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2화) 달빛 아래의 첫 키스

매냐씨 2026. 6. 29. 14:09

 

화려한 샹들리에의 빛으로 반짝이는 연회장에는 아름다운 선율과 향기로운 꽃내음으로 가득했다. 밤의 궁전은 낯보다 훨씬 아름답고 화려했다.

 

에스카리엘의 모든 귀족들이, 에스카리엘과 카르테시온의 화합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 궁전은 그 어느때보다 활기로 가득했다.

귀족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어린 두 연인에게 쏠렸다.

찬란한 금발을 빛내는 두 사람은, 마치 장인의 정교한 손끝에서 탄생한 도자기 인형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앞으로 두 나라의 미래가 두 분의 미모만큼이나 밝아지겠군요.”

비슷한 분위기의 덕담이 여러 차례 반복되자 아스티나는 억지 미소를 유지하느라 볼이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귀족들은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했지만, 정작 관심은 혼담보다 서로의 권력과 이해관계에 있는 듯했다. 잔을 부딪치며 웃는 얼굴 뒤로 계산적인 시선들이 오갔다.

 

연회는 예상보다 훨씬 지루했다.

아스티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몰래 하품을 삼켰다. 귀족들은 끝없이 인사를 건넸고, 음악은 우아했지만 재미없었다.

 

그 와중에도 테오도르는 성실하게 약혼자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정했고, 상대를 배려하는 세련된 매너를 보여줬다. 흠잡을 곳 없는 모범적인 왕자의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그 완벽함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런 테오도르를 보고 있자니 아스티나는 살짝 짜증이 났다.

그녀는 테오도르의 옷깃을 살짝 끌어당겼다.

 

“…, 공주님. 무슨, 혹시 힘드십니까?”

긴장한 테오도르가 아스티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조금, 답답한 것 같아요.”

아스티나는 살짝 몸을 숙여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스티나의 부드러운 속삭임에 테오도르는 귀가 화끈거렸다.

 

같이 도망 갈래요?”

“…? !!”

그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테오도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의 솔직한 모습에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과실이 터지는 듯 산뜻하고 달콤한 웃음소리에 테오도르는 온 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테오도르의 손목 옷깃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왕궁의 정원은 밤에 정말 아름다워요. 같이 보러 가요.”

그들은 조심스럽게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마치 비밀스러운 모험이라도 떠나는 사람들처럼.

 

 

**************************

수국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 위로 은빛 달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짙은 꽃향기와 서늘한 밤공기가 어우러져 정원을 가득 채웠다.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느슨해질 만큼 아름답고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아름다운 정원과 때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밤바람이, 뛰느라 지친 두 사람을 나른하게 했다. 한참 웃고 떠들던 두 사람은 금세 조용해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반짝이는 불빛.

코를 자극하는 향기로운 꽃 향기.

 

밤바람이 스칠 때마다 얇은 드레스 자락이 살갗을 간질였다.

달빛 아래 가까이 서 있는 테오도르의 숨결마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스티나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라면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공주님은신기한 분인 것 같습니다.”

? 제가요?”

놀란 아스티나의 푸른 눈동자를 보니, 테오도르는 가슴이 다시 뛰는 걸 느꼈다.

 

처음엔 한없이 아름다운 분 같아서 어려웠는데지금은 더없이 가까워진 기분입니다.”

후훗, 가까운 기분이 들었다면 다행입니다. 우린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사이니까요.”

테오도르의 뺨 위로 수줍은 홍조가 천천히 번져갔다.

 

그런 테오도르를 보니 아스티나의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랑을 처음 배우는 사춘기 소년 같은 그의 서툴고 진지한 모습에 같이 물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테오도르는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수하고도 진지한 눈빛이 어쩐지 우스워 아스티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원래 이렇게 티가 나는 걸까? 서툴면서도 진심뿐인 그의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일까.

아스티나는 테오도르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문득 소설 속 장면들이 떠올랐다.

달빛 아래의 정원. 무도회. 그리고 첫 키스.

원래 이런 분위기에서 하는 거 아닌가?

 

테오도르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에, 그녀의 뜨거운 눈빛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테오도르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는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고 뜨거웠다.

 

왜 그렇게 보나요?”

웃고 있지만 가볍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

하지만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숨이 막힐 만큼 가까웠다.

