이안은 하루가 다르게 고결하게 자라고 있었다.
덩치가 크고 뼈대가 굵은 전형적인 발드라이크 사내들과는 달리 수려하고 매끈한 외형은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게다가 황족이라 그런 것인지 타고난 기품과 우아함은 도저히 숨길 수 없었다.
“…녀석과 얘기해보겠습니만 정치에 관심이 있는 편이 아니라서…”
크러서스가 두루뭉실한 태도를 보이자, 카스테로는 단박에 말을 끊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이안을 황권 경쟁에 둘 생각은 없어. 그저 노아르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지.”
크러서스는 카스테로의 말에 서운함이 들었다.
죽은 스테판 황태자에 대한 애정 때문에 노아르를 각별히 아끼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안 역시 제국을 위해 충분히 희생해 왔다. 그럼에도 황제가 또다시 그를 노아르의 장기말처럼 쓰려 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황제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걱정하는 공작의 물음에 황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늙어서지 뭐. 요즘 들어 두통이 잦아.
황태자 책봉을 서둘러야 하는데 둘 다 마음에 차지 않아. 그러니 이안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단 말일쎄.”
그때였다.
똑. 똑. 똑.
“폐하, 급한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와.”
다급한 시종의 방문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공작과의 환담을 방해할 정도로 급한 일이 뭐지?”
얼굴이 사색이 될 정도로 달려온 시종은 잠시 호흡을 골랐다.
“폐하, 뤼… 뤼네가 발현되었습니다!”
순간 응접실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자연적인 뤼네의 발현.
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기적이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서로의 표정만 살필 뿐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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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헥헥… 이안 공자님… 서둘러 그레블린궁으로 가보십시오. 폐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베란다에서 태연하게 연초를 피우던 이안에게 시종이 다급히 달려왔다.
그레블린궁에는 아마도 공작이 있을텐데, 왜 자신을 부른 것인지 이안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대공 승작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시종의 태도가 너무 다급해보였다. 이안은 시종을 따라 급하게 달렸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간 이안은 흠칫 놀랐다.
현재 제국을 지탱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묵직한 공기가 응접실을 짓눌렀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이안은 크러서스의 곁에 섰다. 공작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이안을 반갑게 맞았다.
“이안 공자가 도착했으니 다시 얘기를 진행해보지.”
카스테로 황제가 위엄 있는 태도로 말을 시작했다.
“브렌하임가에서 뤼네가 발현되었다고 합니다.
뤼네 발현자는 브렌하임 공녀, 헤스티아 브렌하임으로 올해 성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시종장 카빌의 보고를 듣던 멜베르 에르네스트 공작이 서늘한 눈빛을 빛내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간 없었던 자연 발현이 갑자기 생기다니… 에르반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해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공작, 말이 지나치십니다! 브렌하임은 신의를 중시하는 명가입니다.”
크러서스는 멜베르를 쏘아보며 브렌하임 가문을 적극 옹호했다. 비록 지금은 가세가 기울었지만, 함부로 다룰 가문이 아니었다.

한구석에 서 있던 에르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색 모노클 너머로 회색빛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평소의 그는 세상사에는 아무 관심도 없어 보였지만, 그를 가볍게 여길 사람은 제국 어디에도 없었다.
“맞습니다, 그 브렌하임이 거짓을 말할 리 없죠. 가주의 방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니…”
에르반은 차가운 시선을 황제에게 돌렸다. 카스테로는 잠시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래도 스테판 황태자께서 오래전 맹약을 어기고 브렌하임에 선물을 남기신 듯합니다만.”
“에르반님, 추측은 금물입니다. 어쨌든 진실은 뤼네가 발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루에자 황비가 담담한 목소리로 끼어들면서 에르반의 시선은 황비에게 돌려졌다. 카스테로는 그 틈에 등줄기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숨겼다.
“백 년 만에 나타난 소중한 뤼네인데, 그녀를 얼른 황궁으로 불러 와야죠.”
황비는 인자한 미소를 띈 채 황제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녀가 진정한 뤼네라면, 분명 황실에 큰 도움을 줄 겁니다.”
“뤼네는 제국의 보물이다. 혹여 이동 중 변고가 생겨선 안 된다.”
마음을 간신히 진정한 황제가 이안을 향해 말했다.
“이안, 브렌하임에서 영애를 안전하게 모셔오도록 하라.”
이안은 황제의 명령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지만, 입이 먼저 움직였다.
“…네, 폐하. 명 받들겠습니다.”
황비는 황제 쪽으로 몸을 돌려 미소를 띄며 말했다.
“폐하, 황궁 기사단에도 뛰어난 자들이 많습니다. 어찌 그런 사소한 일에 그를…”
“아니, 이건 이안 공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
그동안 전장에서 무수한 공훈을 세우지 않았나. 제국 최고의 검기이니 이보다 믿을 수 있는 자가 없지. 노아르에게도 준비하라고 일러둬야겠군.”
황비의 입가가 떨리는 것을 알면서도 카스테로는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폐하… 혹시 노아르 전하의 짝으로 그녀를 염두에 두시는 것입니까?”
표정에서 노기를 감추지 못한 피에르 테르마리온 공작이 말했다.
그의 장녀, 다이아나와 노아르 사이에 혼담이 오고 가는 것을 모르는 제국민이 없었다. 게다가 다이아나는 작년부터 에르반에게 뤼네 관련 수업을 받고 있었다.
“상황이 변했음을 공작이 이해해주길 바라네. 짐에게는 다른 황자가 있으니, 공작이 손해볼 일은 없을 거야.”
“폐하!”
황제의 얘기에 황비는 더 이상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점잖게 웃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카스테로는 그녀를 만난 이후 처음 보는 날것의 표정에 잠시 말을 잃었다.
카스테로의 시선을 느낀 황비는 이내 표정을 고쳐 다시 고고한 자세를 유지했다.
“노아르 황자에 대한 폐하의 지대한 관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 문제는 신중하게 논의하시길 간청 드리겠습니다.”
“황비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헤스티아 영애가 도착하고 논의해도 늦지 않습니다.”
멜베르가 황비의 의견에 동조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카스테로는 에르반을 쳐다보며 말했다.
"에르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르반은 모노클을 고쳐 쓰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직접 만나 보면 답이 나오겠지요.”
에르반은 이안을 향해 몸을 틀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자연 발화한 뤼네라니…
제가 함께 간다면 시끄러운 소리들도 사라질 것입니다.”
에르반의 눈동자가 마력으로 번들거리자 이안은 본능적으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하루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브렌하임이 아니라, 얼음 산맥이라도 기꺼이 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