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냐씨 2026. 8. 18. 12:33

 

벨로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흐릿했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며 그리운 체온이 느껴졌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정신 차리세요!”

자신을 걱정하는 익숙한 목소리와 탄탄한 품 속에서 벨로나는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그녀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얼굴을 매만졌다. 그가 환영인지 실체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공주님, 저예요. 알아보시겠어요?”

벨로나는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따뜻한 걸 보니카시안이 맞구나. 다행이다.”

카시안의 충혈된 눈동자가 안도감으로 흔들렸다. 그는 벨로나를 꽉 끌어안았다.


 

, 조금이라도 늦었다면놓칠 뻔했어요.”

카시안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몇 번이고 숨을 골랐다. 그녀가 진짜라는 것을 확인하듯 떨리는 손끝으로 등을 쓸어내렸다. 그의 애정 어린 태도에 벨로나는 긴장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마음이 진정된 카시안이 고개를 들어 못마땅한 눈빛으로 벨로나를 쏘아봤다.

왜 도망가신 거예요! 절 두고 왜 가셨어요!”

거칠게 쏟아내던 목소리는 이내 힘을 잃었다.

제가못 미더우셨나요…”

“…미안해, 카시안. 내가 어리석었어.”

후회에 잠긴 벨로나의 눈동자가 눈물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냥그냥 너무 무서워서죽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흐흐흐흑…”

벨로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우는 그녀를 카시안은 다시 꽉 끌어안았다.

 

흑흑카시안언니가언니가 죽었어. 내가... 내가 도망치자고 해서흑흑.”

카시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 역시 디에나를 지키지 못했다.

자책하지 마세요. 공주님 잘못이 아니에요.”

카시안의 다정한 손길에 벨로나는 그의 품 안에 더욱 파고 들며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깊숙이 들어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카시안은 벨로나의 호흡에 맞춰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벨로나의 울음이 잦아들자 카시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주님, 이제 진정되셨나요?
이런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빨리 숲을 빠져나가야 해요. 여긴 메레디이가 만든 환영의 숲이라 빨리 나가지 않으면 영원히 환영 속에 갇혀 미쳐버릴 수도 있어요.”

 

벨로나가 여러 번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긋이 지켜보던 카시안이 가벼운 미소를 흘리며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여기 오기 전에 나무 꼭대기에서 확인해보니, 서쪽 방향이 확실히 안개가 옅어지고 있었어요. 우린 최대한 빨리 그쪽으로 가야 합니다.

황제 친위대가 몇 놈이나 더 숲으로 들어왔을지 모르니 저한테 딱 계셔야 해요. 아시겠죠?”

벨로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카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옅은 탄식을 뱉었다.

, 안 되겠어요. 말괄량이 공주님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카시안은 벨로나의 손에 깍지를 낀 뒤, 허리에 묶여 있던 가죽끈을 풀어 서로의 손목을 꽁꽁 묶었다. 갑작스러운 카시안의 행동에 벨로나는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카시안은 정성스럽게 끈을 묶은 뒤 잘 묶였는지 잡아당겨 확인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렀다.

이제는 마음대로 도망 못 가실 겁니다.”

카시안은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손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벨로나는 순식간에 뺨이 붉어졌지만 어쩐지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너 왜 이렇게 다정하게 굴어!”

당황한 벨로나가 더듬거리며 소리 질렀다. 카시안은 당황하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전 원래 다정했답니다. 공주님께서 모르셨다니 앞으로는 싫어도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러려면 우선은 숲에서 나가볼까요?”

카시안은 정중하게 벨로나를 일으켜 세웠다.

 

벨로나는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디에나의 주검을 쳐다봤다.

다시금 혼란한 감정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와 휘청거렸다. 카시안에게 의지하며 간신히 정신을 다잡은 벨로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언니를 어떻게 두고가지…”

우선은숲을 탈출하는 것만 생각합시다. 주군과 합류하게 되면, 반드시 시신을 수습하러 올게요. 주군께는 마법이 통하지 않으니까요.”

카시안이 벨로나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저 믿으시죠? 반드시 시신을 수습하러 올게요.”

카시안의 다짐을 여러 번 받고서야 벨로나는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카시안이 서로 맞잡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두 사람의 손목을 가로지르며 묶인 가죽끈이 흔들렸다.

몇 번이고 환영을 만날지 모릅니다.
그럴 때엔 이 온기를 떠올리세요. 서로가 느끼는 온기만이 현실입니다. 서로를 믿는다면, 반드시 우린 이곳을 나갈 수 있어요.”

결연한 눈빛을 마주한 벨로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자꾸만 시선이 디에나의 주검에 머물러 멈춰섰다. 카시안이 말없이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

갑시다.”

 

마음을 다잡은 두 사람은 안개로 뒤덮인 서쪽 숲을 향했다.

서쪽으로 갈수록 안개는 옅어졌지만, 숲은 오히려 더욱 음산해졌다. 등줄기를 스치는 서늘한 기운에 카시안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벨로나도 그의 곁에 바짝 붙어 걸었다.

카시안은 주변을 경계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쪽으로 향할수록 알 수 없는 불길함이 그의 가슴을 서서히 조여 왔다.

 

카시안은 걸음을 멈췄다.
희미하게 무언가 타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오래전부터 잊으려 애썼던, 익숙한 냄새였다.

