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감시자

나뭇잎 사이로 잔잔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따라 야영지에는 새벽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모닥불은 잿빛 불씨만 희미하게 남긴 채 꺼져가고, 교대를 선 병사들은 말없이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고요한 풍경 사이로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보초를 선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멋스럽게 가지를 뻗은 전나무를 흘깃거렸다. 굵은 가지 위에 십여 마리의 세눈박이 까마귀들이 앉아 야영지를 빈틈없이 훑고 있었다.
각자 다른 방향을 응시하며 탐색하는 보라빛 눈동자들에 병사들은 소름이 돋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전장을 떠돌던 그들이지만, 언제 봐도 기분 나쁜 건 한결 같았다.
칼리스의 막사를 멀리서 조용히 응시하던 까마귀가 갑자기 날개를 퍼덕이더니 그의 막사와 가까운 나무로 날아갔다. 가지에 앉으려던 찰나 까마귀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더니 몸이 굳은 채 그대로 떨어져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 소리에 부지런히 감시하던 세눈박이 까마귀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근처에서 망을 보던 병사가 놀라 다급히 달려갔다.
땅에 널브러진 까마귀는 입안 가득 거품을 문 채 죽어 있었다. 당황한 병사가 허둥지둥 대고 있을 때, 장막이 천천히 걷히며 거대한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광을 받아 어두운 형체 속에서 붉은 눈동자만이 서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병사는 숨이 막힐 만큼 위압적인 그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병사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주군, 깨셨습니까?”
칼리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소매를 정돈하며 말했다.
“한 시진 뒤에 출발하겠다. 준비를 서두르라고 해.”
“네, 주군.”

칼리스의 시선이 죽은 까마귀를 잠시 스쳤다. 마치 처음부터 그 결과를 알고 있었다는 듯,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야영지를 둘러싼 세눈박이 까마귀들을 천천히 확인했다.
보라빛 눈동자들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수십 개의 보라빛 눈동자가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집요하게 훑으며 음산하게 빛났다.
“하아…”
칼리스는 못마땅한 듯 낮게 혀를 차며 미간을 구겼다.
“메레디아, 적당히 하지?”
까마귀들이 일제히 항의하듯 시끄럽게 깍깍거리기 시작했다. 잠든 아스티나가 깰 것이 신경 쓰인 칼리스는 거칠게 허공에다 손을 비틀었다. 그러자 까마귀 대여섯마리가 후두둑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제야 까마귀들은 입을 다물고 눈알만 부지런히 굴렸다.
“적당히 해. 날 자극하지 마.”
사납게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에 잔뜩 주눅이 든 까마귀들이 다급히 날개로 눈을 가렸다. 그제서야 칼리스는 무덤덤한 얼굴로 여유 있게 옷 단장을 마무리했다.
그때, 막사 안에서 부시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스의 눈이 활처럼 휘면서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장막을 걷으려다 잠시 멈춰선 칼리스가 등을 돌려 까마귀들을 노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한 번만 더 날 감시하면 죽여 버릴 거야.”
서슬퍼런 그의 경고에 까마귀들은 온 몸을 덜덜 떨며 간신히 발톱으로 자세를 고정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만족한 칼리스가 비릿한 미소를 날리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곧 만나자, 메레디아.”
유유히 사라지는 그를 보며, 까마귀들의 보라빛 눈동자가 환희에 차 요란하게 빛을 냈다.

