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냐씨 2026. 6. 30. 10:03

 

드레스 끈을 푸는 칼리스의 손 끝이 떨렸다.

능숙한 척하고 싶었지만, 긴장과 조바심이 얽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자신을 갈망하는 아스티나의 모습에 더 안달이 났다.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일까.

세상 어떤 것보다 소중해서 조심스러우면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칼리스는 자신의 흐트러진 욕망이 그녀를 다치게 할 것 같아 잠시 주저했다.

칼리스의 마음을 읽은 아스티나가 그의 옷깃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떨리는 푸른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리스…”

칼리스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이 벅차오르는 마음을 무엇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그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결을 흘리며 아스티나의 턱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때였다.

침입이다!! 침입자다!”

시끄러운 바깥 소리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칼리스는 튕기듯이 침대에서 일어나 장막을 걷어 바깥 상황을 살폈다.

밖은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아수라장이었다.

칼리스는 급하게 옷과 칼을 챙기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무슨 일이야?”

아스티나가 놀란 얼굴로 떨고 있었다.

칼리스는 이불로 아스티나를 감싸주고는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위험하니까 여기 있어. 상황을 살피고 올게.”

그 몸으로 나갈 생각이야?”

아스티나는 떠나려는 칼리스의 손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불과 조금 전만해도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걱정 어린 눈빛을 읽은 칼리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네 키스 덕분에 이 정도는 견딜 만해.”

아스티나는 방금 전 자신들이 나눴던 뜨거운 입맞춤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칼리스는 그런 모습이 귀여워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칼리스는 아스티나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위험하니까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 여기서 기다려줘.”

아스티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스는 사랑스러운 그녀를 한 번 더 눈에 담고 막사를 떠났다.

 

칼리스가 막사 밖으로 나오자, 밖은 이미 전쟁터였다.

칼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쇳소리.

거칠고 사나운 비명소리.

그리고 코 끝을 자극하는 진득한 피 냄새까지.

칼리스는 아직 남아있는 가슴의 통증에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어, 칼로 잠시 지탱하고는 숨을 골랐다.

 

어떻게 이런 실수를 했지.

적의 기척은커녕 살기조차 느끼지 못했다.

심장의 고통 때문인가? 아니면 그녀 때문인가?

칼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평생 긴장을 늦춘 적 없던 자신이, 한 여자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주군!”

카시안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칼리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허리를 곧게 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카르테시온군이 습격했습니다.”

카르테시온?”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낯익은 지명이었다.

 

카르테시온이 왜?”

카시안은 칼리스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카르테시온 왕자가 아스티나 공주님의 약혼자입니다. 저희가 쳐들어간 날이 약혼식이었구요.”

칼리스는 순식간에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 꼬맹이 왕자도 왔나?”

. 주군의 막사를 서성이던 것이 발각되어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습니다.”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내가 처리하겠다.”

주군, 낯빛이 좋지 않습니다. 저희가 처리할 테니 막사로…”

칼리스는 손을 들어 카시안의 말을 막았다.

카시안은 더 이상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뒤로 물러섰다.

애송이가 있는 곳을 얘기해. 그리고 넌 공주들을 지켜.”

, 주군.”

 

카앙!!

칼리스는 달려드는 병사의 목을 베어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가슴의 통증이 남아 있었다. 거기에 조금 전 일까지 겹쳐 이상하게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심장의 두근거림도 평소의 배가 된 것 같았다.

몸 상태만 정상이었다면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생각보다 카르테시온 병력은 잘 싸웠다.

역시 소문대로인가?

칼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제국군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병력이지만, 개개인의 실력은 막상막하일 것 같았다.

게다가 야영지는 지나치게 탁 트인 장소였다.

여러모로 대응이 늦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놈!!”

악에 받친 고함과 함께 누군가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곱슬거리는 금발에 초록빛 눈동자를 번뜩이는 어린 남자.

칼리스는 단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붉은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네 녀석이 아스티나의 약혼자구나.

칼리스는 칼을 쥔 손을 고쳐 잡고, 사냥감을 찾은 야수처럼 강렬하게 노려봤다.

 

테오도르는 눈이 돌아간 사람처럼 검을 휘둘렀다.

