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습격 Ⅱ

냉정함을 되찾은 칼리스의 살기가 전장을 짓눌렀다.
그 서늘한 압도감에 로웬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칼리스는 테오도르를 발로 걷어 차 날려 버린 뒤, 재빠르게 검으로 로웬을 공격해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방금 전까지 흔들리던 남자가 맞단 말인가?
로웬은 칼리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칼리스는 머리를 공격하는 척한 다음, 로웬의 오른쪽 팔을 그대로 잘라 버렸다.
“으으윽!!”
로웬은 고통을 견디며 왼팔로 지혈을 했지만,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네 멍청한 판단으로 다시는 검을 쥘 수 없을 거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말했다.
저 녀석은 악마다, 악마가 틀림없다.
왕자님이 위험하다! 이 악마는 분명히 왕자님을 죽일 거다!
대량의 출혈과 고통으로 눈 앞이 일그러진 로웬은 다급하게 테오도르를 찾았다.
테오도르는 칼리스에게 맞은 복부의 고통과 함께, 칼을 쥔 채 잘려진 로웬의 팔을 보며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칼리스는 이제 로웬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그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칼리스는 피 묻은 칼을 털어내고는 뒤돌아 테오도르에게 곧장 다가갔다.
테오도르는 죽음의 사신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지만, 두려움에 잠식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칼리스의 관자놀이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다시는 아스티나의 이름을 입에 담지 못하게 그를 당장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녀를 볼 수 없게 눈동자를 짓이겨 버리고 싶었다.
분노로 엉망이 된 머리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저 남자가 죽으면, 아스티나가 슬퍼할까?
칼리스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젖어 들었다가 다시 번뜩였다.
하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다.
칼리스는 망설임 없이 테오도르를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푸욱!!
“…크윽!”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로웬!!”
칼리스의 검이 테오도르를 감싼 로웬의 몸을 깊게 꿰뚫었다.
로웬은 피를 토하면서도 끝까지 테오도르를 밀쳐냈다.
“어서… 도망… 치십시오…”
로웬은 남은 팔로 칼리스의 검 끝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빌어먹을!!”
분노한 칼리스가 칼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로웬의 결연한 의지를 당할 수 없었다.
“안돼! 로웬!!!!”
테오도르의 절규가 숲 속에 울려 퍼졌다.
그때, 부단장 로스터가 말을 몰고 달려와 재빨리 왕자를 끌어올렸다.
“왕자를 놓치지 마라!!”
칼리스의 고함소리에 제국군들이 말을 잡기 위해 달려 들었고, 제국군이 쏜 화살이 테오도르의 다리에 명중했다.
“으윽!”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화살이 박힌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테오도르는 마음의 상처가 더 쓰라리고 아팠다.
“윽… 난 괜…괜찮다. 로웬이… 로웬이 아직 저기에...”
테오도르는 칼리스의 칼을 쥔 채 죽어가는 로웬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왕자님, 지금은 물러나셔야 합니다!”
로스터가 울먹이는 테오도르를 향해 거칠게 소리 질렀다.
“흐흐흐흑…. 내 탓이야…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야.”
테오도르는 자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모두들 후퇴하라!! 왕자님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로스터는 짧은 한숨을 내 쉰 뒤 남은 병사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로스터의 명령에, 남아있던 카르테시온 병사들이 목숨을 바쳐 왕자의 탈출을 도왔다.
병사들의 소중한 목숨을 담보로 테오도르와 로스터는 간신히 적진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사라지는 테오도르와 로스터를 보며, 칼리스는 칼을 든 손을 풀었다.
그 바람에 죽은 로웬은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피곤해.
칼리스는 피로 얼룩진 시체 더미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쉴 새 없이 몰아친 감정의 소용돌이에 지쳐 버린 것 같았다.
문득 아스티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칼리스는 피로 얼룩진 손으로 두 눈을 덮어 버렸다.
지금은 그녀를 볼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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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카르테시온의 급습에 제국군의 피해는 생각보다 컸다.
제국까지는 3일.
쉼 없이 달린다면 이틀 내에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공주 하나는 자살 후유증으로 누워있고, 또 다른 공주는 임신 중이다.
그리고.
테오도르를 부르던 아스티나의 잔상이 떠올랐다.