 

그 순간,

아스티나가 가볍게 입술을 맞댔다. 새의 깃털 끝이 스치는 것 같은 찰나의 순간.

두 사람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얽혔다.

 

아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가까워진 거리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의 키스 때문인지. 심장이 이상할 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떨렸다.

 

테오도르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시는 그녀에게 이렇게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녀가 다시 장난스럽게 웃으며 도망쳐버릴 것 같아서.

 

이번에는 테오도르가 먼저 다가가 키스했다.

이번 키스는 아까보다 훨씬 길었다. 서툴지만 조심스러운 입맞춤. 서로의 숨결이 천천히 뒤섞였다.

 

멀리서 두 사람을 찾는 소리가 들렸지만,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심장이 어지럽게 뛰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거친 숨결이 뒤섞였고, 가슴속에서는 낯선 설렘이 끝없이 번져갔다.
두 사람은 차마 떨어지지 못한 채 서로를 조용히 바라봤다.

 

세상에 둘만 남겨진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

아스티나는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연회의 잔향이 여전히 방안의 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키스를 떠올리며,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소설에서는 분명 머리에서 종이 울리고 세상이 아름다운 색으로 물든다고 했는데.

실제로 느껴지는 건 약간의 흥분감과 촉촉한 입술의 감촉뿐이었다. 시험 삼아 손등에 입을 맞춰보았던 것과 큰 차이는 모르겠다.

 

아니, 그것은 자신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손등에 실험해 보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긴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집중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팔을 잡아 끌던 왕자의 강한 손아귀의 힘이 떠올랐다.

열기에 달 떴던 눈동자도.  

 

그래, 이쯤에선 인정해야겠다.

어리게만 보였던 왕자가 괜찮은 남자로 보였던 순간이었다.

아스티나도 첫 키스라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자신을 들뜨게 하는 기분 좋은 행위임은 분명했다.
왕자와 결혼을 해도 좋겠다, 고 진심 생각했다.

 

그래도 키스라는 건 좀 더 엄청난 거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곧 생각을 바꿨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던 나의 어린 약혼자를 생각하면, 자신이 나쁜 짓을 하는 것만 같아 미안했다.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구궁—!!

엄청난 굉음과 함께 왕궁 전체가 거센 파도에 휩쓸린 배처럼 크게 흔들렸다.
왕궁 곳곳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창밖에서는 붉은 화염이 용의 혀처럼 길게 치솟아 하늘을 핥고 있었다.

 

습격입니다! 지금 당장 대피하셔야 합니다!!”

황급히 들어온 시녀의 외마디 비명에 아스티나는 아연해졌다.

 

습격이라니. 누가!!

아스티나, 당장 이리로 와!!”

얼굴이 파랗게 질린 벨로나가 가운을 대충 걸친 채 놀란 아스티나를 데리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언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습격이라니?!!”

그 괴물이 쳐들어왔어! 빨리 도망쳐야 해.”

그 괴물이라니?!!”

칼리스 다스 발레리온!! 황제의 사냥개가 우리를 죽이러 왔다고!!”

 

밤하늘을 뒤덮은 검은 연기와 붉은 화염을 보는 순간, 아스티나는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 아름답기만 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스티나, 어서 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디에나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이끌었다. 네 자매는 서로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꽉 붙잡은 채 무너지는 회랑을 따라 정신없이 달렸다.

 

사방에서는 비명과 폭음이 끊이지 않았고, 아름답던 왕궁은 화염에 잠식되어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눈물을 삼키며 언니들의 뒤를 따랐다.

 

조금 전까지 웃음이 가득했던 공간에서는 이제 절규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화염에 물든 복도를 달릴 때마다 익숙했던 왕궁의 모습이 낯설게 일그러졌다.

 

그때였다.

무심코 창밖을 내려다본 아스티나는 순간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붉게 타오르는 화염 너머, 검은 갑옷을 입은 거대한 남자가 서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걸어 나온 악마처럼.

그의 붉은 눈동자가 불길 사이로 번뜩였다.

 

아스티나는 이유도 모른 채 숨을 삼켰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남자가 에스카리엘을 무너뜨린 괴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자신 또한 저 괴물의 손에 죽게 될 것만 같아 몸서리가 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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