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황제의 선물

시온이 다녀간 뒤부터 칼리스는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황제가 보낸 선물이 평범할 리 없었다.
'도대체 뭘 보낸 거지? 그 미친 놈이.'
“주군, 한 각(15분) 정도 달리면 야영할 만한 적당한 곳이 나옵니다.”
주군의 불안한 기색을 눈치챈 카시안은 서둘러 근처의 야영지를 물색한 뒤 입을 열었다.
아직은 더 달려야 했다.
하지만, 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칼리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영지에 도착한 제국군은 서둘러 짐을 풀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천막을 세워 나갔다.
일사분란한 모습에 공주들은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합을 맞춰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완성된 천막으로 안내된 공주들은 탁자 위에 황제의 선물 상자들을 놓고 그저 쳐다볼 뿐이었다.
아무도 먼저 손을 대지 못했다.
“공주님, 아서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때, 장막 너머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아서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벨로나의 물음에 아서가 아스티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주군께서 아스티나 공주님을 찾으십니다.”
아서는 가장 위에 놓인 선물 상자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이것도 하나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공주들의 불안한 시선을 뒤로한 채, 아스티나는 선물 상자를 든 아서를 따라 천천히 칼리스의 천막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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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가 장막을 걷자 심각한 표정의 칼리스와 카시안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선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스티나, 어서와.”
아스티나를 발견한 칼리스의 굳어 있던 표정이 미세하게 풀렸다. 카시안은 그런 주군을 힐끗 바라보며 헛기침을 했다.
“선물을 확인해 봐도 괜찮나?
공주들에게 보낸 황제의 선물이라 그대의 입회가 필요해서 불렀어.”
아스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 상자를 열어보니,
온갖 보석과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눈부신 드레스가 들어 있었다.
“눈에 띄는 이상은 없어 보이는데요.”
드레스를 뒤적이던 카시안이 말했다.
‘정말 그냥 선물이었나?’
시온의 음흉한 시선이 떠오르자 칼리스는 곧바로 그 생각을 떨쳐냈다.
칼리스의 불안을 읽은 아스티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한번 입어볼까?"
아스티나는 칼리스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칼리스는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마음 속에 피어나는 불안감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칼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티나는 드레스를 들고 검은색 비단 병풍 뒤로 갔다.
병풍 너머로 아스티나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비쳤다.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칼리스는 순간 숨을 멈췄다.
‘이 정도로 비쳤다니!’
“넌 당장 나가!”
칼리스가 카시안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카시안은 그런 주군의 반응이 못내 우스운지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올렸다.
그 시선을 마주한 칼리스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혹시 모르니, 나머지 선물들도 확인해 봐.”
“예, 주군.”
카시안은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천막을 빠져나갔다.

칼리스는 곁눈질로 병풍을 살폈다.
병풍 너머로 아스티나의 매끈한 굴곡이 고스란히 비쳤다.
애써 시선을 돌렸지만, 바스락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에 마른침을 삼킨 그의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선명하게 돋아났다.
"...어… 이게 어떻게..."
당황한 아스티나의 혼잣말이 병풍 너머로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이지?”
놀란 칼리스의 물음에도 아스티나는 아무 말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한참 동안 기다리던 칼리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병풍 뒤로 갔다.
“아스티나…”
병풍 뒤에는, 황제가 선물해 준 드레스가 빛을 머금은 채 요란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드레스는 가슴선이 깊게 파여 아무리 두 팔로 가려도 제대로 숨길 수 없었다.
노출된 어깨선을 따라 그녀의 떨림이 그대로 보였다.
게다가 치맛자락은 허벅지가 드러날 만큼 깊게 트여 매끈한 두 다리마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잔뜩 움츠린 채 눈물을 머금은 푸른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며 떨고 있었다.
칼리스는 핏속이 들끓고 살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 개새끼가!”
칼리스의 분노에 찬 나지막한 떨림에 아스티나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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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안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요.”
장막을 걷자 황제가 보낸 드레스를 살펴보고 있는 공주들이 보였다.
그때, 병풍 뒤에서 벨로나가 나타났다.
“이거 완전 미친 놈이네! 이런 걸 입으라고…”
카시안은 순간 머리를 크게 얻어 맞은 것처럼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다.
훤히 드러난 가슴골과 어깨선,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허벅지까지.
누가 봐도 남자의 욕망만을 위해 만들어진 천박한 드레스였다.
“하아…”
카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탄식을 뱉으며 잔뜩 찌푸린 미간을 어루만졌다.
‘주군이 가만있을 리 없겠군. 큰일인데.’