칼리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거칠게 눌렀다.
언제부터였지?
헤어나올 수 없는 진흙 더미에 점점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전투가 끝난 지 반 시각이나 지났는데, 도무지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엉망진창인 현실을 마주하면 언제나 냉정을 찾았는데,
어쩐지 온 정신이 아스티나에게 자꾸만 달려갔다.
너무나 그리우면서도 사무치게 원망스러워 죄 없는 입술만 짓이겼다.
칼리스는 속절없이 그녀에게 빠져드는 자신이 무서워졌다.
“주군, 대충 수습은 된 것 같습니다.”
어두운 표정의 카시안이 의무병과 함께 막사로 들어왔다.
“잠깐 쉬시면서 상처도 치료하시죠.”
칼리스는 그제서야 가슴과 등에 상처를 입었음을 깨달았다.
그 어리석은 애송이를 죽였어야 했는데.
테오도르를 떠올리는 붉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카시안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주군의 안위가 걱정스러웠다.
방금의 전투는 항상 냉정하고 주도면밀했던 주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카시안은 이 모든 것이 아스티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공주님을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상처를 치료하던 칼리스가 눈을 번뜩이며 카시안을 노려봤다.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어찌나 티를 내시던지.”
“입닥쳐!”
거친 칼리스의 음성에 의무병은 흠칫 놀랐지만, 카시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실을 인정하십시오. 잠깐의 일탈이라면 눈 감아 드리겠지만, 진심이시라면 멈추십시오.”
칼리스는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카시안의 진지한 눈빛에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군, 심장의 고통이 여전하신 것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깨어나지 못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칼리스도 알고 있었다.
갈수록 황제의 처벌에 견디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다음에는 어쩌면 영원히 악몽 속에 갇혀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냉정하게 판단하십시오. 공주님을 멀리하세요.”
칼리스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결을 흘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멀리하고 싶은 건 자신이다.
약혼자를 구하려고 그렇게 열심히던 여자가 여전히 보고 싶고 그리워 미칠 것 같았다.
칼리스는 결심을 새기듯 손끝을 말아 단단히 주먹을 쥐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닥쳐.”
칼리스는 시선을 피한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카시안은 긴장했던 어깨의 힘을 풀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네, 감사합니다. 주군.”
칼리스는 그 모습이 짜증나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반 시진 뒤에 출발한다. 준비해.”
“네, 주군.”
장막을 걷고 나오던 카시안은 주군의 처소 앞에 서 있는 아스티나를 발견했다.
카시안은 낮게 혀를 차며 미간을 구겼다.
카시안을 발견한 아스티나가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칼리스는 좀 어때? 피를 흘렸다고 들었는데!”
카시안은 형식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말을 이었다.
“주군은 괜찮으니 이만 숙소로 돌아가십시오.”
걱정으로 물든 아스티나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도 정말 괜찮은지 한번 봐도 될까? 내가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정말 괜찮으니 걱정 마십시오. 반 시진 뒤에 출발할 테니 준비를 서둘러주세요.”
카시안은 아스티나를 억지로 끌고 주군의 처소에서 멀어지려 애썼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듯한 아스티나의 간절한 얼굴에 카시안은 순간 마음이 흔들려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 것은 주군을 위한 일이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가까워져선 안 돼!
“한 번만 보는 건 안될까?”
“공주님, 제발… 주군을 힘들게 하지 마십시오.”
“아스티나.”
등 뒤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카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탄식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스티나는 자신을 붙잡고 있던 카시안의 팔을 뿌리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칼리스!”
칼리스는 눈을 활처럼 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 아스티나는 조바심에 졸였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붕대에 감긴 몸을 본 아스티나는 가슴이 저려왔다.
“괜찮지 않은 것 같아…”
자신을 걱정하는 아스티나의 모습에 칼리스는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잠시 들어와. 할 말이 있어.”
칼리스가 장막을 걷어 옆으로 비켜섰다.
그 모습을 본 카시안이 크게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칼리스는 카시안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카시안은 주군이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알았으니까, 꺼져.'
카시안은 어쩔 수 없이 물러서기로 했다. 이 이상 접근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칼리스는 아스티나의 손을 이끌어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을 말없이 쳐다보던 카시안은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심이신가… 정말 큰일이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