아얏!”
카시안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벨로나가 짧은 탄성을 질렀다.

 

, 죄송합니다. …혹시 타는 냄새가 느껴지시나요?”

아니, 숲 냄새만 느껴져. 혹시 환영이 시작된 건가?”

걱정스러운 그녀의 눈빛에 카시안은 호흡을 골랐다.

, 그런 것 같아요. 혹시 제가 정신을 못 차리면 세게 한 대 치거나 이걸로 제 허벅지를 찌르세요.”

 

카시안은 품속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 벨로나에게 건넸다.

벨로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시안에게 향했다. 그의 손바닥과 팔, 허벅지 총 세 군데가 지혈되어 있었다. 이미 너덜해진 그의 몸에 또 상처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게 싫으면키스해 주셔도 되는데.”

무거워진 분위기에 그가 실없는 농담을 건넸다. 벨로나는 붉어진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넌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게나…”

그를 타박하려던 벨로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카시안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시작된 것 같아요…”

카시안의 시선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훑었고 검은 연기가 시야를 뒤덮었다. 곧이어 사방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환영인 것을 알면서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다시 그날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카시안, 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내가 지켜줄게.”

맞잡은 손으로 온기가 흘러 들어왔다. 정신이 퍼뜩 든 카시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여전히 눈앞에는 불타는 마을이 보였지만 두려움은 한결 옅어졌다.

“…그럼, 공주님. 계속 가볼까요?”

카시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을에 접어드니, 참혹한 광경이 더욱 또렷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뜨거운 열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지만 억지로 숨을 고르며 앞으로 걸었다.

카시안은 품속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흔들리는 바늘은 여전히 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불안감이 벨로나에게 전해질까 조심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열기는 사그라들고 마을은 폐허로 바뀌었다.

점점 익숙해지는 풍경에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카시안을 어지럽혔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돼.’

그의 손끝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카시안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카시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벨로나의 따스한 손길이 뺨을 감싸자 흐릿했던 시야가 다시 선명해졌다. 하지만, 귓가에 맴도는 사람들의 흐느낌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환영과 현실을 끊임없이 오가며 카시안의 의식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 눈을 몇 번 깜빡였더니 눈앞에는 벨로나가 아닌 다른 여자가 서 있었다.

누구였더라.

너무도 익숙한 얼굴인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희미했던 형체가 점점 선명해지면서 여자는 점점 오래된 기억 속 인물로 변해갔다.

“…엄마?”

여자의 눈에서는 피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 왜 우리를 팔아넘겼어?”

아니야, 그건 오해야?! 내 말을 들어봐.”

 

어느새 카시안의 주변에 피 눈물을 흘리는 마을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원망 가득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손가락질했다.

배신자!”

너 때문이야!”

네 녀석이 우리를 죽인 거야.”

수많은 눈들이 그를 노려보며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카시안의 호흡이 가팔라지고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갔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카시안은 그들에게서 도망치려고 머리를 에워싸며 계속 중얼거렸다.

나도 몰랐어. 그냥그냥 약을 조금 얻으려고 했던 거야. 그래서…”

울컥한 카시안이 소리를 질렀다.

어쩔 수 없잖아. 난 돈이 없었다고! 엄마가엄마가 너무 아파서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잖아! 우릴 외면했었잖아!”

카시안의 분노는 점차 울먹임으로 바뀌었다.

“…어차피 마을에서 같이 사용하는 거였잖아소금을 약간아주 약간만 사용했을 뿐이라고. 그게 문제가 될지정말로 몰랐어…”

 

누군가가 자신을 거칠게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았다. 어쩐지 그리운 목소리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보이지 않았다.

카시안은 온기가 느껴지는 손을 들어 바라봤다. 어쩐지 마음이 차분하고 평온해졌다.

깊은 환각에 빠져 있구나.’

이 지옥 같은 꿈에서 빨리 깨어나고 싶었다. 그는 문득 자신의 손에 검이 들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칼로 찔러서 깨어나자.’

그때, 다급하게 허벅지를 찌르려던 그의 손을 누군가가 제지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입술이 느껴졌다. 한없이 따뜻한 온기가 그의 의식을 현실로 천천히 끌어당겼다.

 

불투명했던 그의 시야에 점점 또렷하게 벨로나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과 부끄러움이 교차하는 그녀의 표정에 그는 안도감을 느꼈다. 카시안은 그녀의 붉어진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공주님께서 절구해 주셨네요.”

 

자신을 알아보는 희미한 그의 미소에 벨로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흑흑... 난 네가잘못되는 줄만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를 거야.”

카시안이 벨로나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감사해요, 정말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벨로나의 뺨을 어루만지던 카시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카시안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벨로나에게 닿았다.

입술 너머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에 카시안의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천천히 넣어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짧은 입맞춤이 몇 번이고 이어졌다.
서로의 숨결이 얽히고, 닿을 듯 말 듯 스치는 입술이 애틋한 여운을 남겼다.

 

카시안이 벨로나의 입술을 만지며 말했다.

공주님, 반드시 살아서 나갑시다.”

“….”

벨로나는 카시안의 손에 얼굴을 묻으며 답했다.

 

그때였다.

주변의 안개가 걷히며 긴 로브를 걸친 백발의 남자와 사람들 무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습니다!”

카시안은 눈에 힘을 주어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것이 실제인지 환영인지가 중요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 중 칼리스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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