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붉은 눈의 괴물

에스카리엘은 이미 패배한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불길은 왕궁을 삼키고 있었고, 살아남은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제국군을 막지 못했다. 화염은 아름답던 궁전을 집어삼키며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병사들의 검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그런 혼란 속에서도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만큼은 흔들림 없이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제국 정예 병사들은 칼리스를 따라 바삐 움직였다. 칼리스는 마치 방향을 제대로 아는 것처럼 비밀 통로를 단번에 찾아냈다.
역시 용족은 다른 건가.
비범한 칼리스의 능력에 매번 감탄하는 카시안이지만, 왕가 비밀 통로를 찾아내는 능력에는 진심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칼리스는 희미한 빛을 쫓았다.
그 빛은 보일 듯 말듯 해 그를 더 애 닳게 했다. 게다가 왕궁 입성 때부터 미세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에 칼리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래전부터 그의 삶은 단순했다.
감정에 휘둘리는 법 없이 명령받고, 죽이고, 정복한다. 황제의 개로 살게 된 그 순간부터 그것이 전부였는데. 생소한 기분에 칼리스는 기분이 나빠졌다.
“주군, 공주님들을 찾았습니다!”
선발대로 투입됐던 병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요란한 빛을 뿜어냈다. 그 모습이 마치 맛있는 먹이감을 발견한 야수의 모습 같아 카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공주들은 반드시 생포해라.”
잠시 뒤, 무심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해되는 자는 모두 죽여라.”
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제국군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달려갔다. 곧이어 날카로운 금속성 마찰음이 좁은 통로를 진동시키며 왕궁 전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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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비밀 통로는 피와 비명으로 뒤엉킨 지옥으로 변했다.
짙은 피비린내가 좁은 통로를 가득 메웠고, 칼날이 부딪힐 때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은 점점 짧아졌고, 곧 처절한 신음으로 바뀌어 갔다.
공주들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몸을 떨었다.
귀를 막아도 비명은 막을 수 없었고, 눈을 감아도 참혹한 현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서로를 붙잡고 있었지만, 누구도 이 공포를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 위로 절망이 서서히 번져 갔다.
에스카리엘 병사들이 허망하게 죽어가는 모습이 마치 망국의 미래인 것만 같아, 아스티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공주들을 지키던 에드윈과 정예 병사들이 나섰다.
디에나는 에드윈의 손을 급하게 붙잡았다.
“안… 안돼! 에드윈, 안돼!”
“공주님,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세요.”
“안돼! 안돼! 그럴 수 없어. 널 두고 갈 수 없어. 너 없이 어떻게…”
눈물로 범벅된 디에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에드윈은 깊은 키스를 퍼부었다.
“디에나, 사랑해. 반드시 살아줘.”
처음으로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디에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당당하게 나서는 약혼자의 뒷모습이 피로 물든 것만 같아 디에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혔다.
좁은 통로는 오히려 에드윈과 왕국 정예 기사들에게 유리했다. 선두에 선 에드윈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제국군이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왕국 최고의 기사단장이라는 명성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정예 기사들 또한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통로를 사수했다.
제국군의 공세가 눈에 띄게 둔화되자 에드윈은 한 줄기 희망을 본 것 같았다.
그때였다.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 짐승처럼 집요한 붉은 눈.
그가 걸어오는 것만으로도, 솜털이 쭈뼛 솟고 무거운 공기에 질식될 것 같았다.
왕국 기사들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라.”
칼리스가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에드윈은 긴장을 억누르고 숨을 고르며, 칼리스 앞을 막아섰다.
“더 이상 전진하실 수 없습니다!”
칼리스는 에드윈을 찬찬히 훑어봤다.
그것은 잔인하고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눈이었다.
“할 수 없군”
에드윈의 검이 날카롭게 칼리스를 향했다.
카앙!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에드윈은 이미 많이 지친 상태였지만,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쉼 없이 이어지는 검격이 칼리스를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제국 병사들조차 숨을 삼켰다. 좁은 통로 안에서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만큼 빠르게 궤적을 그리며 에드윈은 공격을 이어갔다.
하지만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을 지켜보는 것처럼.
그 순간이었다.
은빛 궤적이 크게 허공을 갈랐다.
다음 순간, 에드윈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심지어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빠른 일격이었다.
디에나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했다.
“아아아악!”
디에나의 비명이 적막을 찢었다. 그녀가 달려나가려 하자 벨로나가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안 돼! 언니, 안 돼!”
“놔! 놔아! 에드윈! 아아아악!!!”
디에나는 반쯤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쳤다. 늘 단정하고 우아하던 디에나가 그렇게 무너지는 모습을, 아스티나는 태어나 처음 보았다. 루에나는 눈 앞의 참혹한 현실에 몸을 벌벌 떨었다.
“싫어… 더 이상은….”
그녀는 그대로 힘이 풀려 기절했다.
아스티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왕국 최고의 기사.
디에나 언니가 사랑하던 사람.
아스티나가 동경했던 북부대공 같았던 강인했던 남자.
그가 칼리스의 한 칼에 죽었다.
너무 허무하게.
소설 속 죽음은 비극적이고 아름다웠지만, 현실의 죽음은 끔찍하고 잔인했다.
아스티나는 헛구역질이 몰려와 그대로 바닥에 토해버렸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냉미남은 소설에서나 멋있는 거라는 벨로나의 말이 옳았다. 현실의 괴물은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가볍게 칼에 묻은 피를 닦아 낸 칼리스는 공주들을 훑어봤다.
디에나.
벨로나.
루에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스티나.
그 순간, 칼리스의 시선이 멈췄다.
그는 아스티나를 찬찬히 탐색했다. 입술을 닦아내던 아스티나는 칼리스의 시선을 느끼고 몸서리 쳤다. 숨이 막혔다. 저 짐승 같은 눈과 마주한 순간,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칼리스는 천천히 아스티나에게 다가왔다.
아스티나는 도망가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대로 굳어버린 아스티나는 남자의 뜨거운 시선에 잠식돼 버릴 것 같았다.
눈앞에 선 남자는 너무 크고 차갑고 두려웠다. 피에 젖은 손이 서서히 다가왔다. 아스티나는 숨도 쉴 수 없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차갑고 끈적한 피가 피부에 닿았다.
“…….”
칼리스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들고 찬찬히 살펴봤다.
아름답지만 아직 소녀 티가 남아있는 어린 여자 얼굴.
그런데, 왜 자꾸 시선이 머물까? 칼리스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희미한 빛을 따라왔고 그 끝에 이 여자가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굳어버린 아스티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뿐.
그는 먹잇감을 보는 눈으로 그녀를 살 점 한점, 뼈 하나까지 분해해서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제 끝나는 거지. 언제까지 이 역겨운 놈을 참아야 하는 거지.
생각 같아서는 욕지거리를 퍼 붓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그가 주는 압도적인 공포감 때문일 것이다.
피 냄새.
차가운 손.
죽어 가는 사람들.
비명을 지르는 언니들.
그리고 붉은 눈…
아스티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울어지는 세상 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였다.
저 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