죽여버리겠어!!”

카앙!! 카강!!

검격은 거칠고 엉망이었지만 살기는 진심이었다.

칼리스는 싸늘하게 비웃었다.

고작 이 정도로 날 죽이겠다고?”

닥쳐!!”

테오도르는 이를 악물고 다시 달려들었다.

칼리스는 검을 비틀어 그를 끝내 버릴 생각이었다.

 

그 순간.

카앙!!

다른 검이 거칠게 끼어들어 칼리스를 방해했다.

로웬이었다.

그는 낮게 숨을 몰아쉬며 칼리스를 노려봤다.

칼리스, 오랜만이군.”

칼리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로웬경.”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치명상을 남기고 살아남았던 과거의 악연.

카앙!!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는 순간 엄청난 충격음이 터지며 주변 공기가 흐트러졌다.

칼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방금의 공격으로 심장의 통증이 온 몸으로 퍼져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테오도르까지 끼어들며 공격해오자 점점 균형이 흐트러졌다.

 

비켜 계십시오, 전하!”

싫다! 저 놈은 내 손으로 반드시 죽인다!”

테오도르는 발작하듯 검을 휘둘렀다.

칼리스의 붉은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네 주군은 제정신이 아니군.”

입 닥쳐!”

왕자님, 진정하십시오.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테오도르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감히감히!!! 그 더러운 입술을!!”

순간 칼리스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붉은 눈동자에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불길하고도 심오한 빛이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로웬은 등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왕자님이 죽는다. 반드시 죽을 것이다.

로웬은 저 눈빛을 알고 있었다.

갈드라드 고원에서 펼쳐졌었던 그 참혹한 전투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죽음의 사자가 귀환한 것이다.

로웬은 다급하게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아스티나 공주님, 테오 왕자님이 오셨습니다!! 왕자님이 여기 계십니다!! 아스티나 공주님!"

 

이 미친! 지금 뭐하는…”

로웬의 외침에 칼리스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칼리스의 칼끝에 서린 섬뜩한 살기에 테오와 로웬은 물론, 주변 병사들까지 움츠러 들었다.

죽일 듯한 기세로 두 사람에게 다가가던 칼리스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버렸다.

죽음을 각오했던 로웬과 테오도르는 의아한 얼굴로 칼리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장막을 걷어젖힌 채,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아스티나가 서 있었다.

 

아스티나는 상황을 파악하느라 잠깐 멈칫하다 테오도르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왕자님! 테오 왕자님!!”

당황한 아스티나는 맨발인 채로 정신없이 달렸다.

멈춰!! 죽이면 안 돼요!”

아스티나의 간절한 외침에 칼리스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뜨겁게 타오르던 행복이 산산조각 나며 가슴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이제 걱정 마십시오!”

아스티나를 발견한 테오도르가 벌떡 일어서서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칼리스는 왕자의 입을 거칠게 틀어 막았다.

테오도르의 몸이 휘청이고 고개가 옆으로 꺾일 만큼 강한 힘이었다.

!!”

꺄악, 안돼!! 멈춰!!”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아스티나의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리고 손이 떨렸다.

칼리스는 서운함에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피식 흘리고는 턱 근육이 불거질 만큼 이를 짓씹었다.

 

공주를 데려가! 빨리!!”

칼리스의 고함소리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서둘러 아스티나를 데려갔다.

멈춰!! 제발그를 죽이지 마…”

아스티나는 흐느끼며 병사들의 손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턱을 굳게 다문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자신을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이던 여인이, 지금은 다른 남자의 안위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니.

천국을 맛보게 한 여자가 순식간에 자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바로 그 찰나였다.

서걱-!!

붉은 피가 땅을 적셨다.

곧이어 등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파고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칼리스는 짜증스럽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웬이 검을 든 채로 자신을 향해 이격을 준비 중이었다.

칼리스는 칼을 고쳐 쥐고 로웬을 향해 짙은 살기를 흘렸다.

그 순간, 잠시 느슨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테오도르가 빠져나와 칼리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가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칼리스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쥐새끼 같은 녀석들.”

나즈막하게 읊조리며 분노를 털어낸 칼리스는 고개를 들어 아스티나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무심히 칼을 털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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