어두운 지하감옥 안.
“하아…”
차가운 바닥에 일렬로 늘어놓은 작은 돌멩이들을 바라보던 메레디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눈박이 까마귀와 연결해 둔 열세 개의 돌.
그중 일곱 개가 한순간에 먼지처럼 부서져 있었다.
각혈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지금, 마법 한 번 한 번이 귀한데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다니.
“아침부터 한숨 쉬면 있던 복도 달아나는 법이야.”
황제가 준비해 온 탁자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굳이 지하감옥까지 내려온 이유는 하나였다. 세눈박이 까마귀들이 물어올 소식이 궁금해서였다.
아침부터 속을 뒤집는 황제보다도, 소중한 까마귀를 일곱이나 잃었다는 것에 더 화가 났다.
메레디아는 보라색 눈을 번뜩이며 분노를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까마귀가 일곱이나 죽었습니다. 그러게 칼리스에겐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는데, 괜히 그를 자극만 한 꼴입니다.”
“주인이 사냥개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나?”
황제가 서늘한 눈빛으로 메레디아를 쏘아봤다. 메레디아는 또 다시 사슬이 당겨질까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황제는 처벌 대신 느긋하게 차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알아낸 건 뭐지?”
“칼리스가 특별히 신경 쓰는 공주가 있습니다.”
“오호~ 그 칼리스가 말이지.”
메레디아의 말에 황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기울였다.
“그게 누구지?”
메레디아는 순간 목이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입을 크게 벌렸지만, 소리가 입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고 애꿎은 신음만 흘렸다.
“커헉. 컥.”
황제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메레디아는 목을 두 손으로 감쌀 뿐 이상한 신음만 쏟아냈다.
“지금 뭐하는 거지?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그…그게 아니고.”
간신히 침을 삼킨 메레디아의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설마... 이름에 봉인을 걸어 둔 건가?'
메레디아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듯 손을 꽉 말아쥐었다. 필사적으로 그녀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 미워 견딜 수 없었다.
“아하,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거로군. 하하하하, 대마녀 꼴이 우습구나.”
무엇이 좋은지 황제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메레디아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황제의 기분에 눈치만 살폈다.
“재밌어, 재밌군. 어쩜 내 개는 재주도 많아.”
황제의 푸른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어렸다. 황제는 무심하게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잠시 생각에 잠긴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재밌는 소식을 하나 들었는데 말이지.”
그의 눈빛에 스친 날카로움에 메레디아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디에나 공주의 몸이 좋지 않다지? 그래서 칼리스가 아스델 의원을 찾았다던데...”
황제는 말을 멈추고 메레디아를 슬며시 쳐다봤다. 처음 듣는 얘기에 메레디아가 눈만 껌뻑이자 황제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입이 무거운 의사라도, 목숨보다 무거울까?”
“비밀이란 참 오래가지 못해. 그런데, 알면서 왜 자꾸 비밀을 만들어서 내 심기를 건드릴까? 그렇지 않나, 메레디아?”
두려움에 젖은 눈빛으로 메레디아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칼리스가 신경쓰는 공주인가?”
메레디아는 보라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 애썼다. 그녀의 뜻을 읽은 황제의 입술 끝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다행이군. 내 것에 손 댄 줄 알았는데.”

"흠..."
미간을 살짝 찌푸린 황제가 탁자를 다시 두드렸다. 불규칙한 소리에 맞춰 메레디아의 심장도 쿵쿵거렸다.
"그럼, 첫째 공주는 아니고..."
두드림을 멈춘 황제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남은 셋 중 하나겠군. 얼마나 오래 숨길 수 있을지 한번 지켜보지."
기분이 좋아진 황제가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가진 건 버려도 되겠지. 넌 계속 칼리스를 감시해.”
“폐하, 하지만… 윽!”
메레디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슬이 당겨졌다. 살을 파고드는 아픔에 메레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감시하면 되겠지.”
가볍게 손을 턴 황제는 감옥을 유유히 나섰다.
“그럼 좋은 소식을 기다리지. 다음엔 오늘보다 값져야 할 거야.”
사라지는 황제를 바라보며 메레디아는 거칠게 침을 뱉었다.
그러다 문득 눈앞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용의 심장을 넋 놓고 바라봤다. 까마귀의 눈을 빌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칼리스는 여전히 아름답고 멋있었다.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화부터 내는 칼리스가 원망스러웠다.
까마귀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제 처지를 설명할 수만 있었다면, 아까운 까마귀들이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공주가 아직 그의 막사에 있을텐데…’
어젯밤부터 야영지를 샅샅이 뒤졌지만 아스티나 공주만 보이지 않았다. 확인 못한 곳은 단 한 곳뿐.
어떻게든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무리를 했지만, 한 번 더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남은 까마귀는 물론,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답답한 현실에 메레디아는 입술을 짧게 깨물었다.
칼리스가 그녀를 반려로 확신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목숨이 위태로운데 제멋대로 행동할 리가 없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메레디아가 바닥을 맨주먹으로 쾅쾅 쳤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갈망한 건 자신인데,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가 그를 차지하다니.
자신이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 칼리스를 지켜왔는데!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연신 바닥을 쳐대던 메레디아가 갑자기 서늘하게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흐….”
정작 자신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그 여자만 보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에 빠진 칼리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항상 얼어붙어 있던 그 붉은 눈이 열기로 물들면 어떤 모습일까?
“나도 보고 싶다…”
메레디아는 황홀한 눈빛으로 닿지 않는 용의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만나자, 메레디아.”
가볍게 손을 흔들며 사라지던 칼리스의 뒷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메레디아는 두 손으로 붉어진 뺨을 가리며 소녀처럼 수줍어 했다.
“흐흐흐, 곧 만날 수 있겠지?”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음산하게 번들거렸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슬이 파고든 목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조금만 망가뜨리면…”
메레디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봐주시려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