사랑에 눈 먼 주군이 이 불쾌한 광경에 냉정하게 대처하지 못할 것 같아 카시안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카시안의 시선을 느낀 벨로나는 부끄러워 얼른 몸을 돌렸다. 어쩐지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꺄앗, 이게 뭐야. 벨로나. 이걸 연회에서 입으라는 거야?”
정숙한 디에나는 드레스를 보고 아연질색하며 얼른 숄로 벨로나를 가렸다.
"…예쁘네요.”
한동안 드레스를 바라보던 루에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모두들 일제히 루에나를 쳐다봤다.
자살소동 이후 간신히 체력을 회복한 루에나는 예전의 생기도 밝음도 빛 바랜 상태였다.
"황제 폐하는... 참 잔인하신 것 같아요. 어쩜 이런 대단한 선물을 보냈을까요?"
루에나는 텅빈 눈동자로 카시안을 쳐다보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불편해진 카시안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자살소동 이후 어쩐지 그녀를 마주 대하기가 힘들었다.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
루에나가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허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우리에게 주제 파악을 하라는 뜻이었네요.”
루에나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누구도 본 적 없는 웃음이었다.
초점 없던 초록빛 눈동자가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노예 주제에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고 있었네. 좋은 천막에, 마차에, 옷은 또 왜 이렇게 깨끗하지? 칼리스가 어지간히 신경 썼나 보군.”
카시안은 갑자기 돌변한 루에나의 태도에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놀란 것은 공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얌전하고 소극적이던 공주가 갑자기 거칠어지다니.
게다가 칼리스를 이름으로 부르다니!
루에나는 칼리스가 무서워 최근까지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봤다.
“에이씨, 기분 더럽게!”
욕지거리를 뱉은 루에나는 카시안의 턱을 거칠게 젖히고는 눈을 맞추었다.
끝도 없이 우울하게 젖어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카시안은 순간 온 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
보라빛 눈동자가 서서히 일렁거리더니 나선을 그리며 카시안의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루에나가 호흡이 부딪힐만큼 카시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카시안”
그의 이름을 느긋하게 부르며 턱을 천천히 쓸었다.
“말해봐. 신탁의 여인을 찾았어?”
“아직… 모르겠습니다.”
카시안은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대답은 이미 입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 칼리스가 반려를 찾았어?”
황홀한 빛을 발하는 보라빛 눈동자에 카시안은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여기 없는 걸 보니… 아스티나 공주로군. 그렇지?”
“네, 맞습니다.”
카시안의 말에 루에나는 갑자기 기괴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드디어 찾았네! 찾았어!! 폐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군.”
한참을 웃던 루에나가 갑자기 카시안의 턱을 꽉 쥐더니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으악, 짜증 나! 너 뭐하는 거야! 칼리스를 제대로 보좌도 못하고 네 녀석 하는 일이 도대체 뭐지? 팔자 좋게 사랑 놀음이나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루에나의 과격한 태도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벨로나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루에나,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벨로나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는 순간, 루에나의 보랏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콰앙-!
보이지 않는 힘에 얻어맞은 듯 벨로나의 몸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그대로 기둥에 등을 처박은 벨로나가 힘없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꺗, 벨로나!”
놀란 디에나가 황급히 쓰러진 벨로나에게 달려갔다.
루에나가 시선을 돌리는 순간, 카시안은 굳어 있던 손끝이 겨우 움직였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는 루에나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쳤다.
퍽!
그대로 쓰러져 기절한 루에나를 뒤로하고, 카시안은 벨로나에게 달려갔다.
“공주님, 괜찮습니까?”
벨로나는 기둥에 부딪힌 충격으로 등이 쓰라렸지만, 조금 전의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된거야? 루... 루에나가 이상했어!”
어두운 낯빛으로 바뀐 카시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메레디아 짓입니다. 황제의 마녀예요. 메레디아가 나타났다는 건, 황제의 감시가 시작됐다는 뜻입니다.”
몸을 일으킨 카시안이 장막을 걷어 밖을 살폈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세 눈 까마귀들이 하나 둘 날아들기 시작했다. 어림잡아도 열 마리는 넘어 보였다. 세 눈 까마귀들은 보라빛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이리저리 살폈다.
“쳇.”
카시안은 혀를 낮게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부터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황제에게 전달될 겁니다. 저는 주군께 다녀올테니…”
말을 하던 카시안의 눈에 몸매가 훤히 드러난 채 앉아있는 벨로나가 보였다.
그녀의 무방비한 모습에 허리가 바짝 곤두섰다. 동시에, 누군가에게 저 모습을 보인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거칠게 뒤집혔다.
“...벨로나 공주님. 그 드레스는 얼른 벗으십시오.”
갑작스러운 카시안의 질책에 벨로나는 당황한 눈빛을 보냈다. 무안해진 카시안은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급하게 막사를 떠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